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igator Leveling Up RAW novel - chapter 33
“일단 갑판부원들 보고 좀 친하게 지내라고 하고.”
“네?”
“친하게 지내다 보면 마음도 터놓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한통 쓰고 싶고 그러지 않겠나. 경계심이 풀어졌을 때 물어보면 혹시 대답을 할지도 모르지.”
“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알겠습니다.”
양화종 일항사가 이희영 선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오래전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선배 항해사에게 들은 밀항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선박에 승선한 밀항자가 정체를 밝히지 않아 1년도 넘게 배에서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정체가 밝혀진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밀항자가 배에서 오래 생활하다보니 갑판부원들과 친해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밀항자도 가족들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쯤 선원들이 밀항자에게 사진을 찍어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자 밀항자가 냉큼 집 주소를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결국 밀항자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는 슬픈(?) 결론.
그때는 웃어넘긴 이야기였는데 막상 밀항자가 배에 나타난 현실을 마주하니 이 문제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비너스호도 수에즈운하가 가까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배를 두바이로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승선한 항구로 의심되는 두바이 항에 이 밀항자를 인계하려면 우선 유럽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두바이를 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이 밀항자를 그렇게 오래 배에 승선할 계획은 없었지만 말이다.
펠릭스토우에서 그를 무사히 내려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곳은 내가 이번항차를 마지막으로 교대를 위해 하선하는 곳이기도 했다.
* * *
– 이집트 수에즈운하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으로 지중해, 홍해 그리고 인도양을 연결하는 해운 교통의 요지이다.
해운회사 입장에서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가지 않는 이상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에즈 운하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수에즈 운하 근처에는 이곳을 통과하기 위한 선박들로 붐비고 있었다.
내가 수에즈운하를 바라보고 있자 이희영 선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삼항사.”
“네, 선장님.”
“수에즈 운하의 별명이 뭔지 알고 있나?”
“별명이요?”
“그래.”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해신해운의 천재항해사, 뭐? 만렙선원인 삼항사가 모르는 것도 있나보네?”
“…….”
“다행이군. 내가 아직 가르쳐 줄게 남아있으니 말이야.”
나는 이희영 선장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곳을 말보로 운하(Marlboro canal)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네.”
“말보로 운하요?”
나는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그 이유를 알겠나?”
“글쎄요. 저는 잘…….”
“이곳의 일부 도선사들 때문이라네.”
“아!”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수에즈 운하의 도선사들의 악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지켜보던 이희영 일항사가 생긋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처음 삼항사로 수에즈 운하에 갔을 때였지. 수에즈 운하 소속 도선사가 선박에 탑승했더군. 우리나라 도선사들과는 달리 매우 젊어 보였지.”
“오래된 이야기네요. 허허허.”
“그래, 지금도 별로 다르진 않네. 수에즈 운하에 처음 방문했다고 하니 운하를 사진으로 남겨두라고 하더군.”
“굳이 뭐 사진까지요?”
뭐, 하긴 처음 이곳을 통과할 때는 제법 감회가 있는 곳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컨테이너선을 타는 선원들은 이곳을 앞으로 자주 다닐 텐데.
이희영 선장이 이어 말했다.
“그렇긴 한데, 나도 사진을 찍었다네. 뭐 남겨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사진을 찍고 나니 운하는 군사지역이니 벌금을 내야 한다고 협박하는 거야?”
“네? 허허허.”
“그래 어리바리한 삼항사가 승선해 있으니 나를 타깃으로 삼았던 모양이야. 내가 당한거지. 사실 그걸 빌미로 뇌물을 달라는 말이었지. 결국 그에게 말보로 한 보루를 건넬 주고 일을 무마했다네.”
“그래서 말보루 운하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군요.”
씁쓸하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항구에 접안하거나 좁은 해역을 지날 때 그 지역의 조류, 바람 등 특성을 잘 알고 있는 도선사가 선박에 승선해서 선박을 조종하게 된다.
수에즈 운하도 좁다 보니 선박의 운항이 까다로운 지역으로 이집트 당국에서는 강제도선 구역으로 지정하였다.
반드시 도선사가 탑승한 상태에서 선박을 운항해야 하는 구역이므로 이런 강제도선 구역에서는 아무리 선박의 최고 결정권자인 선장이라고 하여도 도선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일부 개발도상국의 도선사들이 선박에 올라와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곳 수에즈운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들은 수에즈운하의 도선사들이 선박의 안전한 운항은 뒷전이고 뇌물을 최대한 많이 뜯어가려는 행태를 보인다며 울분을 토하는 이들도 많았다.
나도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선박에만 올라오면 이것저것 뜯어가려고 애쓰던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에즈 운하가 말보로 운하라고?
우리는 그를 ‘미스터 퐁퐁’이라고 불렀다.
미스터 퐁퐁(Mr. Pong-Pong)
미스터 퐁퐁(Mr. Pong-Pong).
수에즈운하에 있는 악명 높은 도선사의 별명.
전생에서 만난 그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겪은 도선사인 것처럼 배에 올라 갑질을 하는 미스터 퐁퐁 앞에서 나는 언제나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 퐁퐁이 제일 좋아하는 먹잇감은 대한민국 선적(선박의 국적)의 선박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배에 승선할 할 때는 절대 혼자서 올라오는 법이 없었다.
적어도 2명, 많으면 5명의 짐꾼을 대동했다.
도선사가 선박을 도선하는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하냐고?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짐꾼이었다.
미스터 퐁퐁이 도선하는 선박에 올라와 선원들에게 뜯은 뇌물을 챙겨갈 짐꾼.
