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192
191. 슈가러시 7
“하지만 설마 전령일족도 노예제를 운영하는지는 몰랐군.”
“노예제도는 아냐. 사실 노예제도라기보다는 요인 납치에 가깝지만 저들에게는 노예제라고 말하는 게 인과응보라고 해야 하나 수미상관이라고 해야 하나. 남의 자유를 우습게 보던 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똑같은 방식으로 제한당해야 이야기에 미학이 있지 않겠어?”
“미학이라.”
“그리고 그들을 확보해둬야… 새로운 농장주들에게 교훈이 되겠지.”
기존 농장주들이 납치당하면서 법정상속인들이 새로운 농장주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령일족의 엄청난 전투능력을 두려워하고, 그 이상으로 자신들의 아버지, 전 농장주들이 돌아오는 것을 꺼려 했다.
그래서 협상은 순조로웠다. 어차피 아자딘 한 명을 막지 못하고 농장주가 납치된 지금, ‘사병을 육성하고 그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예제를 운영한다.’라며 노예제를 긍정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농장주들은 란다 바네마를 조합장으로 앉히고 벨 호다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데 적극 협조해주었다.
“그럼 청원은 완료된 것으로 하겠다. 그리고 란다 바네마. 벨 호다 설탕 사업 조합장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는데.”
“부탁? 무슨 부탁이지?”
“그건 바로 농장 사람들 모두 청건당에 입교하는….”
듣고 있던 지스와가 잽싸게 포교를 시작했다.
“빠져, 좀. 낄 데 안 낄 데 구별해라. 응?”
아자딘은 지스와를 밀어내고 물어보았다.
“농장주가 교체되긴 했지만 그들한테 여전히 사병이 있지?”
“물론 있지. 하지만 다들 그저 시판되는 무기를 일반 농부들 손에 들려놓았을 뿐이야. 제대로 된 군인은 아니지. 도망치는 노동자를 붙잡거나 린치하는 데는 재주가 있지만 진짜 무사라고는 할 수 없어. 그 모험가들도 진짜 무사였는데 말이지.”
란다 바네마는 다른 농장주들이 고용한 모험가들이 일반 사병들보다 얼마나 강력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아자딘이 그들을 무슨 어린아이처럼 간단히 제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병들은 이제 쓸모가 없으니 해산시킬 거야. 아, 물론 약간의 자경단은 남겨둬야지. 도적 떼와 마물들이 나와서 기승을 부리는 건 사실이니까.”
“해산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반대?”
“그래. 곧 브투마에 대규모 나가 군대가 침공해 온다. 벨 호다의 사병 조직들을 무장하고 훈련시킬 필요가 있어.”
“뭐? 진심이야?”
“훈련을 위해서 조언자로 전령일족 한 명을 당신에게 붙이겠어.”
“아니, 얼마나 훈련시키려고?”
“행군과 짐 운반 정도는 하루 이틀이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식량도 준비해줘.”
“정말 전쟁을 준비하려고? 나가 제국? 진짜야, 그거?”
“진짜다. 그래서 어쩔 거야? 물론 거절해도 난 당신에게 협력을 강요할 입장은 아니야.”
“농장주들을 잡고 있잖아? 그들을 도로 풀어주겠다고 협박하면 충분히 강요할 수 있지 않아?”
“협박으로는 친구를 사귈 수 없는 법이지.”
“뭐래. 지금까지 충분히 협박해놓고선. 후…. 뭐 좋아. 브투마가 멀쩡해야 벨 호다가 먹고 사는걸. 정말 나가 제국이 침공해 온다면 벨 호다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해서 브투마를 지키고 구조하는 데 협력하겠어.”
란다 바네마는 아자딘의 요청에 응하며 악수를 청했다.
“고맙군. 란다 바네마.”
“아니 뭘. 아자딘. 내가 더 고맙지. 당신이 해낸 일, 짧은 시간에 빠르게 끝내서 쉬운 일처럼 보였지만 당신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었겠지.”
