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machines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134
134. 피에는 생명의 기운이 흐른다.
134. 피에는 생명의 기운이 흐른다.
혈교가 이리저리 안배를 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경사가 혼란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도시인 경사가 혼란에 빠지는 것이 그리 쉬울 리가.
사실 경사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짓눌려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루 두 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도로를 확장하면서 생긴 민심의 소요도 따지고 보면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이었다.
도로 주변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겠느냐 말이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소란이었다.
차라리 몇 년 전 빈민들이 얼어 죽을 때 일어났던 소란이 감정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들도 빈민처럼 추웠으니까.
그러나 도로에 구리관이 묻혀 있고, 조금만 수고를 들이면 1년치 수입을 상회하는 횡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길에서 현금을 주울 수 있다는 말에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반나절의 절반도 걸리지 않아서 경사의 끝에서 끝까지 소문이 퍼졌다.
그만큼 경사에 많은 사람이 밀집해 있고, 절실한 사람도 많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의 횡재를 막는다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사람들이 흥분해서 항의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왜 구리관이 묻혀있는 것인지, 누가 구리관의 주인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마치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것처럼 느낄 뿐이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분노할망정 아직은 자제할 수 있는 범위였다.
오랜 시간 고개를 숙이고 살아온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도 금방 고개를 쳐들고 항의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앞장서서 나선다면 뒤에서 함께 항의하는 정도는 용기를 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 지점에서 타협이 이루어진다.
먼저 앞장선 사람의 목이 매달리는 대신 폭동의 이유가 된 불만도 적당히 무마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 앞장선 사람이 혈교도였다는 점이었다.
단순한 폭동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원한 것은 피였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일을 키워서 파국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혈교도 중 일부는 가짜 관리로 분장한 후 함부로 사람을 죽임으로써 분노한 사람들을 자극했다.
또 다른 일부는 가짜 관리를 쫓아내며 기세를 올렸다.
상황을 모르고 끼어든 진짜 관리를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은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소요사태는 금방 폭동으로 발전했다.
몇 차례의 충돌과 칼부림으로 사람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벌어진 혼란이 경사 전체로 번져갔다.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치안이 마비되면 가장 먼저 벌어지는 일이 약탈이다.
물건은 훔치고, 건물에는 불을 지른다.
간혹 사람도 죽인다.
폭동의 이유와는 상관없이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범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쓸 것도 없으니, 혼란을 틈타 그냥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평소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이런 특별한 시기라면 주변의 분위기에 휘말려서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배가 고프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면?
어쩌면 범죄에 익숙한 사람보다 더 격렬하게 날뛸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좀 더 진심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나둘 선을 넘다 보면 결국은 폭력이 광기까지 불러일으키게 된다.
폭동이 벌어진 이유조차 잊어버리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약탈과 파괴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의 불만과 억눌림이 폭력으로 발산된다고 할까?
지금 경사의 상황이 그랬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건물마다 불을 질렀고, 상점을 약탈했다.
민가에 들어가서 물건을 가지고 나오고, 저항하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평소에 거들먹거리며 손짓으로 사람을 부리던 사람들은 목이 매달렸고, 곳곳의 관청이 박살났다.
세상이 뒤집어진 것만 같았다.
황궁으로 향하던 이한도 그러한 혼란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황궁에 못 미친 대로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고립당한 채 저항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으로 보면 남면방어사의 병사들임이 분명했다.
주변에는 온통 흥분한 폭도들이었다.
합창하듯 죽이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간혹 주먹만 한 돌덩이도 날아들었다.
잘못 맞으면 즉사할 수도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무기를 든 혈교도가 보였다.
그들 중 일부는 폭도들과 섞인 채 앞장서서 병사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또 다른 몇몇은 뒤에서 사람들을 선동했다.
심지어 간혹 실력이 뛰어난 군관이 난입하면 폭도들을 보호하며 반격하기도 하는 등 폭동이 거침없이 번져나갈 수 있도록 암약 중이었다.
막북에서부터 혈교의 단약을 먹고 날뛰던 자들을 여럿 보아왔던 이한은 혈교도를 한눈에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충혈된 눈과 비정상적인 기의 흐름, 혈교 특유의 외기를 이용하는 내공심법.
나노의 보조를 받아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주변의 환경을 볼 수 있는 이한에게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막북에서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들 중 상당수가 지금 당장 주화입마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격렬한 기의 흐름을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건물을 타고 날아가듯 달리던 이한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혈교도들에 의해 한쪽 구석으로 몰리던 병사들을 향해 곧장 뛰어내렸다.
이한은 칼을 튕겼다.
병사들과 대치하던 혈교도들의 바로 뒤에서였다.
뒤에서 공격당할 줄 몰랐던 혈교도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서야 공격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은 시점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칼끝이 바르르 떨 때마다 사람의 목이 하나씩 공중으로 치솟았다.
모두가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거의 동시에 4개의 목이 솟았고, 피가 주변에 뿌려졌다.
