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ctar RAW novel - Chapter (107)
어디선가 들려온 끔찍한 비명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강권주가 보였다. 온종일 그립고 또 애틋했던 그 남자의 모습이.
현실감이 없었다.
싸늘히 식은 얼굴의 남자는 조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황병찬의 얼굴에 쉴 새 없이,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마치 숨통을 끊어 놓을 듯이, 무자비하고 처참하게.
쿠웅! 쿵!
“커흑!”
황병찬의 몸이 단단한 차체에 이리저리 처박혔다. 커다란 주먹으로 무참히 연타당한 얼굴은 이미 핏물에 젖어 시뻘겋게 뭉개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황병찬은 더 발버둥을 치고 신음할 힘도 없는 듯 그저 축 늘어진 채 강권주의 주먹을 맞고만 있을 뿐이었다. 꼭 시체처럼.
그제야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이대로라면 남자가 황병찬을 때려죽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만…!”
그러곤 다급히 남자의 코트를 콱 움켜쥐었다.
“그만요! 이러다 죽겠어요!”
퍼억! 퍽!
그럼에도 반쯤 정신이 나간 강권주의 주먹질은 멈추질 않았다. 황병찬의 눈이 풀리고, 시뻘건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결국, 보다 못한 혜연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하, 대표님!”
그제야 광기 어린 주먹질을 멈추고 혜연을 돌아보는 남자의 안광이 더없이 탁했다. 분노로 헐떡이는 강권주의 숨소리가 전에 없이 거칠었다.
“그만 하세요. 더 하시면 안 돼요.”
혜연은 울먹이며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여기서 더 가면 당신이 위험해진다고.
툭.
커다란 손아귀에 묶여 있던 황병찬의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혜연은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를 마주하며 쓰라린 손바닥을 동그랗게 움켜쥐었다. 영원히, 그 심연을 알 수 없을 것 같던 새카만 눈동자엔 오롯이 제 얼굴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것 같았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한 번도 깨지 않은 채, 푹.
온몸을 감싸는 바스락거리는 이불의 감촉이 느껴져 기분 좋게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등 뒤에서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더 자. 너 더 자야 돼.”
단단한 팔뚝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익숙한 촉감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눌러 왔다.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린 혜연이 몸을 뒤척여 천천히 돌아누웠다. 현실감 없는, 지나치게 미려한 얼굴이 이마 위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나 얼마나 잔 거예요?”
“글쎄.”
발끝까지 울릴 것 같은 저음으로 답한 남자의 손이 혜연의 이마에 흐른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흘긋, 보이는 커다란 손등 위 상처가 당황스러웠던 지난 기억을 일깨웠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엄청난 소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고 어느새 도착한 영복이 상황을 뒷수습하는 동안 강권주의 품에 안겨 까무룩 정신을 잃듯 잠들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경찰에 넘겼어. 지금쯤 조사 받고 있을 거고.”
“…정말요?”
“정말.”
“…….”
“네가 걱정하는 일 안 했어. 원하면 확인시켜 줄게. 그럴래?”
제 생각을 읽은 양, 단호하게 덧붙이는 말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제 불안이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아서.
충분히 안심한 혜연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아파?”
큼지막한 손바닥이 혜연의 뺨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살짝 욱신거리긴 했으나 참을 만한 정도였다.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손은.”
손도 다쳤었던가. 혜연은 고개를 내려 제 손을 응시했다. 손바닥과 손등이 하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영문을 몰라 대답을 망설이자, 강권주가 말을 덧붙였다.
“손바닥이 찢어졌었어. 그래서 몇 군데 꿰맸고.”
“아….”
그제야 조각난 기억이 끼워 맞춰지듯 떠올랐다.
“많이 무서웠겠다.”
문득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에 혜연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강권주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그는 곧 의아한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혜연에게 더 믿기 힘든 말을 들려주었다.
“미안.”
“…….”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처음 듣는 남자의 진심 어린 사과에, 혜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울컥, 서러운 감정이 다시금 북받쳤다. 연갈색 눈동자에 투명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당신 너무 미워.”
저도 모를 말이 떨려 나갔다. 그녀에게 있어 밉다는 원망은 곧 너무 좋아한다는 고백이기도 한 까닭이었다.
왈칵 터진 눈물을 부드럽게 문질러 낸 그가 큼지막한 손으로 동그란 머리통을 끌어당겼다. 작은 몸이 그의 품속에 쏙 빨려 들어갔다.
혜연은 탄탄한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고 몸을 들썩였다. 최대한 애처럼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기어코 터져 나온 눈물을 좀체 참을 수가 없었다. 토닥토닥, 커다란 손이 아이를 달래듯 어깨를 두드렸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몇 번이고 다정히 쓸어내리며 뒷덜미를 감싸 쥐는 손길은 또 얼마나 따뜻한지…. 벅차오르는 이 마음을 도무지 멈출 길이 없는 거였다.
