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 Machine RAW novel - Chapter (234)
# 73장 황제의 수신호위 (4) #
황릉을 보호하는 숨겨진 힘인 황궁 수호전 전사.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황궁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황궁에 항시 상주하면서 황제를 보필하는 삼창(三廠)의 제독들과 금의위를 통솔하는 지휘사, 그리고 대명제국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황제뿐이었다.
‘란영.’
오직 황릉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던 기린의 화신.
그녀의 불꽃이 도리어 그들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이십여 년 만에 보았거늘.’
근엄함을 유지하고 있던 황제의 미간에 그늘이 졌다.
황위를 물려받으면서 처음 그녀를 보았다.
젊고 혈기가 넘치는 황제였던 그는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적발의 머리카락에 요염함을 풍기는 매력에 빠져들었었다.
‘아름다움이 여전하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황으로부터 그녀가 대명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이곳 황릉의 보물을 지켜왔음을 알고나서 부터는 발길을 끊었었다.
“지금 그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오? 일 태상!”
지휘사 백자기가 어찌나 황당했는지 상기된 얼굴로 호통을 쳤다.
황릉의 보물과 황상을 보호해야 할 수호전 전사의 수장이라는 자가 갑자기 뒤통수를 친 셈이었으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금의위 도지휘사. 그대를 애송이 동지 시절부터 보았는데, 이제는 본 녀에게 호통을 칠 만큼 배짱이 많이 두터워졌구나.”
동지(同知).
애송이라 불렀지만 금의위의 도지휘사를 보필하는 정3품의 고위직이다.
북진무사 출신으로 두루 현장 경험을 쌓은 백자기는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동지에 올라, 차기 도지휘사로 내정되었다.
“크흠!”
란영의 일침에 백자기가 당황해서 헛기침을 해댔다.
그 역시도 지휘사로 부임하면서 처음 그녀를 만났고, 괜한 호기를 부렸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집이 황궁 수호전의 일인자라니 참으로 재미있구나.]-화르르륵!
[으아아악! 관복에 불이!]멋도 모르고 조롱을 했다가 새롭게 맞춘 도지휘사 관복이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잊고 있었는데 최악의 기억이 떠올려 버렸다.
“언제적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이오! 일 태상! 폐하를 모셔야 할 자가 마교인들을 보호하려 하다니, 반역이외다!”
-챙!
도지휘사에 오른 후로 출정식 때 외에는 뽑지 않았던 보검을 뽑았다.
녹색의 영롱한 검병에 검날이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날카로움이 극대화된 명검이었다.
검신에 새겨진 음각을 본 좌호법 이화명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순균!”
순균(純鈞).
초나라의 명장인 구치자(歐治子)가 만든 명검이었다.
한철로 주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구치자가 만든 보검들은 소나 말의 머리도 한 번에 베어서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 날카롭다고 전해진다.
-우웅!
순균에 푸른빛 검강이 발현되었다.
“상황(上皇) 폐하께서 주신 검으로 네년을 벌하겠다.”
한참 현역이었던 북진무사 시절에 전 황제를 모시고 북방의 야만족을 토벌하면서 공을 쌓은 백자기는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십대 명검 중에 하나를 받았다.
‘호오! 저 검을 실물로 보다니.’
사욕이 없는 이화명조차 관심을 보일 만큼, 무인이라면 탐이 나는 보검이었다.
반면 정작 보검을 뽑은 백자기의 시선은 란영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일 태상. 상황 폐하를 잊지 않았으리라 믿소.’
무(武)에 관심이 많았던 전 황제 주금서.
그는 종종 황궁의 무인들을 데려가서 란영과 겨루게끔 했었다.
그때 늘 들고 갔던 검이 이 순균이었다.
‘저들의 어떤 꾐이나 수작에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일 태상 다시 상황 폐하의 은혜를 떠올리고 돌아오시오!’
백자기의 진정한 목적은 그것이었다.
보검 순균을 보이면서 상황에 대한 추억과 충성심을 떠올리게 하는 것.
근 이백 년을 황릉에서 보낼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자라면 충분히 저들의 수작에서 넘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압!”
-팟!
백자기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천여운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란영에게로 뻗어나갔다.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났으나 전 황궁 삼대 고수 중의 한 사람이 그였다.
날카로운 보검 순균에서 발한 화려한 검초가 수많은 잔영을 그리며 동시에 란영을 뒤덮었다.
