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ctar RAW novel - Chapter (108)
식사는 꽤 여유로운 속도로 끝이 났다. 빈 접시를 치우고, 빈 잔에 와인을 다시 따르는 동안 혜연은 어쩐지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빼고 흘긋거렸다.
그런 여자를 보고 있노라니 필연처럼 또 아래가 묵직해져 와인을 들이켜며 물었다.
“뭐 더 시켜 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실례합니다. 오늘 생일이시죠, 손님?”
어느 틈에 불쑥 다가온 서버가 자그마한 케이크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혜연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네. 맞아요, 생일.”
식탁 위, 한가운데 작은 케이크가 놓였고, ‘HAPPY BIRTHDAY’라 적힌 초에 불이 붙었다.
“생일 축하해요, 대표님.”
샐쭉이 웃으며 말하는 혜연의 얼굴을 보며 강권주는 어이없는 숨을 터뜨렸다. 주변에 앉아 있던 이들이 두 사람의 테이블을 흘긋거리는 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이런 유치하고 애들 장난 같은 이벤트의 주인공이 저라는 게 기가 막혔다.
“뭐 하세요. 소원 빌면서 불 끄셔야죠.”
기막혀하는 그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연이 케이크를 그의 앞으로 가까이 밀며 그를 재촉했다.
“얼른요. 다 녹아요. 네?”
결국 강권주는 눈앞의 촛불을 향해 하릴없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짝짝짝.
촛불을 끄는 남자를 보며 혜연이 한껏 소리를 죽인 손뼉을 쳐 댔다.
“이런 짓 대체 누가 하나 했더니.”
“축하드려요. 많이 놀라셨어요?”
되묻는 혜연의 얼굴에 뿌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래. 놀랍다.”
강권주는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며 혜연을 따라 웃었다.
“이거 하려고 식당 예약하고 케이크 주문하고. 바쁘셨겠어.”
“네. 엄청 바빴어요, 이거 준비하느라. 오늘 대표님 생일, 맞죠?”
혜연이 확신하며 물었다.
“아니.”
“네?”
“오늘 내 생일 아닌데.”
잔뜩 뿌듯해 있던 혜연의 표정이 단번에 찬물을 끼얹은 듯 굳었다. 동그랗게 치켜뜬 눈동자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오늘 생일 아니에요? 그럼, 생일이 언제예요?”
“여름.”
“지, 진짜요?”
강권주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근데 왜, 제가 본 서류에는….”
“뭘 봤는데.”
“전에 이 실장님이 집에 가져왔던 서류요. 거기에 대표님 인적 사항 적힌 내역에 분명히 생년월일 12월 31일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서류에야 그렇겠지, 출생 신고를 그때 했으니까. 보육원 출신 애들 생일은 보통 둘 중 하나야. 6월 30일 아니면 12월 31일. 애들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신고하기 힘드니까 육 개월에 한 번씩 몰아서 하거든.”
“…아, 그렇구나…. 오늘이 아니시구나….”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혜연이 긴 탄식을 흘렸다. 강권주는 픽 웃으며 난감해 얼 탄 혜연의 이마를 톡, 장난스레 건드렸다.
“많이 놀랐어?”
고작 몇 분 만에 자신이 들은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주자, 당황해 있던 혜연의 표정이 곧 울상으로 바뀌었다.
“정확히 여쭤 보고 준비할 걸 그랬어요. 전 당연히 오늘인 줄 알고…. 하,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오늘부터 12월 31일이 내 생일인 걸로 하면 되지.”
“어떻게 그래요. 진짜 생일도 아닌데.”
“어차피 언젠지 정확한 날짜도 몰라, 대충 한여름인 것만 알지. 그러니까 그냥 오늘인 걸로 해도 돼.”
할 말을 잃은 혜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때마침 다시 다가온 서버가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괜찮으시면 두 분, 폴라로이드 찍어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네. 찍어 주세요.”
언제 울먹였냐는 듯 혜연은 서버의 물음에 곧바로 답했다. 강권주는 이건 또 뭐냐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혜연이 남자의 셔츠 소매를 붙잡으며 작게 말했다.
“우리 사진 찍어요. 우리 같이 찍은 사진 하나도 없잖아요.”
굳이 그런 게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을 하려는데, 이미 사진기를 들이댄 서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여기 보시구요!”
옆에서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혜연을 응시하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했다.
“하나, 둘, 셋!”
찰카닥, 소리와 함께 하얀색 폴라로이드 인화지가 밀려 나왔다.
“감사합니다.”
혜연은 직원이 내민 인화지를 두 손으로 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진 속 실루엣을 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보세요. 엄청 잘 나왔어요, 우리.”
혜연이 하얀 인화지를 남자의 눈앞에 팔랑이며 말했다.
“그렇게 좋아?”