매우 황당한 일이었지만 선박의 항해사들이 도선사의 노골적인 뇌물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만약 이들의 요청을 거부했다가는 사소한 문제를 트집 잡아 운항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매번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큰돈을 뇌물로 요구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을 직접적으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담스러운지 이들은 주로 선박에 있는 물품을 요구했던 것이다.
선박에 있는 음료수나 과자 같은 부식이나, 담배, 세재 같은 생활용품 등을 달라고 하니 이를 경찰에 신고하기도 애매한 노릇이었다.
물론 모든 도선사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역시 일부의 도선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
미스터 퐁퐁은 그런 악덕 도선사들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도선을 하러 승선하면 일에 집중하지 않고 틈만 나면 노골적으로 선원들에게 “퐁퐁”을 외쳤다.
‘퐁퐁’은 바로 그 식기세제인 ‘퐁퐁’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선원들은 그에게 ‘미스터 퐁퐁’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물론 퐁퐁만 받아간 것은 아니다.
겨우 퐁퐁만 받아가려고 짐꾼을 대동하고 선박으로 올라온 것이 아닐터.
처음에는 이들의 요구를 가볍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 선원들이 인심 좋게 나눠주던 것이 이들 바늘도둑을 소도둑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말도 있었다.
점차 배에 요구하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선원들이 이들의 요구를 받아 준 것은 아니었다.
미스터 퐁퐁의 요구를 거절하고 뇌물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용기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전생에 이항사로 승선했던 선박의 선장님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강단 있고 용기 있는 뱃사람의 표본!
주로 중국과 남미 사이의 철광석 벌크선을 탑승했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 도선사들의 횡포를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장이 미스터 퐁퐁의 요구를 거절하자 화가 잔뜩 난 미스터 퐁퐁은 다른 사소한 문제를 트집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수에즈 운하 한가운데서 도선을 거부하고 배를 정박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스터 퐁퐁은 수에즈 운하 한 가운데에 배를 세워버리고 홀연히 배를 떠나버렸다.
수에즈 운하는 강제도선구역이기 때문에 도선사가 없는 상태에서 운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선사가 하선해버리자 금방 운하의 교통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당황한 선장이 본선의 안전을 위해서 임의로 도선사가 없는 상태로 선박을 살짝 운하의 가장자리로 운항했다.
물론 이것은 미스터 퐁퐁의 함정이었다.
이를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미스터 퐁퐁은 이를 촬영해 이집트 당국에 도선법 위반으로 선장을 신고했다.
그리고 우리 배는 출동한 해경의 조사를 마치고 벌금을 가납(임시로 미리 납부하는 것)한 후에야 운항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미스터 퐁퐁의 악명이 더욱 높아졌다.
그 이후로 수에즈 운하에서는 그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 갑판
갑판에는 갑판부원들이 보수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 뒤로 한 사내가 큰 빗자루를 들고 따라다니며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런 일할 사람이 아닌데 고생하네.’
나는 압둘 무바라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왕정 국가의 후계를 다투는 왕자의 최측근으로 경제 관료였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빗자루를 들고 비너스호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나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나에게 인사했다.
그도 가만히 선실에 있는 것은 지겨웠던 모양이다.
압둘 무바라크는 여전히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행동 했지만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갑판부원들과 함께 제법 잘 어울려 지내며 생활하고 있었다.
갑판부원들을 따라다니며 청소를 하거나 잡일을 돕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이상할 만큼 해맑았다.
‘스트레스가 심했겠지. 오히려 지금이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인물이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껴 국외로 도망치고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배를 타고 밀항하는 신분.
지난 몇 주간 그는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 보였다.
‘저 양반 저렇게 맘 놓고 친하게 지내다가 전생에 선원들한테 정체를 들킨 거 아니야?’
나는 그가 전생에는 결국 선원들에게 정체가 탄로 났던 것을 떠올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갑판장님, 잠시 밀항자 좀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네 삼항사님, 뭐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아, 그런 건 아니고 배나 한 바퀴 돌아보면서 대화나 좀 시도 해볼까 해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니 눈치가 빠르고 똑똑해 보이는 친굽니다. 영어도 알아듣는 것 같은데 말을 통 안하니 참 답답하네요.허허허.”
갑판장은 내가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번씩 밀항자와 산책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이른바 굿캅, 배드캅(Good cop, bad cop)전략에 따라 굿캅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내가 그와 종종 산책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지자 나는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압둘 무바라크는 싱긋 웃어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민 아세르에게는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영국에서의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최대한 준비를 해두겠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삼항사님.”
“하하하. 진심이신가요?”
“네?”
“진심으로 말씀하신 거라면 제가 한 가지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별 일은 아닙니다. 그저 사람만 좀 소개해주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을?”
“네, 정계에 계셨으니 인접 국가들에도 인맥이 좀 있으시지요? 혹시 이집트 관료 중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나민 아세르를 통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떠오르는 사람이 한명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는 눈빛을 빛내며 그에게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 *
–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를 앞두고 멀리서 도선선이 다가오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가오는 도선선을 바라보면서 미스터 퐁퐁을 떠올렸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미스터 퐁퐁을 처음 만난 것이 이번 항차였기 때문이다.
‘꼭 그가 왔으면 좋겠는데.’
미스터 퐁퐁이 승선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특히, 지금은 전생과 달리 미스터 퐁퐁이 도선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시점.
아직 미스터 퐁퐁이 제대로 흑화(?)가 진행된 상태가 아니라는 뜻.
‘이번이 아니면 이놈을 갱생시킬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미스터 퐁퐁을 갱생하려는 건 내 순수한 복수심(?)의 발로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나름 숭고한 목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