빠른 시일 내에 일을 처리해서 언뜻 쉬워 보이지만 그가 오기 전까지 란다 바네마는 벼랑까지 몰려 있어서 자살까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음이 바뀌는 게 사람이라지만, 자신이 청원할 때 얼마나 절박한 심경이었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꽤 괜찮은 협력자를 얻었군. 청원을 처리해서 다행이야.’
그때 란다 바네마의 부하가 걸어들어왔다.
“저 전령일족한테 군사고문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아자딘은 황제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곳 벨 호다의 사병들을 지휘하고 훈련할 수 있는 인물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 군사고문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빠르군. 아니 예상한 것보다 너무 빠른데?”
아자딘은 한 번 그 군사고문을 만나보기로 했다.
*********
“놀랍군.”
군사고문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녹색 눈의 미녀가 아자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무슨 짓을 했나 했더니만 아자딘, 네가 벨 호다를 함락했다고?”
“함락이라고 하니 이상하군. 우호를 다졌다고 하지. 그런데 네가 웬일이지, 제니스?”
“웬일이냐니. 원래 이 일대가 내 구역이었어.”
“아. 청원을 거절한 전령이 누군가 했더니 너였다고?”
“그래. 아라엘 님의 곁에서 그분을 돕는 게 내 일이니까. 하지만 설마 벨 호다 설탕 농장 전체를 한 편을 만들다니….”
본래 전령일족들도 벨 호다의 설탕 조합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한 농장을 돕는다 해도 외부세력이 들어오면 다른 농장주들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배제해 버린다.
은혜는 물에 새겨지고 원한은 뼈에 새겨지는 법. 괜히 사탕수수 농장 관련 의뢰를 받았다가 반대쪽 적대 세력을 잔뜩 키워 버리면 골치가 아프다.
하물며 전령일족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처리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자딘은 그걸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 버렸다.
“날 대신해 청원의뢰를 해결한 건 물론 내 부하들까지 데려가서 벨 호다의 농장주들의 신병을 확보하다니. 그런데 그런 일을 해놓고 내게 군사고문 자리를 맡기겠다고?”
“그래. 청원 임무는 거절했다지만 이런 건 거절하지 않겠지? 떨어지는 게 많은니까?”
설탕 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벨 호다의 군사고문이 되는 일이다. 뇌물을 줘서라도 차지하고 싶은 자리를 거저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아라엘 님의 뜻을 위해서도, 벨 호다는 당연히….”
그녀는 그리 말하고 헛기침을 했다.
“정말 제2령다운, 아니 놀라운 위업이군, 아자딘.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전까지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야 아무리 아라엘 님의 동생이라고 해도 무안의 아자딘은 유명했잖아? 게다가 나도 실력에 자신이 좀 있는데 대뜸 2령이라니. 너무 심한 편애가 아닌가…. 뭐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결국 아라가사들도 다들 성정이 격렬하다 보니까.”
“실력에 자신 있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시온 에타르가 당신에게 패했었다고….”
아자딘은 코랄 사하르에서 시온 에타르가 그런 핑계를 댔던 걸 기억했다.
“그럴 리가. 시온 에타르가 내게 패했다는 건 헛소문이야. 그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대기 위해서 댄 핑계지. 원래 그가 우리 윗세대의 ‘달’이었다고.”
화조풍월의 4인. 그중 달의 칭호를 가진 이가 가장 강력하고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렇다는 건 인딤이 지금 화조풍월에서 가장 나은 인물이라는 건데 전혀 안 그래 보이던데?’
아자딘은 사사건건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인딤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제니스는 시온 에타르에 대해서 경고해주었다.
“그가 나에게 패했다고 헛소문을 낸 것은 우리와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우리에게 물건과 사람을 넘겨주느라 그런 핑계를 댄 거지.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나. 조심해. 그 녀석은 이제 원로원으로 돌아섰으니까.”
“그런가. 흠, 알겠어. 당신이 시온 에타르를 감당할 수 없다면 당신은 나보다 아래니까 내가 2령이라는 사실에 별로 거부감 느낄 필요는 없어.”
“하하. 훌륭한 자신감이네.”
제니스는 아자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주는 게 많으니까 참는다. 그래, 제2령 아자딘. 이제 브투마로 갈 건가?”
“그래.”
