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machines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98
98. 이한이 꾸민 모든 일
이한이 적봉족의 영역을 주목한 것은 그 땅의 역사 때문이었다.
소금샘 초지라고 불리던 그곳은 원래 적봉족의 영역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이라고 주장할 만한 부족조차 없었다.
몇 년을 주기로 거주하는 부족이 계속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땅의 주인을 가리는 격렬한 전투가 수반되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살기 좋은 땅은 어디에서나 탐욕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막북같이 척박한 곳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얼마나 잘 먹고, 잘 살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부족이 생존할 수 있을지, 아니면 겨울의 한파에 몰살당할지의 갈림길에 서는 문제였다.
여기서 남에게 양보한다는 선택지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40여 년 전에 적봉족이 그 땅을 점거한 이후로, 전투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소금샘 초지는 4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적봉족의 땅으로 유지되어 온 셈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적봉족이 원래 막북에 거주하던 부족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40여 년 전에 신강에서 막북으로 이주해 온 집단이었다 .
신강?
거기 마교의 본거지가 있는 지역 아니었나?
적봉족이 신강에서 막북으로 이주해 온 집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한은 자신이 정답을 찾았음을 직감했다.
마교와 혈교가 갈라선 때가 40~50년 전이라고 하니 시기도 딱 맞아떨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일을 조사할수록 이상한 상황이 계속 튀어나왔다.
외지인이 밀고 들어와서 알짜 지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든가,
갑자기 주변 부족의 부족장들이 병으로 죽거나 반란으로 밀려났다든가 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소소한 충돌은 있었지만, 대규모 전투는 없었음이 분명했다.
유목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지 알 것이다.
누군가가 뒤로 손을 썼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누구인지, 어떤 목적일지는 뻔했다.
이한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적봉족이 곧 혈교였다.
적봉족은 마교에서 갈라져나온 혈교를 숭상하는 집단이고, 그들이 있는 곳이 곧 혈교의 총단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결론을 내리자마자 곧장 혈교를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지는 않았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면 이상하고 기괴한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일단 일이 시작되면 진실에 상관없이 적봉족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만약 이한이 실수한 것이라면 적봉족은 멸족할 것이다.
이한은 자신의 결론에 확신을 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적봉족의 영역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했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예상대로 적봉족은 부족 전체가 혈교도였다.
부족원들은 자신이 혈교도임을 적극적으로 숨기지도 않았다.
왜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이한 님이 옥을 쌓아놓은 곳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조사를 했기 때문에 적봉족의 정체를 알 수 있었던 겁니다. 막북은 이한 님의 출신 국가와 비교하면 10~15배의 넓이를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작정하고 숨어있는 집단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겁니다.]나노는 이한의 의문에 나름대로의 의견을 피력했다.
일리있는 생각이었다.
이한은 이번 일이 모래 속에 있는 바늘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막연하게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으라면 절대로 찾을 수 없겠지만, 일단 위치만 특정하면 찾는 것은 금방이다.
모래와 바늘은 달라도 너무 다르게 생겼으니까 말이다.
평범한 일반인과 혈교도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적봉족 전체가 혈교도이고, 그들의 영역에 혈교의 총단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 이한은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우선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혈교의 총단이 표시된 지도였다.
물론 이한은 혈교의 총단이 표시된 지도만으로 무림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림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었다.
이 세상을 파괴해야 한다고 믿는 혈교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보는 적지 않았다.
막북에서는 공포의 존재였고, 다른 지역에서는 뼈째로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사교도가 그들이었다.
토벌의 명분으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혈교의 총단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나설 만한 무림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혈교는 악명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명분 하나만으로 생명을 걸고 위험한 일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명분 하나에 목숨을 거는 자들을 대협이라고 부르고, 추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명분에 목숨을 거는 몇 사람의 대협만으로 혈교의 총단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소금샘 초지는 건물 몇 개 세워놓고 총단이라고 칭하는 곳이 아니라 한 부족의 생활 터전이기도 했다.
사실상 작은 도시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곳을 휩쓸려면 정말 많은 숫자의 무림인이 필요했다.
꼭 고수일 필요는 없었다.
대협이 아니라 소인배면 또 어떤가.
소인배가 휘두르는 칼이라고 해도 칼은 칼이다.
맞으면 죽는단 말이다.
이한은 숫자의 힘을 믿었다.
어중이떠중이라도 많이 모을 수만 있다면 숫자 자체로도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모여드는 무림인이 적봉족의 부족원 전체보다 더 많았으면 했다.
그렇게 된다면 혈교에 총단에 혼란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총단을 지워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많은 숫자.
정말 많은 숫자의 무림인을 모으고 싶었다.
그래서 이한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한 행동 동기에 호소하기로 했다.
그것은 이익과 명분이었다.
