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 Machine RAW novel - Chapter (236)
# 74장 놈을 건드리지 마라 (1) #
무공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하다.
삼류에서 일류 사이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더욱 위의 경지로 올라갈수록 그 간극은 전과는 천차만별로 올라간다.
무림인들이 높은 경지로 올라갈수록 외공보다는 내공이나 고차원적인 깨달음에 매달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단적인 예로 현경 초입부터 시작해 극까지 단계별로 올라갈수록 내공의 보유량이나 초식에 실을 수 있는 공력의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진다.
물론 초식에 있어서는 얼마큼 이해도가 높은가 혹은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능력은 무공의 경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질지 모르겠으나, 같은 경지가 아니고는 이 간극을 메꾸기란 쉽지 않다.
파상검제 임규화.
그의 추정 무공의 경지는 현경의 극(極)이다.
현 오대고수들과 비교해도 상위 세 손가락에 드는 실력자임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무(武)에 대한 경험은 현 무림에서 수위에 꼽힐 만한 절대자라 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쉽게 제압하다니…..’
심각하게 우려하던 대호법 마라겸과 대장로 문란영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교주인 천여운을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임규화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서 그 기운을 드러내는 순간 설사 천여운이라고 할지라도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과 세 초식 이내로 목이 베이고 말았다.
‘허어! 이럴 수가.’
이를 지켜보고 있던 청수 진인과 공동파의 제자들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고 했던가.
수신호위라고 했던 임규화를 보았을 때, 무림맹주인 북정도 이목을 처음 대면했을 때가 떠올릴 만큼 떨림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그를 삼류 고수를 상대하는 것 마냥 팔과 목을 베어냈다.
‘빈도의 두 눈이 잘못 되었을 리가 없다. 방금 그 검은 불꽃으로 만든 검은 무형검이 틀림없다!’
무형검(無形劍).
형태가 없는 무형의 기운인 진기를 유형화한 검이다.
화산파의 초인이자 전설이라 불리는 독고구패가 선보였던 전설적인 이 검은 오직 생사경의 경지에 올라야만 가능한 수법이었다.
‘그 검은 절대로 검강 같은 게 아니다.’
기를 응집하는 강기 또한 그 위력이 뛰어나나 무형검과 비견할 수 없었다.
파상의 원리와 이화접목이 극대화된 파상검막조차 단번에 꿰뚫을 정도로 그 위력이 경이롭기마저 했다.
“…..생사경!”
작게 중얼거리는 한 마디였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공동 안에 있는 자들 중에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무공을 연마하는 이들이 전설 속의 경지라 불리는 생사경을 들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새, 생사경이라니?”
“그게 정말로 존재하는 경지였나?”
북진무사를 비롯해 두 제독과 지휘사, 첩형들까지 누구 할 것 없이 경악한 나머지 혼란스러워했다.
수신호위가 어이없게 죽은 것 이상으로 충격적인 소리였다.
정파를 이끌어가는 십칠웅주의 일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지만,
‘허어, 저 자는 맹주님이신 이목 대협도 한 수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교에 역대급 괴물이 탄생했구나. 원시천존. 원시천존.’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청수 진인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당금의 마교주라면 동쪽의 그 괴물과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떠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 불리는 동쪽의 괴물.
워낙 무림을 활보하지 않아서 정보가 적지만 오대고수 중에서 유일하게 별호에 신(神)이라는 광오한 글자가 들어갔다.
그것도 싸움의 신이라 불리는 투신(鬪神)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그가 본격적으로 무림을 활보했다면 오직 두 주먹만으로 천하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을 거라 불리는 자였다.
‘괴물 대 괴물이라….’
그런 청수 진인의 귓가로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 이놈! 당장 폐하의 앞에서 물러나지 못할까!”
북진무사 영조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겨우 잡고서 천여운을 향해 겨냥하고 있었다.
수신호위를 죽이고서 황제의 바로 두 보 앞까지 다가간 그를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너무 전율적일 만큼 압도적인 무위를 눈앞에서 보고나니, 아무리 충심이 높은 그라고 해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검에 죽을 거야.’
