Nano Machine RAW novel - Chapter (23)
# 9장 이 단계 시험(2) #
늦은 밤, 구름 한 점 없는 어두운 하늘 위로 별빛이 수를 놓고 있었다.
천여운은 밤늦게까지 숙소 뒷산의 숲속에서 증강현실의 시뮬레이션 훈련을 마치고 이제 막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유시(酉時)부터 두 시진 동안 쉴 틈 없이 대련을 한 그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노머신인 나노가 상처가 날 때마다 치료를 해주었기 때문에 내외상은 없었으나 피로도가 쌓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아, 열다섯 번을 겨뤄서 고작 마지막 한 번밖에 못 이기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노의 전투 튜토리얼 모드를 사용하지 않고 제대로 겨루자 첫 대결은 고작 다섯 초식 만에 결판이 났다.
그 다섯 초식조차도 제대로 방어하거나 파훼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때웠다.
천무금 본인도 아니고 그를 분석해서 생성한 아바타에게 이렇게 졌을 정도면 그와 제대로 겨뤘다면 결과는 천여운의 처참한 패배로 이어졌을 것이다.
‘머리통을 부수긴 개뿔.’
울적해하는 천여운의 머릿속에 나노의 목소리가 울렸다.
[경험이라는 것은 축적될 수록 더욱 실력이 향상됩니다. 대련이 중첩될 때마다 주인님의 움직임의 변화나 접무도법의 초식을 알맞게 활용하는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나노의 말대로 천여운은 첫 대련에서 여섯 번째까지는 거의 일방적인 패배를 겪었으나, 일곱 번째에서 아홉 번째 대련까지는 중간 중간에 초식을 써가며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 번째에서 열네 번째 대련에서는 밀리는 와중에도 천무금의 아바타가 예측하지 못한 공격으로 반격을 해내기 시작했다.
대련의 회 차가 거듭될수록 겨루는 시간도 늘었다.
그렇게 마지막 대련에서는 삼십 초식 가량을 겨루다, 처음으로 천무금의 허점을 발견해 절무도법의 초식을 적중시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 뭘 해. 천무금의 초식이라고 해봐야 고작 세 초식을 돌려쓰고, 나머지는 기본 식 밖에 쓰지 못하는 녀석한테 고작 한 번을 이겼는데.’
그게 제일 분했다.
천무금이 대결에서 보여주었던 초식의 정보와 움직임, 공력의 강도만을 구현한 것을 알기에 녀석의 완전한 전력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완전하지도 못한 천무금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천여운에게 자괴감과 더불어 더욱 전의를 불타게 만들었다.
‘후우, 두고 봐. 딱 이레 안에 아바타 정도는 가볍게 꺾고 말테니까!’
[알겠습니다.]경험을 쌓는다는 것이 그저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은 천여운은 그렇게 첫 번째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이때 천여운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나노 머신이 증강현실로 생성한 아바타 천무금의 무공 능력은 대결을 통해서 보여준 정보를 기준으로 구현한 것에 불과했지만, 아바타 천무금은 천여운의 무공인 접무도법과 단검비술에 대한 모든 정보가 숙지된 상태라는 사실을 말이다.
실제 무공 대결에서 상대의 무공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미치는 영향력은 승패를 좌지우지할 만큼 컸다.
더군다나 매회 대결을 할 때마다 지치는 천여운과 달리 무한한 체력의 아바타를 상대로 한 번의 승리를 따낸 것은 그의 재능이나 오성(悟性)이 절대로 가볍지 않음을 의미했다.
-웅성웅성!
그렇게 천무금의 아바타와 대련했던 것을 복기하며 걸어온 천여운이 어느새 일관에 있는 팔 조의 숙소로 도착했다.
평소와 달리 천무금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떠들썩하던 숙소가 천여운의 등장으로 일순간 조용해졌다.
‘왔어!’
‘녀석이 왔다구!’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을 봐.’
