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155
154. 석영 왕좌 8
“히익!”
“아악!”
가신과 시녀들이 비명을 지른다.
안세투스 4세는 그들의 비명을 등에 짊어지고 홀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마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어떻게든 왕화의 빛을 다시 일깨워 저 외적들에 대항하려 애썼지만, 왕좌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 부덕의 소치인가.’
안세투스 4세는 고된 왕위 경쟁에서 승리한 후, 완전히 풀어져 버렸다.
야에가스 신족의 후손들은 그 특성상 일단 왕좌의 주인이 정해지면 아무리 망나니라 하더라도 어지간하면 계속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형제들이 질투와 시기심에 몸을 비틀고 절치부심한다 해도 일단 결정이 나면 그들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그래서 안세투스 4세는 승리를 즐겼다. 왕의 위치, 왕의 권력, 왕자일 때는 도외시해야 했던 온갖 향락을 즐겼다.
그 결과가 이것인가.
“폐하! 외성이 버티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더의 마물들에 융화된 나가들의 공세가 거칠어서….”
“성기사들이 힘을 잃고 백색 마법이 약해져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병사들이 연이어 안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예비대를 투입하고 교대하도록, 내성 중 홀수 문은 포기하라.”
코랄 사하르의 다중 성벽은 성문 중 일부를 포기해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병사들이 너무 지쳐 있다는 것이었다.
“예비대와 교환한 지 네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 멸망할 때까지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겠군!”
“폐하.”
“과인이 부덕하여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이지. 설마 야에가스 신족의 오랜 역사의 종지부가 이 몸으로부터 시작될 줄이야. 지금 우리를 지켜주는 건 조상의 지혜로 만든 코랄 사하르의 다중 성벽뿐이란 말인가? 하하하.”
안세투스 4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목성의 시대에 대한 예언이 실현되며 제일 먼저 무너지는 곳이 설마 그의 왕좌, 코랄 사하르부터라니.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하녀 한 명이 일어나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외람되오나. 폐하.”
그녀는 하녀의 복장을 간단히 찢어 버리고 안세투스 4세의 앞에 섰다.
검은 머리칼, 진한 보랏빛 눈동자가 너무나 매혹적인 미녀였다. 하녀들 사이에서도 머리 하나는 큰 키를 가지고 있었는데 방금까지는 하녀들 사이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키와 몸매만 해도 이미 이목을 단단히 끌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면 마법이 작용했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제가 감히 왕좌에 앉아봐도 되겠습니까?”
“음….”
왕의 근위대가 앞으로 나섰지만 그녀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걸어 나왔다.
“그대가 아라엘인가? 감히 살아 있는 여신을 참칭한다는?”
안세투스 4세도 바보가 아니다. 자신의 눈앞에 나선 이 여자의 정체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반역자!”
“폐하! 명령을 내리시면 처리하겠습니다.”
근위대는 방금 전까지 하녀로 숨어들었던 여자가 아라엘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분개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경계가 허술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안세투스 4세라면 그러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의 안세투스 4세는 그런 이유로 근위대를 핍박할 생각이 없었다.
국왕으로서의 자리가 튼튼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부하들도 재촉하고 성질나는 대로 다 떠들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도 남들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지금, 자신의 앞에 나선 이 아라엘이라는 여자를 차근히 뜯어보며 차라리 그녀에게 당장 왕좌를 넘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넘긴다는 건 야에가스 신족의 말예라 자처하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짓이다. 이대로 그녀에게 왕좌를 넘기면 머저리 왕으로서 역사서에 길이 남지 않겠는가?
“참칭한 기억은 없지만…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가져야 안심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안심 아니겠습니까? 폐하께도 그게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그 믿음과 안심을 지금 사람들에게 베풀어봄이 어떤가? 당장 이 폭풍우를 거두고 저 나가들을 처치해보게. 그러면 자연히 사람들이 그대를 흠모하게 될 거고 나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이 왕좌를 그대와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아니면 내 아내가 되어 왕관을 공유하지 않겠나?”
안세투스 4세가 그렇게 물어보자 아라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손을 벌려 등 뒤의 누군가들을 제지하는 걸 보니 역시 혼자서 여기까지 잠입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결혼해서 왕관을 나누어 쓰자는 소리에 발끈하는 부하들이 있나 보군. 하지만 나도 쓸모없어졌군. 야에가스 신족의 말예인 내가 결혼하자는 소리에 당사자도 아닌 부하들이 분개하다니.’
얼마나 그를 얕잡아보면 그렇게 분노할 수 있을까?
그때 아라엘이 입을 열었다.
“영광된 제안이로군요. 하지만 지금 소첩에게 왕좌를 잠깐 내어주시면 별다른 피해 없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물론 왕좌는 다시 정당한 소유주에게 돌아갈 것이고요.”
“하하. 관대한 제안이로군, 그래. 하지만 나도 야에가스 신족의 말예로서 왕좌를 그렇게 허망하게 내어주진 않을 걸세.”
그러자 시녀 중 아라엘의 부하로 보이는 여성이 나서서 야유를 퍼부었다.
“그게 아니라 두려운 거겠지!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왕좌에 앉았을 때 왕화의 빛이 발하는 게!”
“이, 무엄한!”
근위대장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왕의 허락 없이 어전 앞에서 발검하는 것은 중형으로 다스려질 일이다.
