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186
185. 슈가러시 1
샤티 입장에서는 물뱀 나가인 데하슈람의 계략보다는 차라리 아자딘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게 좋았다.
그런데 정작 아자딘은… 방금 전까지 브투마를 구하기 위해서 뭔가 이것저것 손을 쓰는 것 같았는데 전령일족의 의무가 닥쳐오자 잽싸게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린다.
“만약 브투마에 갔는데 이미 습격당하고 있으면 어쩌려고? 전령일족에게 청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중요한 거겠지. 하지만 브투마에 먼저 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샤티가 청원을 포기하고 브투마로 직행할 것을 권했지만 아자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아주어 스틸 장검 ‘파랑이’의 자루를 해체해서 부서진 못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슴베에 맞물려 칼자루와의 충격을 흡수하는 나무 부품들이 부러져 있었다.
아자딘은 검을 수선하면서 투덜거렸다.
“흠, 그건 지나친 영웅주의 같군. 내가 브투마를 구하러 가는 것같이 들리잖아.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청원 하나 해결하는 틈에 브투마가 망해 버릴 정도라면 더 일찍 가봤자 소용없어.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분간해야지.”
샤티는 그런 아자딘의 언행에서 기이함을 느꼈다.
“홀로 브투마에 가서 앞으로 벌어질 학살을 막겠다더니만 정작 스스로의 행동에 불신을 품는다고?”
“불신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해야지. 그럼 벨 호다로 가볼까? 그동안 피곤했을 텐데 내가 노를 젓지.”
“괜찮습니까? 제가 어울리지 않게 노를 젓느라 고생하긴 했습니다만 도사께서는….”
지스와는 아자딘이 엄청난 수의 병력들을 때려눕히는 걸 보았다.
사령술사인 스콧의 언데드들 벽을 이용해서 적들에게 포위당하지 않고 일대일의 싸움을 여러 번 하긴 했지만 그래도 체력 소모가 극심했을 터이다. 한나절 잔다고 회복될 피로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아자딘은 노를 잡았다.
“괜찮아. 내가 노를 젓게 해줘. 이 별빛이 가득한 밤바다를 저어나가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 같거든.”
카자스 해서의 충격 때문에 아자딘은 노를 젓는 것으로 힘을 발산하고 싶었다.
계속된 전투와 고된 여행으로 근육통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몸을 가만히 놀리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어떻게든 움직이는 게 아자딘에게 차라리 덜 고통스러웠다.
*********
벨 호다는 설탕 산업으로 유명하다.
사탕수수는 본래 브투마의 특산물이었는데 그중에서 벨 호다 삼각주가 사탕수수를 키우기 아주 좋은 곳이었다.
벨 호다 삼각주는 정글도 없고 드넓은 갈대밭이 있던 곳이었는데, 이곳을 사탕수수 농장으로 바꾸니 그 생산량이 어마어마하여 세계 전역으로 설탕을 수출할 정도였다.
브투마의 황금과 상아, 설탕은 갖가지 풍토병과 나가 제국의 위협, 마물이 들끓는 정글의 위협 속에도 브투마 왕국을 지탱하는 부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이런 설탕 산업은 막대한 인력이 필요했으니, 벨 호다는 사탕수수 말고 또 다른 것으로도 유명했다.
바로 인신매매였다.
벨 호다의 인간 사냥꾼들.
팔왕국 어디에서나 노예제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벨 호다의 농장주들은 용병들을 고용해 직접 촌락을 습격하여 사람들을 납치했다.
브투마가 아닌 다른 먼 곳의 촌락들, 어촌들을 기습해서 습격하고 사람들을 잡아 와 자신들만 아는 농장 안쪽의 노동자 숙소에 처박아 놓고 죽어라 일만 시켰다. 그래서 설령 운 좋게 가족이 찾아오더라도 잡혀간 이를 찾을 방도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벨 호다의 인신매매 풍습을 비판하고 개선하려 노력했지만, 설탕 사업에서 벌리는 막대한 자금은 브투마 귀족들에게 뇌물로 뿌려지고 있었고, 왕의 교회나 구난기사단 등 주요 종교 단체에도 막대한 기부금이 들어갔기에 농장주들의 인간사냥이 유의미한 저항에 직면하는 경우는 없었다.
브투마 왕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벨 호다의 설탕 산업.
이곳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조합을 설립해 귀족들에게 로비를 하고 성직자들을 돈으로 길들이는 한편 자신들 또한 많은 용병을 고용해 사설 부대로 무장했다.
그러한 농장 중 군소 설탕 농장 바네마 일가에 새로운 가주로 란다 바네마가 올라왔다.
그 란다 바네마가 바로 금화의 청원자였다.
*********
구난기사단에서 유학을 다녀온 란다 바네마는 유학파답게 설탕 농장 조합에서 정해준 정략 결혼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선 인신매매로 잡혀온 노동자들을 자유민으로 만들어주고 자유민 노동자들에게 사탕수수를 한 포대씩 수확할 때마다 그에 따른 보수를 지급하기로 했다.
많이 수확하면 많이 할수록 노동자들의 급료가 오르는 획기적인 제도였다.
다른 설탕 농장주들은 그런 란다 바네마의 행위를 비웃었다. 저런 식으로 노동자들에게 노동 의욕을 고취시켜 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주면 제조원가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다른 경쟁자들이 즐비한 이 벨 호다에서 원가를 깎아 먹으며 노동자들의 노동 의욕을 고취해 설탕을 더 많이 생산해봤자 상인들이 안 사가면 그만이다.
