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202
201. 일족의 배신자 3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꿈을 버려야 했다.
‘우리 집안은 에타르 혈족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니 너는 그녀를 보필하도록 하여라.’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이스마일은 그 말의 숨은 뜻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앞세우지 말고 미디암을 위해서 그녀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양보하라.
자아실현의 기회를 포기하고 오직 집안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하라.
슬프게도 포기하기엔 아까울 만큼의 사료가 항상 입안에 들어왔고, 에타르 혈족이 베푸는 알량한 관용과 은혜는 사실이었기에 소년은 스스로 꿈을 꺾었다.
그래서 소녀를 사모하기로 했다.
안다.
소녀는 아름답고 오만해서 자신을 낮추고 하인이 된 소년에게 눈길은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않으리라는 걸.
꿈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런데 일족 모두가 배척하는 이 남자는 뜬금없이 별이 아름답다느니….
인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 천사들을 섬기는 구난기사단을 동경한다던가. 황제의 전령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이라던가.
미학이나 정의를 말한다.
그는 꺾이지 않은 꿈을 말하고 있었다.
역겹다. 추악하고 증오스럽다.
일족이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지배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때, 이 역겨운 남자는 감히 일족의 앞을 막아섰다.
제정신이냐?
이런 남자와 일족을 저울에 올려두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물어볼 것도 없다.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당연히 일족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소년은 손을 놓았다.
보기 역겹고 짜증 나고 정말 치 떨리게 싫은 남자인데 어째서인지 소년은 일족 대신 이 남자를 택하고 말았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보기 역겨운 것은 거울이기 때문이다.
거울이 맑고 선명할수록 그 표면에 비춰지는 자신은 추악하고 증오스럽다.
그래서 보기 역겹다.
자신은 일찌감치 포기한 꿈을 이야기하는 이 남자와 야욕에 불타올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하는 일족.
소년의 저울은 남자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
이스마일이 손을 놓자 그림스로운의 곤봉이 다시금 춤추며 할둔 일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이 자식! 적과 내통을!”
아자딘에게 잡혀 있던 할둔이 고함을 쳤지만 아자딘은 가볍게 할둔의 목을 졸라 순식간에 기절시켜 버렸다.
“잘 시간이다. 꼬마야.”
놀란 할둔의 하인들이 덤벼들려 했지만 아자딘은 기절한 할둔을 내다 버리고 하인들에게 돌격했다.
마치 흉포한 곰이 양들의 울타리 안에 뛰어든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광풍이 휘몰아치고 하인들이 튕겨 나갔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둔재 아자딘인가!?”
할둔의 하인들은 자신들이 정식 전령에 손색없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명망 있는 전령이면 모르되, 운 좋게 카자스 장로의 제자가 되고 알디스를 후견인으로 둔 아자딘을 무시했다.
그러나 아자딘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괴물이었다.
뒤늦게 도망쳐보려 했지만 이스마일과 미디암이 아자딘에 가세해서 그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배, 배신자 놈들! 어째서….”
“배신은 원로원이 했지. 복무의 저주는 황제의 소행이 아니라 원로원의, 두령 하티르의 소행이다.”
“거짓말!”
“뭐 그런 반응이겠지. 하지만 지금 증거를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까 토론은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고, 순순히 포로가 되어 주실까?”
아자딘은 할둔의 하인들을 차근차근 제압했다.
결국 할둔과 그의 하인들은 전부 다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놀랍군요. 아자딘. 이전에 보았을 때도 굉장했지만 지금은 더욱더 놀라운 실력을 갖추게 되었군요.”
미디암은 할둔 일당을 너무나 쉽게 정리해 버리는 아자딘을 보며 감탄했다. 원래는 그녀도 가세하려고 들었는데 자신과 이스마일이 한 것은 결국 이들의 퇴로를 차단한 것뿐, 대부분은 아자딘이 직접 처리했다.
“그런데 죽이지 않았군요.”
이스마일은 쓰러진 채 신음하는 할둔 일당을 보며 혀를 찼다.
“죽여 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으니까.”
“이들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데요? 너무 오만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일족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일족의 염원에 찬물을 끼얹는 대역죄인이라고요. 당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당신도 눈에 띄자마자 척살할 대상이 될 텐데 굳이….”
“위협이 되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최후의 최후까지, 최대한 살상은 미뤄두고 싶구나.”
그 말인 즉 할둔 일당 정도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아자딘은 브투마 병사들을 불러 쓰러진 할둔 일당들을 체포하게 했다.
“죽이진 마라.”
“예. 금령사자!”
“금령사자?”
이스마일은 병사들이 아자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때 아자딘의 주머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북쪽 게이트에도 전령일족들이 나타났어!”
시랍으로 굳혀 썩지 않게 만든 까마귀 머리가 스콧의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단 움직여야 할 때로군.”
*********
아자딘은 할둔 일당을 제압한 이후에도 빠르게 움직여 다른 전령일족들을 찾아 제압했다.
일족들이 브투마 군을 너무 우습게 보았는지 아니면 아라엘과 그녀의 추종자들이 빠진 빈자리가 너무 컸는지 이번에도 아직 어린 명가의 소년과 그를 보호하기 위한 경험 많은 하인으로 이뤄진 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을 아자딘은 너무나 쉽게 제압했다.
도중에 도망이라도 치면 한두 명쯤은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다들 아자딘을 보고 너무 쉽게 방심해서 도망갈 틈을 내지 못했다.
“나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니긴 한데, 정말 다들 당신을 우습게 보는군요.”