그러나 방금 그 불경한 발언은 기실 너무나 아픈 곳을 찌른 발언이기에 방관할 수 없었다.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그리 생각한 근위대장이지만….
근위대장이 칼을 뽑기도 전에 아라엘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분명히 2장 정도 떨어진 거리였지만…. 검은 그림자가 근위대장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근위대장은 갑자기 눈앞이 까맣게 물드는 걸 보았다.
갑옷을 입은 자신의 몸이 갑자기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아니, 그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히익?!”
“으….”
조금 전까지 아라엘을 성토하던 근위대가 그 모습에 겁에 질렸다.
근위대장은 근위대에서 가장 강력한 무사이며 왕성에서도 알아주는 기사였다.
그런 자가 단 한 방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너무나 쉽게 살해당하는 걸 본 이들은 아라엘의 위명에 대해서 다시금 떠올렸다.
‘말도 안 돼.’
‘왕의 어전에서 이 무슨 참극을!?’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들었다.
‘정말 이 여자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거 아냐?’
왕성 밖에는 멸망의 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나가의 군세. 절망적인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현 국왕 안세투스 4세는 확실히 자신이 야에가스의 왕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입증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국왕에게 충성하고 왕의 교회의 신실한 신자라 하더라도, 국왕을 비난할 근거 또한 왕의 교회의 가르침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이다.
“어전에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굽어살피소서. 폐하.”
아라엘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매력적인 미소였다.
“황제 야에슬라트의 후손으로서 저도 왕좌를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부디 재고해주시길. 굳이 무고한 백성들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 옥좌의 문이 열리고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략입니다!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알현실에 들어선 이는 아자딘이었다.
“음?!”
가신들의 시선이 아자딘에게 집중되었다.
“말해보라. 무엇이 모략인가?”
“나가들과 내통한 이들이 지하로 침입해 그곳에서 사악한 의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왕좌에서 백색 마력을 뽑아내는 짓을 자행해 왕좌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자 가신들 사이에서 의혹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전령일족 여자가 황제의 후손이라고 왕좌를 요구하다니. 뭔가 수작이 있었음에 틀림없어.’
‘하지만 저걸 말하고 있는 놈도 전령일족인데?’
‘그리고 증거가 없잖아? 의식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지?’
전령일족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지금 당장 어떤 구원이 있어서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안세투스 4세는 망설이면서 아자딘에게 질문을 던졌다.
“증거는?”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아라엘이 코웃음 쳤다.
“그 의식을 해소했다면 지금 왕화의 빛으로 이 사태를 해결해보시면 될 것 아닙니까?”
아라엘은 이제 거짓된 경의를 표하는 것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대놓고 국왕에게 지금 당장 사태를 해결해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 어서 이 사태를 해결해주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안세투스 4세에게 쏠린 그때였다.
-퍼억!
안세투스 4세의 가슴에 새카만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이 꽂혔다. 흑강전이 안세투스 4세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다.
“아!?”
“암살!”
“윽….”
아자딘은 눈앞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일에 눈살을 찌푸렸다.
‘안세투스 4세를 죽이다니!? 제정신인가?’
왕좌의 주인이 무능함을 확인하고 왕위를 양도받는 것, 그것이 아라엘이 그린 큰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을 죽이다니? 왕좌의 주인을 없앤 다음 그 위에 앉으면 제대로 왕화의 빛을 발현했다고 해서 진짜 정당한 왕으로 평가받긴 힘들다.
안세투스 4세 이전엔 야에가스 신족이 왕좌에 앉은 뒤로 왕화의 빛이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에가스 신족이라면 사실 누구나 앉아도 왕화의 빛이 발한다는 인식이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왕을 숙청하고 그 자리에 앉는 건 현명하지 못한 짓이었다.
궁금해진 아자딘은 아라엘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라엘조차 당황하고 있었다.
‘아라엘의 소행이 아니야?’
“전령일족을 죽여라!”
“영혼 없는 살인자 놈들!”
흥분한 근위대가 무기를 빼 들고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런!”
아라엘은 상황이 여의치 않게 흘러가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때….
“모두 제자리에.”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 은발을 묶어 올린 한 여성이 어느새 옥좌에 접근해 있었다.
“…….”
“말도 안 돼.”
아자딘은 그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라엘도 예상치 못한 인물에 당황했다.
“알디스!?”
아자딘과 아라엘에게는 대모나 다름없는 여성, 알디스 제다하가 옥좌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황제 야에슬라트의 적손, 알디스 제다하의 어전이다. 모두 무례를 삼가도록 해라.”
아자딘도 익히 알고 있는 장신의 엘프가 알디스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가 활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안세투스 4세를 시해한 화살은 바로 그가 발사한 것이었으리라.
“스승님?!”
카자스 해서를 만들어 아자딘에게 힘을 준 장본인, 장로 카자스가 옥좌에 쓰러져 있는 안세투스 4세의 시신을 집어 들어 던졌다.
방금 전까지, 코랄 사하르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였던 이가 도축당한 고기처럼 홀 바닥을 굴렀다.
“…….”
“아.”
너무나 충격적인 모습에 아라엘조차 굳어 있었다. 아라엘 지파의 전령들도 당황하고 있을 때 알디스가 옥좌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