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machines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101
101. 외곽 돌파
피를 머금은 나무말뚝을 내리치는 순간, 이한은 강력한 반탄력을 느꼈다.
마치 질긴 고무를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일격에 반쪽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칼이 튕겨 나갈 것 같은 느낌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진법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낸 호신강기 같은 것일까?
이한은 내공으로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무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만 익힌다면 내공이 실린 칼로 내리쳐도 오히려 칼의 이빨이 나갈 정도로 강력한 방어력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은 더 많은 내공과 더 강한 위력으로 공격하면 방어가 깨질 수밖에 없다.
진법으로 만들어 낸 방어력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으리라.
얼마나 강한 위력의 공격이 필요하느냐가 문제일 뿐.
그리고 하나 더.
더 강한 의지.
내공을 움직이는 의지.
진법이 만들어 낸 온갖 이상한 현상 따위는 단숨에 압도해버릴 정도로 강한 인간의 의지가 필요했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그래서 이한은 스스로에게 집중했다.
칼끝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에 오히려 반발하듯, 더욱 강렬한 의지로 내공을 운용했다.
이한의 의지에 따른 내공은 칼을 통해 뻗어나갔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반탄력이 사라졌다.
마치 칼로 수수깡을 내리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칼이 나무말뚝을 가르고 깊숙이 들어갔다.
얼마나 빠르고 강력했는지, 칼끝이 공기를 찢을 때 들린 파공음이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이한은 자신이 나무말뚝을 두 조각으로 쪼개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화살촉이 닿으려는 순간이라는 것도.
머리를 돌리며 살짝 고개를 젓히자, 화살촉은 이한의 이마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마에 가느다란 실선을 남기긴 했지만,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연달아 날아온 화살은 신경 쓸 것도 없었다.
한걸음 옆으로 이동하는 것만으로 모두 빗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숨을 들이켰다.
바람의 강도가 확연하게 약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머리통을 깨버리기에 충분할 정도의 속도로 공중을 날아다니던 돌들이 이제는 땅에서 구르고 있었다.
흙먼지와 모래는 여전했지만, 바람으로 인한 위험은 확실히 낮아졌다.
붉은색의 나무말뚝을 향한 일격이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연의 기운이 날뛰는 것은 여전했다.
자연의 기운이 회오리처럼 마을을 감싸고 도는 모습이 여전히 이한의 눈에 보였다.
위력도 아직은 별로 약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말뚝을 하나 더 부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저 회오리치는 기세가 줄어들겠지?
이한은 자신이 기억하는 다음 말뚝의 위치를 향해 움직이려고 했다.
그때였다.
방어탑에서 악을 쓰며 이한을 향해 계속 화살을 쏘아대던 적봉족의 전사들이 한순간에 모조리 목이 떨어졌다.
멀리서 휙 하고 날아오는 것처럼 다가와서 한달음에 방어탑으로 올라간 사람이 한 일이었다.
마치 매가 사냥감을 덮치는 것 같았다.
일장의 높이는 그에게 평지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일격에 세 명의 궁수를 베어버린 후,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모습도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기색이었다.
“제갈가의 사람답지 않게 무공이 정말 뛰어나군요.”
“별종이지. 가문에서 천기신행(天機神行)을 저 정도로 능숙하게 쓰는 녀석은 별로 없네. 거기에 대천성검법(大天星劍法)까지 익혔어. 다들 골방에 들어앉아서 책이나 보느라고 기껏해야 소천성검법 정도가 고작인데 말이야. 그래서 걱정일세. 이끌어 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명색이 명문세가인데 온통 책벌레들뿐이니 원.”
“그래서 이렇게 데리고 다니시는 모양이군요.”
“그래. 어떤 땡중이 관심을 보여줬으면 해서 데리고 왔지.”
“하하. 제갈 선배께서는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소림사로 보내시지요. 검법이라면 제 사형께서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 겁니다.”
“말이라도 고맙군. 그리고 자네.”
뜬금없이 나타나서 이한의 옆에 선 채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던 둘이었다.
그들은 이한을 향해 관심이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아무리 봐도 겉으로만 젊은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충분한 경험을 쌓기에는 이른 나이 같은 데도 무공에 제대로 뜻을 담을 줄 알다니! 일격에 천마금령(天魔禁靈)의 보조축을 부순 것을 보면 자네의 실력이 뛰어난 것을 알겠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진을 부수어 본 경험은 없는 모양이지?”
“천마금령 같은 절진을 알만한 곳이라면 제갈세가나 모산파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경험이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오히려 이렇게 축만 딱 알아내서 부순 것이 더 놀랍습니다.”
현각 대사는 이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보게. 낭인 검객. 이 정도로 강력한 진법은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힘도 강한 법일세. 심지어 작은 손상 정도는 스스로 복구하는 종류조차 있다고 들었네. 그래서 이렇게 강력한 진법을 부술 때는 제대로 박살을 내야 해. 이렇게 말이지.”