상인들은 동전 한 닢이라도 더 싼 설탕을 원하지 설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란다 바네마의 농장이 좋은 대우를 해준다는 소문이 나자 다른 농장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탈주해서 란다 바네마에게 가거나 자신들도 바네마 일가처럼 보수를 올려 달라고 태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다들 똑같으니까 채찍질을 가하고 밥을 굶기고 위협을 하면 말을 들어 먹었지만, 이제 바네마 일가라는 대체제가 존재하는 이상 노동자들의 반발이 예사롭지 않아졌다.
다른 농장이 생산에 차질을 빚기 시작하면서 이제 바네마 일가의 일탈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
“하하하하!”
벨 호다 설탕 조합의 클럽하우스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설탕 사업이 벌어다 준 막대한 부를 즐기기 위해 고급 담배와 마약, 술과 향락에 취해 있었다.
이 클럽하우스는 그런 농장주들이 서로서로 어떻게 더 인생을 즐겁게 할 것인지 그들의 퇴폐적인 향락을 경쟁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일종의 경연장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최근 공동의 적이 나타났다.
향락을 거부하는 유학파 출신 농장주 란다 바네마가 설탕 조합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농장을 경영하다 현재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 몰골 보셨습니까? 크크크. 솥에 구멍이 났다니까 얼른 땜장이를 찾으려고 하는데, 크크크.”
“목숨이 여러 개인 놈 아니고서야 그 농장의 솥을 고쳐주려고 할 리가 없지요.”
“그래도 란다 바네마가 구난기사단 측에 땜장이 확보를 요청했답니다.”
“구난기사단이 우리에게 정보를 넘겨주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
“크크 우리가 구난기사단에 매년 주는 헌금이 얼마인데. 자기가 구난기사단에서 유학했었다고 구난기사단이 자기편이라 생각하다니. 멍청한 것.”
설탕 조합의 농장주들은 천박한 웃음을 터트리며 경쟁자의 몰락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클럽하우스의 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크, 큰일입니다. 란다 바네마가….”
“또 뭔 큰일인가?”
“이봐, 자네가 여기 오면 첩자인 게 들키잖나?”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란다 바네마가 글쎄… 전령일족을 불렀습니다.”
“뭐?!”
“전령일족이라니? 그거 말인가?”
“네. 황제의 금화로 부르는 그거 말입니다. 영혼 없는 불경자! 신왕살해자 말입니다!”
“음….”
조합의 농장주들은 신음했다.
“옛날 같으면 오히려 좋은 기회인데 말이죠.”
“왕의 교회에 연락해서 이단으로 처리했을 텐데.”
“에이, 죽이지 맙시다. 그래도 내 딸만 한 나이인데.”
“그리고 살코 님 막내 부인과 동년배 아닙니까.”
그때 조합장이 혀를 찼다.
“하지만 요즘은 그럴 수 없습니다. 코라사르가 전령일족에게 먹혔다는 소문 들었지요? 코라사르는 이미 지척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괜히 전령일족과 척을 지면 나중에 왕이 갈리게 되었을 때….”
“그렇지요.”
농장주들은 전령일족이 코라사르 왕국을 차지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전령일족들을 상대로 괜히 미움 살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벨 호다의 설탕 사업은 어디까지나 권력자들에게 빌붙어 그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대주기 때문에 존립하고 있는 것이니까.
“일단 그 전령일족 놈이 오면 이야기를 해보지. 설마 전령일족들, 다들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던데 일의 경중을 못 가릴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겠지.”
브투마 속담에 돈이면 나가도 부린다고 하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이 썩어나도록 넘쳐나는 설탕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배를 타고 벨 호다 삼각주 안으로 들어오니 끝도 없이 넓은 농장들이 펼쳐져 있었다.
“와. 이게 다 사탕수수인가?”
아자딘은 노를 젓다가 물에 떠내려오는 사탕수수를 발견하고 노로 사탕수수를 건져 올렸다.
조금 잘라서 줄기에 코를 대보니 달짝지근한 냄새가 난다.
“어디.”
아자딘이 조심스럽게 사탕수수의 속을 깨물자 달달한 수액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와. 달아. 이거 먹어봐.”
아자딘이 일행들에게 사탕수수를 잘라 나누어주자 모두 그걸 받아들고 맛을 보았다.
“오.”
사탕수수의 맛을 본 이들이 다들 그 단맛에 감탄했다.
물에 떠내려온 이런 사탕수수는 제대로 된 품질의 것이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달았다.
“하지만 섬유는 질기군. 단물만 빨다가 뱉어내야겠어.”
아자딘이 그렇게 말할 때 스콧이 자신의 사탕수수를 펼쳐 보였다.
“대장. 내 거는 말야.”
스콧에게 간 사탕수숫대 안쪽에는 벌레 먹은 구멍에다 기묘한 벌레가 꼬여 있었다.
“미안. 역시 물에 떠내려온 건 좀 그렇군.”
“…….”
“스콧도 사탕수수가 먹고 싶었어? 이걸 먹어.”
아자딘은 자신이 먹던 걸 스콧에게 건네주고 자신은 황제의 목소리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이 근처에 청원자가 있단 말이지?”
[그렇다. 아자딘.]“음. 아….”
아자딘은 설탕 수송선들이 접안하는 부두를 발견했다.
부두의 접안시설 크레인 위에는 ‘헛바람 들어 탈주하려 한 자’라고 피로 쓰인 식탁보를 몸에 두른 남자 시체가 걸려 있었다.
“여긴가 보군.”
아자딘은 시체를 보며 혀를 차더니 부두에 배를 댔다.
부두에는 검은 머리칼에 장신의 여성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마 저 여자가 청원자인 것 같은데.”
[그렇다. 그녀가 바로 청원자, 란다 바네마다.]“란다 바네마?”
[바네마 일가의 가주이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녀에게 들어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