“아라엘 님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브투마 침공을 막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원로원의 행사를 반대한 죄를 짓게 될 거야. 그래도 하겠다고?”
“물론이다. 너야말로 벨 호다에서 원군이 오는 걸 방해하지 마라.”
“그럴 리가 있나. 원로원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는 건데 뭐. 게다가 이들로 전쟁을 하려는 건 아니잖아?”
“그래. 사병들이 농장에서 곤봉으로 농노들 때려잡기엔 쓸 만하겠지만 나가들 상대로는 죽을 거야. 벨 호다에서 브투마로 물자를 나르고 공병으로 활약해주면 돼.”
“알겠어. 그 정도야 별로 어렵지 않지.”
제니스는 아자딘이 넘긴 군사고문 자리를 맡겠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부두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크, 큰일입니다. 큰일이야!”
부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부두에, 그리고 사탕수수 농장 곳곳에 설치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브투마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나가들이 브투마에 쳐들어왔어요! 브투마 북방에 오우거들이 침공하고 남쪽엔 나가들이….”
아자딘이 벨 호다에 와 있는 동안 마침내 브투마에 나가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의 소란을 들으며 아자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청원을 들어주느라 벨 호다에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맞추면 좋았을 것을….
“졸지에 바빠지게 되었군. 언제 출발할 수 있지?”
“나는 이제 막 왔는데?”
“이 지역 담당 전령이니까 사정에 빠삭할 거 아냐?”
“벨 호다 사병들이라고 해봤자 농노들이고 일단 비축 물자도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니까 확신할 수 없어.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도록 하지. 그래도 일주일은 걸릴 거야.”
“알겠어. 그럼 나는 내 동료들과 함께 먼저 브투마로 향하겠다.”
*********
놀랍게도 마을 길목에는 이미 작별인사를 했던 란다 바네마가 말을 준비한 채 아자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코 영감이 가지고 있던 아랑기산 말이야. 여기에 벨 호다의 특산인 카샤샤와 각종 과자를 실어놨지. 잘 썩지 않는 것들이니 여행자에게도 괜찮겠지.”
“카샤샤? 술이군.”
“사탕수수로 담근 술이야. 설탕을 뽑고 남은 당밀로 담은 럼주와 달리 당분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고급진 술이지. 전쟁터에 술이 얼마나 귀한 가치를 가진 물자인지 알고 있겠지?”
“그야.”
“그리고 이건… 아주어 스틸로 된 도끼창의 머리야. ‘청의 처형인’이지. 모르톤이라는 위대한 드워프 대장장이가 만들었다고 해.”
“청의 처형인? 엄청난 보물 아닌가? 이런 걸 줘도 돼? 이미 황제의 금화로 대가는 치룬 데다가 브투마를 도와주기로 했잖아?”
청의 처형인을 받아든 아자딘은 놀라워했다. 지금 아자딘이 사용하고 있는 아주어 스틸 장검, 파랑이도 대단한 물건이지만 청의 처형인은 그 이상의 압도적인 물건이었다.
도끼와 쐐기를 겸하고 있는 십자 형태의 이 무기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은은하게 스스로 빛을 발했다. 다만 도끼창인데 자루가 없이 머리만 남아 있는 것이 아쉽다.
“이런 명품이 괜히 우리네 창고에서 썩어가는 것보다는 당신 손에 있는 게 낫겠지. 게다가 당신은 브투마를 구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안 그래? 당신을 돕는 게 브투마를 돕는 일이라니, 후… 사실 내가 전령일족의 금화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전령일족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인지 몰랐어. 소문은 정말 잘못되었군.”
“너무 그렇게 마음 놓는 것도 안 좋은데….”
아자딘은 자신의 봉사 때문에 전령일족에게 호의를 갖게 된 란다 바네마를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의 호의를 긍정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그녀의 장래가 걱정된다. 전령일족은 결코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사병들을 모아서 최대한 빨리 편성을 끝마치고 보낼 수 있도록 하겠어. 식량도 구해두도록 하지.”
“고맙군. 그럼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지금 바로 가는 무례를 용서해주도록.”
아자딘은 란다 바네마의 선물, 청의 처형인을 받아들고 그녀가 준비해준 말에 올라타고 브투마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