소인배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얻을 이익 때문에 움직이기 마련이다.
겸사겸사 명분도 함께 한다면 더 좋다.
평범한 사람일수록 명분까지 함께 한다면 더욱 기꺼이 움직이니까.
그렇다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득과 명분을 만들어 주면 된다는 것이 이한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한은 경사에서 빼돌려진 옥이 혈교의 총단에 있다는 내용을 지도에 추가했다.
다들 몰려와서 혈교의 총단을 박살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숫자만 충분하다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설사 박살까지는 못하더라도 사람 하나를 구할 정도의 혼란은 충분히 기대할만했다.
이한의 목표는 혈교 총단에 억류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말론이었다.
나노는 살아있는 말론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죽어있는 말론이라도 확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제국 남부로 내려가서 피라미드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노의 경고였다.
이한은 나노가 다운되어 있는 동안 이미 1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
그동안의 어려움은 나노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전과 달리 지금은 나노가 함께 한다지만, 그래도 기약없는 기다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이한은 말론을 확보하는 일에 사활을 걸었다.
새로운 지도를 만든 이한은 다음 수순으로 지도를 잔뜩 인쇄했다.
영고에 있는 모든 무림인의 손에 하나씩은 돌아갈 정도의 분량을 찍어낸 것이다.
그것을 개방과 낭인방을 통해 막북 전체에 풀어 버렸다.
두 번째로 하는 일이라서 개방과 낭인방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불과 하루도 지나기 전에 영고 뿐 아니라 막북에 있는 여러 무림 문파와 관청에까지 지도가 퍼졌다.
황보강과 상관유상이 입수한 지도도 바로 그렇게 해서 퍼진 것 중의 하나였다.
이한은 지도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자신의 기대보다 훨씬 더 일이 커질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의 진행을 위해 영고를 떠나서 소금샘 초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몇 시간 이내로 이한의 뒤를 따르듯 움직이는 무림인의 행렬이 등장할 것이다.
이한은 적봉족의 마을 근처에 매복했다.
무림인과 혈교도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혼란이 심해진 후에야 마을로 진입할 계획이었다.
적봉족의 마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나노 역시 외곽에서 기다리는 것을 권고했다.
혈교는 주술과 사술로 유명한 종교였다.
무공조차도 평범하지 않았다.
파괴의 춤을 통해 외부의 나노머신이 작동을 멈추는 것을 경험한 나노가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이한은 매복한 채 여러 종류의 시야를 바꿔가면서 적봉족의 마을을 관찰했다.
유목민 마을답게 대부분이 천막으로 된 집이었다.
화려함이나 특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유목민의 마을이었다.
시야를 바꾸어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키를리안 시야로도, 적외선이나 자외선 시야로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진법에 따른 특이한 절진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으면 키를리안 시야에서 거칠게 요동치는 기운이 보일 텐데, 그런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한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한의 머리 위를 여러 마리의 비둘기가 지나갔다.
새를 보기 힘든 막북의 사막지대에서는 특이한 일이었다.
비둘기에게서 이상한 점을 먼저 발견한 것은 나노였다.
[이한 님. 머리 위를 지나고 있는 비둘기를 잡아 주십시오!]그제야 이한 역시 비둘기가 날아가고 있는 것을 인식했다.
이미 이한을 지나쳐 멀리 날아가는 비둘기도 몇 마리 있었는데, 눈으로 보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노는 그렇게 지나간 비둘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이한을 부른 것이었다.
나노의 요청과 동시에 이한의 손이 하늘을 향해 뻗었다.
이한의 손을 떠난 독기운도 하늘로 뻗었다.
백 장이 넘는 거리였지만, 비둘기 같이 작은 새의 체급으로는 이한이 쏘아 보낸 독기운을 버틸 수 없었다.
독에 중독된 비둘기들이 곧장 땅으로 추락해 버렸다
비둘기들을 주은 후에야 이한도 나노가 발견한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즉사한 비둘기의 다리에 원기둥 모양의 작은 통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통을 열자, 작은 쪽지가 안에 들어 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서구를 통해 소식을 전달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얼마나 다급하게 비둘기를 보낸 것인지 쪽지에 써진 글은 암호문도 아니었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문자로 지도의 내용을 설명하고 무림인들이 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필적은 두 종류.
영고에 전서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적봉족의 첩자가 최소한 두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전서구를 통한 소식을 전할 때는 중간에 망실될 위험 때문에 같은 내용으로 여러 마리를 동시에 보낸다.
이한이 방금 몇 마리를 독기로 떨궜다고는 하지만, 이미 이한을 지나친 비둘기도 여러 마리였다.
혈교의 총단으로 무림인들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고 봐야 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나각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낮게 울리는 저음의 소리가 마을을 뒤덮었다.
혈교의 총단이 깨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