숙소 내에 있는 생도들이 조용히 속닥거리는 반응을 보니, 대결을 지켜봤던 여섯 생도들에게 그 승패의 결과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은 여섯 종파 중 하나라는 압도적인 위세와 무력으로 팔 조를 군림해오던 천무금의 체제에 첫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천여운이 팔 조라는 생도들에게 일으킨 파문은 그 동안 교내에서 떠돌던 소문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그의 새로운 면모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복마종의 위세를 두려워하는 생도들이기에 천여운에게 쉽게 말을 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저벅저벅!
천여운이 자신의 침상 자리를 찾기 위해 숙소의 한복판으로 걸어가자 주변에 서있던 생도들이 자연스럽게 갈라져서 길을 터주었다.
마도관에 입관하기 전만 하더라도 밖에 나가기 꺼려질 만큼 멸시 혹은 동정의 시선을 받아오던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이게 힘을 가진다는 것인가.’
누구 하나 그를 우습게 여기지도, 만만하게 여기는 눈빛이 아니었다.
위세 등등하고는 하나 여섯 종파의 소교주 후보자 중 고작 한 명을 꺾었을 뿐이데, 이렇게 달라지는 태도와 시선에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숙소에 있지도 않는 천무금의 눈치를 보느라 그에게 쉽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내 자리가 어디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둘러보는 천여운에게 누군가 후다닥 달려왔다.
머리에 파란색 두건을 쓰고 있는 그는 의무실에서 천여운을 노렸던 이십삼 번 생도였다.
이십삼 번 생도가 침상을 두 손으로 공손히 가리키며 그를 안내했다.
“공자님의 자리는 이쪽입니다.”
“그래?”
의무실에 있을 때부터 그의 눈치를 봐왔던 이십삼번 생도의 말투와 행동은 마치 주군을 모시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다른 생도들의 눈빛에 의아함이 담겼다.
‘뭐야? 저 녀석, 왜 저러는 거야?’
라고 대다수의 생도들은 생각했지만 이것은 이십삼 번 생도에게 있어서 도박과도 같은 결정으로 빚어진 처세였다.
그는 자신의 종파를 돌봐준다던 천무금에게 임무를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토사구팽을 당하고 심지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처럼 얻어맞았다.
이것이 시발점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지가 소교주 후보면 다야!’
그 후로도 천무금은 시도 때도 없이 마도관을 나가면 이십삼 번 생도의 종파를 뒤집어 엎어버린다는 말을 남발하면서 그의 분노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불과 두 시진 전에 상처를 입고 나타난 천무금의 모습과 그의 패배를 알게 되었을 때, 이십삼 번 생도는 결심하게 되었다.
‘어차피 죽을 인생. 도박이나 해보자.’
그는 이번 마도관에 있을 소교주 쟁탈전에 천여운을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그를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주군처럼 생각하게 되고 행동에서 우러나오게 된 것이었다.
“너 전이랑 태도가 다르다.”
이 같은 변화를 당연히 감지 못할 천여운이 아니었다.
의무실에서 그의 눈치만 보던 때와는 다르게 눈빛에서 받드는 것이 보였으니 말이다.
“나한테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나?”
천여운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십삼 번 생도가 결심했는지, 모두가 지켜보는 한가운데서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저 이십삼 번 생도, 허봉은 공자님을 제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웅성웅성!
뜻밖의 충성 맹세에 숙소 내에 있는 모든 생도들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당사자인 천여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소교주 후보자들이 지지하는 세력을 가진 것처럼, 천여운 역시도 자신만의 세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때가 아니라고 여겼던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를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그때의 결례는 아직까지도 뼛속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공자님의 수하로 삼아 견마지로(犬馬之勞)로 모시게 해주십시오!”
진지하게 허락해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십삼 번 생도 허봉을 바라보며 천여운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하는 천여운 특유의 성격 때문이었다.