나서는 순간 죽는다는 확신이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발을 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북진무사 영조의 목에 어느새 서슬파란 검날이 들어왔다.
독특한 문양의 가면을 쓴 대호법 마라겸이었다.
“며, 명왕!”
“약속하지.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뗀다면 수신호위라는 자와 같이 수급이 바닥을 구르게 될 것이다.”
“큭!”
영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천여운이 아니더라도 이 지하 공동 내에서 대호법 마라겸을 비롯한 마교의 대장로라고 밝힌 란영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영조가 입을 다물면서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수신호위가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다니?’
차가운 지하 공동의 바닥을 구르고 있는 수신호위 임규화의 머리.
죽어가면서도 믿기지 않는지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저 자를 상대할 수 있겠나?] [겨뤄봐야 알겠지만 절대로 소신이 패배할 일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황궁을 찾아왔던 오대고수의 일인이자 무림맹주 북정도 이목을 보았던 수신호위 임규화가 했던 말이었다.
당대 오대고수를 보고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그가 고작 세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차가운 주검이 되어버렸다.
‘지, 짐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명분을 이용해서 이를 얻으려 하다가, 선대로 물려받은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수신호위를 잃은 것이다.
절대로 흔들릴 것 같지 않던 황제의 부동심에 금이 갔다.
근엄했던 눈빛에는 당혹감이 서려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걷고 말았다.
-탁!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제가 두려우십니까?”
만인의 이목이 집중된 지하공동이 일순간에 침묵으로 뒤덮였다.
‘아차!’
황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광활한 중원을 다스리는 대명제국의 황제가 뒤로 물러났다.
이것은 만천하를 포용해야 할 그가 상대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된다. 짐은 대명제국의 황제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당황한 황제가 천여운을 매섭게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당장 짐에게서 물러나지 못할까?”
이에 천여운이 다시 한 번 실소를 금치 못했다.
주도권을 빼앗겼는데도 황제라는 자리가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듯 했다.
천여운이 웃음기가 완전히 빠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군요.”
“착각? 지금 짐을 능멸하려는 것이더냐?”
“능멸이라는 것은 폐하께서 저보다 우위에 서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말과 함께 천여운이 앞으로 한발자국 더 다가오며 손을 들어올렸다.
-부웅!
“!?”
그러자 황제의 몸이 심후한 진기에 휩싸이며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겪어보는 굴욕에 황제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가, 감히! 이 무뢰배가 폐하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이 이를 참지 못하고 일갈을 지르며,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 신형을 날렸다.
-팟!
초입이기는 하나 화경의 고수답게 신법이 매우 빨랐다.
단숨에 천여운의 뒤를 점해서 그의 등을 검으로 찌르려고 했지만, 다른 천여운의 수하들이 이를 내버려둘 리가 만무했다.
-화르르르륵!
“아, 아닛!”
뒤를 노리려던 찰나에 그 앞으로 뜨거운 불기둥이 치솟아 벽을 만들어냈다.
이에 당황한 서태식이 화기가 느껴지는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는데, 역시나 란영이 손을 뻗어서 화기를 발출했다.
“누구 마음대로 그분의 뒤를 노리는 것이지? 서 제독! 죽고 싶지 않다면 허튼 짓을 삼가라!”
“일 태상 그대가 기어코!”
마음 같아서는 검강으로 단번에 불을 갈라서 통과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그 틈에 란영이 그의 뒤를 노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신하로서 황제가 능욕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순 없었다.
설사 자신의 목숨을 던지더라도 군주를 보호하는 것이 신하의 덕목이었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한다!’
대내행창의 제독 서태식이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결의로 란영이 만들어낸 불기둥을 뚫으려고 했다.
“어딜!”
그러나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란영이 아니었다.
서태식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어느새 거리를 좁혀온 란영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법이 유려하게 허공에 수를 놓으며 그를 노렸다.
-우웅!
서태식은 스스로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고서 검강을 일으켜 불기둥으로 돌진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불기둥과 함께 마교주의 등을 벤다.’