피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허겁지겁 물러서려고 했지만, 아직 살아남은 혈교도들은 오히려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거세된 것 같았다.
그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의 괴성을 지르며 이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이한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이한의 왼손이 과시하듯 크게 휘둘러졌다.
멀리서 보더라도 단숨에 시선을 끌 정도로 과장되고 화려한 모습이었다.
마치 춤사위와도 같았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뭔가 있어보이는 모습이었다.
이한이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 하나가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날아가기도 했고, 힘있게 뒤로 쏘아지기도 했다.
유난히 날뛰던 자들 몇을 그렇게 날려버리자 폭도들의 기세가 확 죽어버렸다.
이한의 생각대로였다.
앞장서서 날뛰던 혈교도들을 과시하듯 죽여버리자, 흥분했던 사람들이 제정신을 되찾고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죽여! 죽여!”
“돌을 던져! 던지라고! 맞으면 다 죽어!”
폭도들 사이에서 암약하던 혈교도가 먼저 외치기 시작했고, 주변의 사람들 역시 호응하며 구호라도 말하는 것처럼 반복해서 외쳤다.
아직 피가 식지 않는 자들이 일제히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먹만 한 돌덩이가 빗발치듯 날아오기 시작했다.
한때 군대의 정식 병종에 투석병이 있었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 투석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돌이라면 맞아 죽는 것이 당연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지만 이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공을 익힌 자들, 특히 내공을 쌓아 특별한 감각까지 일깨운 자들은 평범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그것은 무림인들 중에서 절정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일부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그들에게는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짧게는 1장에서 길게는 10장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수십, 수백 개의 암기가 날아오는 것도 모두 파악할 수 있는데 돌덩이 정도는 우습다.
이한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돌덩이 느끼자마자 그 돌덩이가 날아오는 궤적의 틈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그는 단 한발자국을 걷는 것만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대부분의 돌덩이를 피해냈다.
그렇게 하고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은 손을 휘둘러 간단하게 쳐냈다.
지나가던 돌덩이 하나를 손에 잡은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그 돌덩이를 던졌다.
폭도들 사이에 숨어서 선동하는 혈교도를 노린 공격이었다.
퍽!
둔탁하게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안면이 함몰된 혈교도가 뒤로 튕기듯 나가떨어졌다.
즉사였다.
무엇인가 날아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이후였다.
순간 죽은 혈교도 주변의 사람들은 일제히 얼어붙었다.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굳어버린 것이다.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투석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돌덩이를 던지던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고, 누가 죽는지도 모르고 돌덩이를 던지는 사람도 여전히 많았다.
그러나 맞추는 것은 여전히 하나도 없었다.
이한은 가볍게 걷는 것만으로 투석을 모두 피해냈다.
그러면서 계속 돌덩이를 잡아챈 후 자신을 공격한 자들을 향해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불쾌한 타격음과 함께 목숨이 하나 사라졌다.
폭도들은 몰랐겠지만, 죽은 자들은 대부분 혈교도들이거나 가장 앞장서서 날뛰던 자들이었다.
투석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흥분한 사람들이 내지르는 외침과 함성이 멀리서 들려왔지만, 이한의 주변은 조용했다.
이한 주변의 군중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공의 고수가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더 이상 이성을 잃고 날뛰던 폭도들이 아니었다.
겁을 집어먹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에 불과했다.
이한이 그들을 향해 한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군중은 한사람처럼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한의 앞에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 모두가 그렇게 움직였다.
그들 모두가 이한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한의 칼이 다시 앞을 겨눴다.
그 모습을 본 정면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처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이한은 앞으로 휙 하고 날아가듯 움직이며 칼을 휘둘렀다.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초식이었다.
크고 작은 반원을 연달아 그려낸 것이다.
햇빛을 반사하여 번득이는 반원이 찰나의 순간, 사방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대부분 칼의 길이를 훨씬 넘어서는 반원이었다.
반원이 지나가는 궤적에 있는 모든 것이 토막났다.
팔이면 팔, 다리면 다리, 몸뚱이가 가로로 잘린 사람도 여럿이었다.
철로 된 무기나 농기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이한의 칼을 막지 못했다.
밀밭에 낫질이라도 한 것처럼 군중의 한 부분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였다.
저항하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도망칠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비명이라도 지르며 도망치는 자들은 그래도 심지가 굳은 자들이었다.
일부는 오줌을 지리며 기어가기도 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겁에 질린 것이다.
이한의 칼에 서린 의념에 영혼까지 타격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앞으로 그들은 칼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한의 관심은 도망치는 자들에게 있지 않았다.
이한의 시선은 땅에 흐르는 피에 고정된 후였다.
보통의 사람은 물론이고, 무림인조차 특별한 공부가 없다면 볼 수 없는 장면이 이한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죽은 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가 땅에 흐르자, 피에서 보이는 생명의 기운이 구리관 쪽으로 움직이더니, 구리관을 따라 물줄기처럼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흐르는 방향은 황궁 쪽이었다.
이한은 더 이상 늦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황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