‘수하라……’
교주가 내려주신 장 호위와 달리 처음으로 스스로가 수하가 되기를 원하는 허봉의 모습에서 천여운의 가슴 속에는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나노 머신을 얻게 되고, 우호법 섭맹을 스승으로 모시고 난 후부터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인생의 길에서 천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허봉을 보고는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알기에 허봉이 기쁜 나머지 넙죽 엎드려서는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하!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이젠 별 거지 같은 꼴을 다 보는 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복마종의 소교주 후보자 천무금이었다.
패배의 충격으로 숙소에서 자리를 비우고 바람을 쐬고 있던 그는 대연무장에서 야간 추가 훈련을 마친 팔십 번 생도 자현과 함께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레 같은 놈이 누구한테 충성 맹세를 하는 것이냐!”
야간 훈련으로 녹초가 된 자현이었지만 그 광경에 화가 났는지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십삼 번 생도 허봉에게 소리쳤다.
‘헉!’
비록 천여운에게 충성 맹세를 했지만 팔 조의 두려움이자 실세인 두 사람이 나타나니 심장이 격하게 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을 파르르 떠는 것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도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끝까지 천여운을 바라보는 허봉의 굳은 결의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천여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자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 멋대로 남의 수하한테 벌레라고 하는 것이냐?”
“뭣?”
천여운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순간 자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평소에 그가 알고 있던 천여운이었다면 곧바로 건방지다고 외치면서 달려들었겠지만, 이미 천무금의 입에서 방심하다가 패했다는 말을 들은 자현이었다.
“벌레는 남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네놈이겠지.”
“뭐, 뭐야?”
“뭘 그렇게 말을 더듬어. 왜 겁나기라도 하냐?”
천여운의 도발하는 말에 자현이 화가 났는지 눈이 치켜 올라갔다.
평소에 늘 우습게 여겨왔던 존재의 변화가 쉽게 와 닿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 천한 놈이!”
분노한 자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빠르게 신형이 날리며 천여운을 향해 복마권공의 일 권을 날렸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여운이 가볍게 상체만을 움직여 일 권을 피하더니 그의 뒷목을 향해 도를 휘두르듯이 손날로 내리쳤다.
-퍽!
“크헉!”
뒷목을 맞은 자현은 눈이 뒤집어지며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자현이 펼친 복마공권의 삼 초식인 타연격공(打聯擊攻)은 천무금의 아바타가 시뮬레이션 훈련을 통해 수도 없이 펼친 통에 너무도 익숙했다.
“아바타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군.”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천여운을 이십삼 번 생도 허봉이 놀라움과 감격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아아!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주군으로 모시기로 결심은 했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도 없진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복마종의 혈손을 한 방에 쓰러뜨리는 압도적인 실력을 보고 나니 그런 불안한 마음이 씻은 듯이 날아갔다.
“왜 다시 한 번 붙어볼 테냐?”
천여운이 숙소의 입구 쪽에서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천무금을 향해 도발하듯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시뮬레이션 훈련에서 천무금의 아바타가 도발했던 것이 앙금으로 남아있었던 그였다.
하지만 실제 천무금의 태도는 달랐다.
“……흥, 지금 실컷 즐겨라. 고작 버러지 같은 수하 하나가 생겼다고 뭐라도 바뀔 것 같지?”
그 말과 함께 천무금은 천여운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숙소로 들어와 자신의 침상으로 가서 그대로 누워버렸다.
‘지, 지금 천무금이 피한 게 맞지?’
‘말도 안 돼!’
이 같은 천무금의 태도는 많은 생도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 오만하면서도 포악한 성격의 천무금이 먼저 도발하는 천여운과의 기 싸움에서 기세가 밀려서 싸움을 피했으니 말이다.
이 날을 계기로 팔 조의 숙소에 변화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천무금의 눈치를 보느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생도들이 조금씩 천여운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복마종이라는 위세 때문에 이십삼 번 생도 허봉처럼 대놓고 충성 맹세는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쩌면’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각인되었다.
그렇게 이레라는 시간이 흐르고 대망의 이 단계 조별 시험을 치루는 날이 다가왔다.
대연무장에 모인 모든 생도들은 조별로 모여서 오열을 갖추고 있었고,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의 손에는 진검과 철방패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