-촤촤촤촤촤촤!
찌르기로 요혈을 노리는 잔영들은 허초였다.
진정한 초식의 진수는 그녀의 정중선을 단숨에 베어내기 위해 수직으로 내려치고 있었다.
초식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그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초식은?’
낯이 익은 초식에 이채가 띠었다.
하지만 이대로 직격당하면 허초라고 해도 당하고 만다.
-화르르륵!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화염의 벽이 앞으로 치솟았다.
아무리 정교한 허초라고 해도 화기로 만들어진 방어선에 막혀버리자 일시에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막다니? 하지만!’
이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지휘사 백자기의 보검 순균이 화염의 벽을 가르며 그녀의 머리부터 정중선을 내리쳤다.
그러나,
-창!
검강에 뒤덮인 보검 순균이 막혀버렸다.
장법의 고수답게 찰나의 순간에 백자기의 진초를 강기가 실린 두 손으로 박수를 치듯이 잡아버린 것이다.
‘손으로 이걸 잡다니? 역시 괴물이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전한 것이지만 역시였다.
전에도 수차례 상황의 명으로 겨뤘었지만 한 번도 다섯 초식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번에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노림수는 다른데 있었다.
-부들부들!
공력에서 밀렸기에 검병을 잡은 손을 떨면서 백자기가 입을 열었다.
“일 태상! 이 초식이 기억나지 않소? 상황 폐하께서 만드신 검초를 그대가 이렇게 보완해주지 않았소.”
그랬다.
지휘사 백자기가 펼친 이 검초는 상황 주금서가 만든 초식이었다.
이를 보여줌으로써 옛 추억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떠올리게 하려는 절묘한 노림수였다.
“떠올리시오. 그 순간을.”
백자기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란영의 심후한 공력에 의해 붙잡혀 있던 검신의 떨림이 멈췄다.
“아!”
자신의 노림수가 통했다는 생각에 백자기의 눈빛에 화색이 돌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댕강!
‘댕강?…….엇!?’
환해졌던 백자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상황 폐하께 하사 받아, 반평생을 애지중지 여기던 전설의 보검 순균의 검신이 두 동강이 나버린 것이었다.
‘내….내 거어어어어엄!!!’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 조각을 따라 내려가는 백자기의 두 눈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란영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떠올리라는 것이냐? 지휘사 그대의 추억을 미화시켜서 본 녀에게 강요하지 마라.”
“네 이년이…”
-화르륵! 파앙!
“크헉!”
백자기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란영의 불꽃을 휘감은 일장이 가슴을 때렸다.
화기와 함께 가슴을 파고드는 심후한 공력에 그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부웅!
“도지휘사!”
정면으로 튕겨나가는 그를 북진무사 영조가 잡아냈다.
-팍!
‘이런!’
-타타타타타탁!
그러나 도중에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몸에 실려 있는 공력이 워낙 강하다보니 바닥을 질질 끌면서 밀려나야만 했다.
황궁 최고의 검객이라 할지라도 현경의 고수인 그녀의 내공에 미치진 못했다.
“흥! 하여간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어느 남정네들이든 다를 바가 없구나.”
란영에게 이곳 황릉에 대한 기억은 절대로 추억이 아니었다.
동료들을 잃은 지독한 외로움과 당대 교주의 명을 지켜야 한다는 충정으로 버텨온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을 떠올리라고 강요해봐야 오히려 심기를 건드는 꼴이었다.
“크으으윽!”
-치이이이익!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백자기의 입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늘 소중하게 여기던 보검 순균이 부서져서 화를 내고 싶어도, 오장육부로 파고든 화기를 몰아내는데 집중해야만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했건만 도지휘사를 망설임 없이 부상 입히자,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이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일 태상! 정녕 그대가 황제 폐하를 배신하겠다는 것인가!”
“배신? 지금 누구더러 배신이라고 하는 것이오. 제독.”
“지금 그대의 행동이 대명제국에 대한 배신이나 역모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표현한다는 것이오!”
그런 서태식의 말에 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침을 가했다.
“본 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신교를 위해서 살아왔다. 그 옛날 당대 교주님의 명을 받고서, 이곳 황릉에서 신교의 보물을 지켰는데 무엇이 배신이라는 것이지?”
배신이라는 말은 문란영 그녀를 모독하는 표현이었다.
오직 마교에 대한 충정으로 살아온 그녀였다.