“네. 생일 기념은…. 아니게 됐지만, 그래도 뭐라도 핑계 삼아서 찍고 싶었어요.”
“그렇게 찍고 싶었음 같이 한 장 찍어 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냥, 말하기 좀 그랬어요. 대표님 이런 거 싫어하시는 거 같아서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내 눈치 보지 말고 말해. 어린 애인 소원도 하나 못 들어주는 나쁜 새끼 만들지 말고.”
다정함이 느껴지는 남자의 명령에 혜연은 기꺼이 그러겠노라,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받아 낸 그가 잔에 남은 와인을 느긋이 마시며 물었다.
“이제 다 한 거야, 내 생일 이벤트?”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더 할 말이 남은 듯 입술을 달싹이는 혜연의 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음 같아선 정신없고 소란한 이곳을 얼른 벗어나 둘만의 공간으로 가고 싶었으나 어쩐지 혜연의 용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해 보이는 까닭이었다.
“왜. 뭐 더 할 말 있어?”
“…….”
“말해 봐. 뭔데?”
재촉하고 싶진 않았지만, 무언가 망설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니 궁금증이 훅 치솟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혜연의 동작 하나, 숨소리 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생각해 봤는데요….”
붉은 입술이 동그랗게 움직이고, 그 사이에서 단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권주의 시야가 온통 그녀로 가득 찼다.
“대표님이랑 저, 완전히 다른 거 같으면서도 서로 꽤 잘 맞는 부분이 많은 거 같아요. 사실 가족끼리도 한집에 살기 어려운데, 몇 달 동안 지내면서 큰 문제 없이 잘 지낸 것만 봐도 우리가 꽤 잘 맞는단 거니까요.”
“…….”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대표님이랑 이렇게 같이 지내는 거, 너무 좋고 행복해요. 요즘처럼 아무 걱정 없이 태평하게 살았던 때가 있었나 싶고…. 모르겠어요. 좋아요, 그냥 다. 뭐든.”
“…….”
“그러니까 제 말은,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 계속 이렇게 같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
“결혼하잔 소리야?”
듣다 못한 남자가 여상한 어투로 혜연의 말을 잘랐다. 정곡을 찔린 혜연은 쓰읍, 숨을 들이켰다.
결혼. 몇 번이고 입으로 내뱉고 싶은 단어였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던 단어였다. 강권주와 결혼, 그 조합이 어디 가당키나 하는 건가 싶어서.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의 입에서 결혼이란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강권주가 돌려 말하는 걸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행여 그가 불쾌하진 않을까, 혜연은 남자의 표정을 살피며 숨을 죽였다.
“결혼하잔 말을 뭐 이렇게 어렵게 해?”
“…그게, 꼭 그런 뜻은 아니고요.”
“그런 뜻 아니면. 지금처럼 계속 같이 떡 치고 살면서 결혼은 안 하겠다고? 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거 아니면 하자, 결혼. 안 그래도 언제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됐네. 말 나온 김에 얼른 해치워. 넌 언제가 좋아? 난 날 더워지기 전에 했으면 좋겠는데. 2월? 3월?”
혜연은 되레 자신이 더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어 기다란 속눈썹을 연신 깜빡이고 있었다. 그 말간 얼굴을 보자니, 어쩐지 짓궂게 굴고 싶어진 남자가 느긋이 등을 기대며 답을 보챘다.
“대답 안 해?”
“…….”
“결혼하자고, 남혜연.”
일순간 시끄러운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남자의 음성만이 또렷이 들려왔다.
꼭 마법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죽을 때까지 내 옆에 묶여서, 어디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꼭 붙어 있으라고. 싫어?”
혜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가빠진 호흡에 물기가 섞이고 있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되레 그에게 듣자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오른 까닭이었다.
“아뇨. 좋아요.”
“…….”
“죽을 때까지 옆에서, 어디 도망갈 생각 안 하고 얌전히 있을게요. 우리 결혼해요.”
대답을 듣는 남자의 눈에 짙은 만족감이 어렸다.
감정 없고, 잔인하기 짝이 없던 남자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여자가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랑에 빠진 남자만 있었을 뿐.
“집에 가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강권주는 고개를 끄덕이는 혜연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혜연은 기꺼이 그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죽을 때까지 서로의 옆에 머물겠단 맹세는 이미 끝이 났다. 아니. 애초에 그런 맹세 따윈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본 순간부터, 유난히 깊었던 수렁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 쥔 순간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릴 운명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 운명을, 서로를 알아보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 멀리 돌아왔지만 그 긴 시간을 견뎌 온 만큼 이 길의 끝에서 달큼한 넥타르를 발견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새카만 도심의 하늘 아래. 두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보폭을 맞추어 나란히 걸었다. 은은한 빛깔의 불빛들이 꼭 버진 로드 위에 뿌려진 꽃잎처럼 반짝이는, 그런 12월의 마지막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