미디암은 아자딘을 우습게 보다가 허망하게 당해 버리는 이들을 보며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도 아자딘을 가볍게 보고 결투를 했다가 패하고 아자딘의 종사가 되지 않았던가?
“덕분에 나야 고맙지. 악명도 명성이로군.”
아자딘은 자신보다 기수도 낮은 이들이 함부로 덤벼드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쉽게 이길 수 있음을 기뻐했다.
“그래서 미디암. 현재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 있지?”
“일족 말인가요? 약 200여 명 넘는 인원이 현재 브투마 강 하구 요새를 차지하고 있어요. 추가로 계속 증원 중이에요.”
“200여 명이 넘는다고? 가용 인원은 다 끌고 왔나 보군.”
아자딘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성벽 위에서 브투마 강 하구 쪽을 바라보았다. 비바람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요새에 불이 밝혀져 있는 게 보였다.
“상당한 요충지로 보이는데.”
“일족이 작정하면 저런 작은 요새는 쉽게 빼앗죠. 반대로 브투마 군이 저걸 되찾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전령일족 200여 명이 지키는 요새라면 그야말로 난공불락일 것이다. 하물며 저곳은 강 하구에 있는 섬. 그렇지 않아도 접근하기 까다로운 곳이다.
“거기에 추가로 증원 중이라니. 일족의 가능한 인원 거의 전부라고 봐야겠군.”
아자딘은 그 숫자가 가지는 무게에 신음했다.
아라엘 지파가 반역하고 빠져나간 지금 200여 명의 일족이 모였다는 건 그만큼 일족의 염원이 너무나 강렬하다는 것.
그런 일족들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야 하다니. 아무리 아자딘이 확고한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해도 두렵다.
일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다. 과연 아자딘은 이만한 각오를 하고 하는 짓인가?
그러나 코랄 사하르가 함락당했을 때 얼마나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살해당했는가? 나가들이 인간을 잡아먹고 백성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물러설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이는 바로 장로 카자스 님입니다. 브투마에 대해서 아무래도 잘 알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이스마일은 마치 아자딘을 괴롭히기라도 하겠다는 듯 카자스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면… 바로 들켰겠군.”
아자딘은 장로 카자스가 일족을 지휘하고 있다는 말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
폭풍우가 휘몰아치지만 워낙 폭우 대책이 잘 되어 있는 브투마는 큰 문제 없이 폭우를 막아냈다.
나가들의 공격도 이내 한풀 꺾였다. 아무리 위계질서가 강한 나가 사회라 해도 인명피해가 엄청난데 무작정 공격을 계속할 수는 없다.
나가들의 공격이 소강상태가 되자 황금왕 만자-자덱은 공로가 높은 이들을 불러 치하했다. 그중에는 아자딘도 있었다.
“잘했다, 금령사자. 그대를 선택한 내 안목에 흐림은 없구나. 어깨가 다 으쓱해지는군. 그래서 보상을 주고자 하는데 바라는 바가 있는가?”
“폐하. 송구스럽사옵니다만 전투가 계속되고 있사오니 감히 보상을 거두어주십시오.”
아자딘은 만자-자덱의 호의와 비례해서 자신의 몸에 꽂히는 증오를 느끼고 있었다.
황금왕의 까마귀들, 호위대장 카르첸과 그 파벌은 차라리 괜찮다.
혈마법사들과 사령술사들, 정규 군인들은 아자딘을 꺼려 하고 있었다. 만자-자덱의 총애를 받는 모습을 보여봤자 저들의 미움을 살 게 분명하다.
그러나 만자-자덱은 보상을 고집했다.
“그대에게는 내가 주는 보상이 별로 탐탁지 않겠지. 동족들을 거역하고 내게 상을 받으면 마치 이익을 위해서 동족을 배신한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언제 돌아 버릴지 모르는 미치광이 왕의 관심도 부담스러울 테고.”
만자-자덱은 정확하게 아자딘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에게 거절하지 못할 포상을 주고자 한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사람을 용서하고 구제하는 권한이지. 설령 대역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대가 설득해서 차후 내 위협이 되지 않는 이라면 내 누구든 용서하겠다.”
“그건….”
일개 가신에게 주기엔 너무나 과한 권한이다. 실제로 아자딘의 약진을 경계하는 다른 가신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자네가 선택한 자들에겐 목숨을 구제해주고 먹고 살 길을 마련해주는 거지. 일족을 보전하고자 한다면 간절히 원할 권한이 아닌가? 여전히 겸양인가?”
만자-자덱은 확실히 아자딘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일족에게도 등을 돌렸지만 일족과 원수를 지고, 그들을 죽이고 싶어서 배신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족의 존속을 위해서는 만자-자덱의 사면권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전령일족을 사면할 수 있는 사면권을 주겠다. 그대의 헌신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고… 또 이것은 그대에게 주는 내 임무, 명령이기도 하다. 전령일족이 야에가스의 왕좌의 도전한 죄를 사면받으려면 오직 그대를 통해서만 사면받을 것이다. 즉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긴다면 전령일족의 목숨 모두가 금령사자, 그대의 손에 붙여지게 되는 거지. 그러면 그대가 전령일족의 두령이 될 것이다.”
황금왕 만자-자덱은 그리 말하고 미소 지었다.
“이는 거부를 허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도록 해라.”
“잔인하시군요. 폐하.”
“남들은 탐내서 견딜 수 없는 권한일 것이다, 금령사자. 욕심이 없구나. 자 그럼 물러나서 쉬도록 해라. 그대에게는 앞으로도 더 고된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예….”
아자딘은 황금왕 만자-자덱의 알현실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