어차피 목적은 그것이었다.
불기둥이 가로막고 있어서 방심하고 있을 천여운을 베고서 황제를 구해낸다.
그 각오로 검강이 실린 검으로 독문검법인 절연검법에서 가장 패도적인 절초를 펼치며 불기둥을 내리쳤으나,
-화르르르륵!
“엇? 거, 검초를?”
검강에 단번에 갈라질 거라 여겼던 불기둥이 용울음을 치듯이 회오리를 치며 상승하더니, 그의 검초를 쉽게 튕겨내 버렸다.
죽은 수신호위인 임교화가 쉽게 불꽃을 꺼뜨렸다고 가벼이 여겼겠지만, 발현되는 화기는 그녀의 역량에서 비롯된다.
현경의 고수인 그녀의 진기를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경고했다. 서 제독!”
“비, 빌어먹을!”
-파파파파파팍!
각오하고 있던 란영의 유려한 장법이 서태식의 등 전체의 요혈들에 강타했다.
반탄강기를 일으켜서 막아내려고 했지만 애초부터 공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타격을 고스란히 받고 말았다.
“끄아아아악!”
-우드드득!
갈비뼈를 비롯해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려고 했는데, 결국 뼈도 내어준 셈이 되어버렸다.
심한 부상으로 쓰러지는 제독 서태식을 란영이 뒷목을 잡고서, 천여운이 있는 곳에서 멀찌감치 던져버렸다.
-쿠당탕!
바닥을 뒹굴며 피 기침을 하는 서태식이 환관들과 금의위의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쿨럭쿨럭! 뭣들 하는 거냐! 당장 폐하를 보호하지 못할까!”
“하, 하지만…”
황궁의 전설이라 불리는 수신호위 임규화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에잇! 어차피 마교의 놈들은 고작 다섯이다! 대명제국의 폐하께서 치욕을 당하게 내버려두는 불충을 저지를 셈이냐!”
“추, 충!!!”
-챙!
신하로서의 불충을 꼬집는 서태식의 일침에 그들이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갈수록 혼란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곤란했던 그들이었지만 대내행창의 제독인 서태식의 말이 옳다고 여겨졌다.
‘그, 그래!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저 자는 혼자다.’
‘우리가 숫적으로 훨씬 우위야. 인간인 이상 지치지 않을 리가 없어.’
무공이 낮다고 해도 그들의 숫자만 해도 삼백 명이 넘었다.
쉴틈 없이 협공을 가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쿨럭! 쿨럭! 마, 마교주부터 노려라!”
“충!”
-팟!
보채는 서태식의 명령에 북진무사 산하의 금의위 다섯이 동시에 황제를 진기로 강제로 띄우고 있는 천여운에게로 검초를 펼치며 달려들었다.
“폐하를 당장 놓아랏!”
“이 역적 놈!”
-촤촤촤촤촤촥!
검초를 펼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삼백 명의 환관들과 금의위를 발견한 황제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짐을 내려놓는다면…”
그런 황제의 권고를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잘랐다.
“쓸데없는 기대심은 버리십시오.”
“뭐?”
그런 황제의 두 눈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천여운이 왼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폈는데, 그를 향해 검초를 펼치며 신형을 날리던 다섯 명의 금의위 무관들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박고 말았다.
-쾅!
“으억!”
“내, 내 코!”
“이, 이게 대체 무슨?”
정말 세게 부딪친 자들은 코뼈가 부러져서 코피마저 흘렸다.
보이지 않는 진기의 벽에 부딪쳐서 당혹스러워하는 그들을 향해 천여운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팡!
“크헉!”
“으아아악!”
강렬한 진기의 풍압이 일어나며 무관들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저, 저들을 받아줘랏!”
“충! 어어엇!”
-팍! 쿠당탕!
뒤에서 이어서 후속타를 날리려고 대기하고 있던 금의위 무관들이 날아오는 그들을 받아냈는데, 거대한 진기의 여파로 뒤로 네다섯 명이 우르르 넘어지고 말았다.
“으악!”