이마에 수인을 8개나 지져 넣은 현각은 이한에게 설명을 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쥔 손에 화염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내공이 유형화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한은 오행권의 화기를 끌어올리면 비슷한 모습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각 대사의 손이 세로로 두 조각이 나 있는 나무 말뚝을 내리쳤다.
순간, 불길이 아래로 뻗어가는 것 같았다.
붉은색의 나무 말뚝은 자신보다 더 붉은 기운에 휩싸이자,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렸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의 일격이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바람이 조금 더 약해졌다.
나무말뚝이 재가 되어 확실하게 사라지자, 진법이 물리적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화된 것이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과욕은 부리지 말고 조심하게. 혈교에서 진정으로 위험한 자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네.”
현각은 내공을 갈무리하며 호의섞인 충고를 건넸다.
이한은 자신이 낭인으로 오해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나노의 피부 관리 때문에 점점 젊어지는 모습은 둘째치고라도, 막북에서 낭인방의 낭인이 주로 입는 복장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숨어있던 구덩이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신이 흙투성이였던 점도 낭인으로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었다.
“진법에 대한 기초는 배워두는 것이 나을 걸세. 흥미가 생긴다면 제갈세가로 와서 제갈궁을 찾게나.”
제갈궁 역시 호의가 섞인 제안을 던진 후 몸을 날렸다.
갑자기 나타났던 사람들은 왔던 것처럼 갑자기 떠났다.
그들은 모두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이제 적봉족의 마을 내부로 들어온 자들은 재물과 명성을 노리던 어중이떠중이만이 아니었다.
방금 이한을 지나친 소림사과 제갈세가의 고수들처럼 지명도 있는 문파의 고수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어사대와 육선문의 관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고! 어사판관 대인. 제발 몸을 보중하십시오! 이러시면 저희가 죽습니다!”
결국 이한을 따라잡은 관리들은 이한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읍소했다.
그러나 이한은 귓등으로도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써먹기 좋은 패가 들어왔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약 관리들까지 열심히 날뛰어 준다면 그의 계획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말론을 빼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혈교를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큰 타격을 주리라는 점은 명백했다.
“충성심을 보일 기회다. 이곳은 사교이자 반역자인 소굴인 혈교의 본거지이니 너희는 혈교 토벌을 위해 전력을 다하라. 추후 공과를 평가하여 이를 보고하겠다.”
“예. 대인. 하지만 제가 호위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복세기는 필사적으로 이한에게 달라붙었다.
다른 관리들은 안면만 익힌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복세기는 여러 날 동안 이한의 손발 노릇을 하며 함께 고생한 인연이 있었다.
저렇게 파랗게 질려서 자신의 목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한은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더 위험하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구태여 말릴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래도 경고는 해주었다.
“좋을 대로 하라. 그런데 생명은 보장 못한다.”
이한은 복세기를 위해 한마디 경고를 한 후,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음 나무 말뚝을 향해 달려갔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외곽의 나무말뚝을 부수는 사람은 이한 말고도 여럿이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더라도 대놓고 나무말뚝부터 제거하려는 사람을 보면 나무말뚝이 뭔가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당연했다.
덕분에 이한이 다시 손을 대기도 전에 몇 개의 나무말뚝이 제거된 후였다.
나무말뚝을 지키던 방어탑까지 함께 몰살당하는 것은 덤이었다.
바람이 점점 기세를 잃어갔다.
이제는 모래가 아니라 흙먼지나 날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키를리안 시야를 켜 놓은 이한의 눈에는 아직도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을 감싸고 도는 기운은 여전히 거대했고, 조금도 속도가 느려지지 않았다.
자연의 기운이 움직이면서 벌이는 물리적인 현상이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마을 중심 쪽에서 벌이는 의식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지금 잦아드는 바람은 단순히 기압차이로 일어나는 평범한 바람이 아니었다.
자연의 기운이 진법에 반응하여 움직이면서 물질에도 영향을 끼친 결과 일어난 바람이었다.
만약 진법을 제대로 부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날뛰며 사람을 죽여댈 것이다.
역시 외곽의 나무말뚝을 부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외곽의 나무 말뚝을 하나 더 부순 이한의 시선이 마을의 중심부로 돌려졌다.
이한이 외곽에서 나무 말뚝을 부수는 동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을 내부로 들어간 후라서 곳곳에서 싸우는 소리와 비명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몰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한은 마을 중심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식이 진행되던 장소가 있는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하겠습니다. 목표까지 거리 300장.]“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자들이 문제일거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대문파의 무림인들까지 몰려갔는데도 전투는 일방적이지 않은듯했다.
예상은 했지만, 혈교의 저력이 만만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의 외곽에서처럼 방어탑에 의존해서 활이나 쏘던 유목민은 있지도 않았다.
조금만 내부로 들어가도 혈교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삼류에서 일류에 걸친 자들이었다.
어쩌다가 절정에 달한 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나의 세력에서 이렇게 많은 고수가 있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옥으로 꾀고, 혈교라는 명분으로 끌어들였음에도 무림인의 숫자만 따진다면 확연하게 밀렸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래도 좋은 꼴을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너무 늦기 전에 말론을 찾아서 탈출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판이었다.
이한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독을 쓰며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