이 남자가 미워 죽겠다. 미운데, 미워할 수도 없을 만큼 사랑해서 더 서러웠다. 이제는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커져 버린 이 마음을 이 남자는 알까.
서럽게 들썩이는 혜연을 달래려는 듯, 이마 위로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엄마 젖을 찾는 아이처럼, 혜연은 그의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래. 알아, 네 마음.”
남자의 뜨거운 화답이 맞닿은 심장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됐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 남자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제 마음을 모두 다 알고 있는 남자의 품에서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두 사람을 감싼 다정한 시간이 느릿느릿, 꿈결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 * *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로비를 지나 뚜벅뚜벅,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가는 강권주의 잇새에서 긴 한숨이 샜다. 비단 사람으로 꽉 들어찬 이 비좁은 엘리베이터만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탓인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 전체적으로 정신없고 산만한 이런 분위기는 확실히 제 취향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왜 하필 이런 날, 이런 장소로 저를 불러낸 건지 모를 일이었다. 모처럼 만의 연휴에 조용히 침대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나 했더니만.
땡.
승강기의 양 문이 열리자 함께 탔던 사람들의 반 이상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같은 레스토랑으로 향할 거라곤 짐작도 못 한 일이어서.
“예약하셨습니까? 성함이?”
입구 앞, 불쑥 다가온 직원이 예약 여부를 물어 왔다. 제 이름을 대고 들어오면 된다고 종일 종알종알 떠들어 댔던 혜연의 말이 떠올라 그녀의 이름을 대자, 리스트를 확인한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앞장을 섰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선 레스토랑은 아니나 다를까 특별한 날을 기념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음과 다소 시끄럽게 느껴지는 재즈 음악이 퍽 거슬렸지만 그래도 딴에 이런 레스토랑을 알아보고 예약하느라 꼼지락거렸을 여자가 귀여워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
가장 안쪽의 구석 자리. 넓게 펼쳐진 통창 너머, 강남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는 식탁 앞. 다가오는 저를 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남혜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찍 오셨네요? 차 안 막혔어요?”
“안 막힐 리가 있겠어, 오늘 같은 날에.”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으며 대꾸하자, 혜연이 배시시 예쁜 미소를 지었다.
“뭐 먹을래? 와인 마실래?”
“아, 아뇨. 메뉴 제가 벌써 주문했어요.”
메뉴판을 집어 들려던 강권주가 흠칫, 손을 멈추며 눈썹을 들썩거렸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식욕도 없거니와 먹는 것에 관심 자체가 없는 그녀가 먼저 메뉴를 고르고 주문까지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며 가만 혜연의 얼굴을 살피는데, 어쩐지 평소보다 입술이 새빨갰다.
“너 화장했어?”
“이상, 이상해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되레 흠칫 놀란 혜연이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졌다.
“뭐 하는 거야, 이게?”
레스토랑 예약에, 화장에.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이따가 음식 나오면 말씀드리면 안 돼요?”
“뭐?”
“제가 준비한 게 있어서….”
“뭘 준비했는데요.”
“이따가요.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귀염성 있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는 여자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대강 짐작은 갔다. 아마 남혜연은 제 생일을 오늘로 알고 있을 테니 그걸 축하해 준답시고 이런 귀여운 짓을 했겠다 싶었다.
“이런 레스토랑은 어떻게 알고 예약했어? 와 본 적 있는 데야?”
“아뇨. 학교 친구가, 서윤이가 알려 줬어요. 여기가 요즘 SNS 핫플이라고 해서요. 원래 최소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하는 덴데, 갑자기 누가 취소했다고 해서 겨우 예약했어요. 여기 분위기 좋죠? 야경도 예쁘고.”
분위기는 정신이 없고, 야경은 매일 회사 대표실에서도 보던 것이라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잔뜩 들뜬 얼굴로 뿌듯해하는 혜연의 기분을 망치기 싫은 탓이었다.
와인을 들이켜는 입가에 피식, 어이없는 미소가 샜다.
“아,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혜연의 반가운 외침과 함께 그녀가 주문했다는 스테이크 두 접시가 식탁에 놓였다.
강권주가 자연스럽게 고기를 썰어 놓은 제 접시와 혜연의 접시를 바꿔 주며 물었다.
“음식 나왔는데, 말 안 해?”
“아… 음식 다 먹고 얘기한단 말이었는데…. 일단 드세요. 먹고 얘기해요.”
금세 또 말을 바꾼 혜연이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생일 축하를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강권주는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오물거리는 혜연의 얼굴을 관찰했다.
“예쁘긴 한데, 화장은 굳이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데.”
“왜요? 많이 이상해요? 어색하죠?”
“너 예쁜 거 나만 알면 되는데 뭐 하러 눈에 띄게 화장까지 하고 나왔냐고, 신경 쓰이게.”
뻔뻔한 그의 말에 혜연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걸 보면 아직도 애긴 애다 싶었다. 이렇게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를 보면서 발정하는 저도 참 답이 없는 새끼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