“끄웨에엑!”
날아오는 무관들을 직접 받아낸 자들은 심지어 피를 한움큼 토해냈다.
심후한 진기로 인해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익! 전부 공격해랏! 고작 한 명이다! 고작!”
금의위 천호장의 짜증스러운 외침에 백여 명의 금의위 무관들이 일제히 달려들려고 하는데, 천여운이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렸다.
-오싹!
“헉? 이, 이건?”
그러자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전율적인 진기가 일어나며 금의위들을 비롯한 이백여 명의 서창, 대내행창의 환관들을 짓눌렀다.
“이, 이게 진기라고?”
“말도 안 돼!”
당황해하면서도 그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으나, 동창의 환관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그들이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안간 힘을 쓰던 삼백 명의 관료들이 차례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강제로 무릎이 꿇린 그들의 얼굴을 하얗게 질려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안 돼. 이, 이건 괴물 그 자체야.’
‘폐, 폐하아아아!’
아무리 절대고수라고 해도 수로 밀어붙인다면 그래도 지치게라도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이건 아니었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그들은 황제 폐하를 볼 면목조차 없었다.
“어찌 한낱 인간이 이런 일을….”
황제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강제로 무릎이 꿇려진 환관들과 금의위들을 보면서 질려버리고 말았다.
근엄함과 냉정함을 유지하고 싶어도 도저히 불가능했다.
잔뜩 인상이 굳어진 황제를 향해 천여운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요. 그럼 다시 이야기를 해볼까요?”
여유로운 천여운과 달리 황제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 황제를 향해 천여운이 계속 말을 이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착각한다는 말이 어느 쪽의 입장인지 이해가 되셨는지요?”
천여운의 말에 황제는 인정하기 싫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괴물이라면 언제든지 마음먹는다면 황실에 침입해서 황제인 자신을 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정말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서운 현실이었다.
“뭐, 성왕 전하에게도 말했지만 태조께서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은 저희가 대명제국에 공을 세워서가 아닙니다.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크흠!”
굴욕적이었지만 차마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치욕을 당하기에는 황제로서의 권위와 자긍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황제가 입을 열었다.
“백번 양보해서 귀 공의 말이 맞다고 친다. 그런데 이렇게 짐을 위협하고도 뒷감당을 할 자신은 있는가? 아무리 그대가 절대고수라 해도 모든 귀교의 사람들이 그런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폐하께서는 만용을 부리는군요.”
천여운의 말에 황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호탕하게 웃어댔다.
“하하하하하핫!”
그리고는 천여운을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짐을 우습게 여기는구나! 아무리 막무가내인 귀 공이라고 해도 이 광활한 대명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인 짐을 죽이게 되면 일어날 여파들을 잘 알텐데 말이다.”
황제가 보이는 자신감.
그것은 대명제국이라는 거대한 중원을 통치하는 자의 부재로 일어날 여파 때문이었다.
당장에 그가 죽게 된다면 관료들끼리 서로가 지지하는 황자를 내세워 정권을 휘두르기 위해 분명 내전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정국이 혼란스러워진다면 한동안 눈치를 보고 있던 북쪽의 야만족을 비롯한 서역의 전투 부족들이 그 틈을 노려서 중원을 침략해올 것이다.
“그대는 절대로 짐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을 가할 수…”
-촤악!
“허억!”
바로 그 순간 언제 도를 뽑은 것인지, 새하얀 백룡도의 날카로운 도날이 황제의 목을 살짝 베었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당황한 황제가 놀라서 소리쳤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더냐?”
“폐하께서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과신이 지나친 듯 하군요.”
“뭣?”
“이가 빠지면 새로운 이가 나서 씹는 역할을 대신 하듯이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지요. 결국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하기 마련이죠.”
“지, 지금 귀 공이 하는 말은….”
목소리까지 떨리는 황제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천여운이 고개를 돌려서 성왕 주태겸을 슬며시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기 아주 훌륭한 ‘이’가 있군요. 게다가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장기말로요.”
“!!!”
붉으락 했던 황제의 얼굴이 일순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