하지만 숨겨진 그녀의 존재는 알아도 이백 년 전의 맹약을 지금의 관료인 서태식이 알 리가 없었다.
“마교의 보물?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멈추어라.”
그때 누군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폐하?”
그의 말을 가로막은 자는 다름 아닌 황제였다.
마교 교주임을 알고 나서 잠시 방관하던 그가 나서자,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은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당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란영과 눈이 마주친 황제는 과거를 떠올렸다.
당시 황위를 물려주면서 상황이 말했었다.
[황상은 들으시게. 황릉의 보물인 기린의 진원과 피는 엄밀히 말하면 황실의 것이 아니네.] [황실의 것이 아니라뇨?]지금까지 몰랐던 진실에 그 역시도 당혹스러웠었다.
상황 주금서는 선대 황제들로부터 들어왔던 계약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수호전의 일 태상 란영은 태조 폐하와 건국 시초에 계약을 맺고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 마교의 무인일세.]원래는 시간이 흐르면서 황릉을 지키는 무인들이 전부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태조였다.
마교인들이 전부 죽게 된다면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잊혀 질 거라 여겼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지막 남은 마교의 무인인 문란영이 기린의 피를 복용하고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명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건만.’
그것이 당대 황제인 자신의 대에서 벌어질 줄은 몰랐다.
하긴 황릉에 있는 기린의 진원과 피가 탈취되었다면 더 이상의 계약은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당대의 마교 교주가 이곳에 직접 나타났으니 말이다.
“……일 태상의 말이 전부 맞도다. 그녀는 마교의 사람이 틀림없다.”
“!!!”
황제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황제의 말에 불꽃의 원안에 있던 관료들이 전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알지 못한 비밀이 드러났다.
대명제국의 보물이라 여겼던 기린의 피와 진원이 전부 마교의 것이었고, 황궁의 숨겨진 힘이라 불려왔던 자가 마교의 무인이라는 것은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황릉의 보물이 마교의 것이라니…..”
그런 관료들의 당혹감과 달리 천여운은 황제를 달리 보게 되었다.
대명제국의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황궁의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이었다.
얼마든지 황제가 강하게 나오거나,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었는데 전혀 이를 개의치 않고 인정했다.
‘황제의 도량이 생각보다 넓구나.’
과연 이 광활한 중원을 다스리는 황제다운 도량이었다.
내심 황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궁금했던 천여운으로서는 이 점은 만족스러웠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이 마교주라고 했소?”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공대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에 관료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파 무림맹의 맹주에게조차 거의 하대하다시피 했던 황제가 정말로 동등한 관계의 수장을 대하듯이 공대를 해주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천여운도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변했다.
그러나 대화의 처음이 부드럽게 오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짐이 거두절미하고 이야기 하겠네. 짐의 둘째 아들인 성왕을 도와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네. 하나, 이곳은 황궁일세.”
점차 황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 짐의 허락 없이 함부로 황궁에 침입하고 난리를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아닐세!”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은 없었다.
천여운과 마교인들은 무단으로 황궁을 침입한 것이었다.
황제가 나무라거나 그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단 극도육무문의 문제만 얽혀있지 않다면 말이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하지만 여기서 일부 오해를 풀고 넘어갔으면….”
바로 그때였다.
-솨아아아아아!
천여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방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일어나며, 공동 한가운데와 삼백 명의 금의위, 환관들을 격리시켜놓고 있던 불꽃이 일제히 꺼졌다.
-슉!
그와 동시에 황제의 앞에 대내행창의 환관 한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었는데, 얼핏 보면 여자처럼 보이기도 할 만큼 예쁘장한 외모를 지닌 환관이었다.
‘빠르다.’
좌호법 이화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움직이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은 젊은 환관이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 사죄드리옵니다. 명하신대로 계속 지켜보려고 했으나, 더는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어서 이리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에 지금껏 당당하기만 했던 란영의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신호위!”
란영의 불꽃을 잠재우고 나타난 젊은 환관.
그의 정체는 바로 황제를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堡壘)라 불리는 수신호위였다.
단지 숨어있다가 나선 것뿐이었는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고 했노라.”
“명을 내려주십시오.”
이에 황제가 근엄한 얼굴로 천여운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교주, 귀 공이 황궁을 멋대로 침입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짐과 황궁의 힘을 가벼이 여겼다는 것이겠지. 지금부터 본 황궁의 진정한 힘을 보여줄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