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208
207. 빛을 잃을지라도 2
“내게, 별이 아름답냐고?”
아자딘에게 별들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한 인물은 알디스였다.
그녀가 가르쳐준 설화와 전설들,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헌신과 사랑.
그래서 별들이 아름다웠다.
밤하늘에 명멸하는 저 작은 빛들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추억이었고 그리움이었고, 그리고 믿음이었다.
“지금은 모르겠군. 그런데 그걸 왜 지금 물어보는 거지? 나를 비웃고 싶어서라면….”
아자딘의 목소리에 적개심이 깔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하아. 뭐 마음대로 해라.”
그야말로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태도다.
“대답해주세요. 저는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어요, 아자딘.”
누구 멋대로?! 그렇게 반문하려 했지만 아자딘은 미디암에겐 실제로 그럴 자격이 있음을 떠올렸다.
그래. 그는 이 소녀에게 자신의 믿음을 피력했었다.
소녀는 그를 추궁할 자격이 분명히 있었다.
“모르겠다.”
“뭐?”
그 대답을 들은 이스마일이 분노했다.
아자딘이 그런 대답을 해서는 안되었다.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자딘이 생에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좌절한 모습을 보라고?!
분개하는 이스마일을 미디암이 제지했다.
“그럼, 무고한 백성을 지키는 것은 아름다운가요?”
“그건….”
한때 그것은 아자딘의 말이었다.
하지만 아자딘은 이제 자신의 말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공감했던 소녀가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지극히 깊은 동경과 동정심, 사랑으로 아자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자딘.”
소녀는 입을 열었다.
“별은 아름답지 않을지도 몰라요.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아름답지 않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별이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은 분명히 아름다워요.”
“!”
이 세상에 먹고, 싸고, 지배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저 하늘에 반짝이는, 아무 것도 아닌 빛무리에 가치가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는 사람의 믿음은 분명히 별 그 자체보다 아름답다.
이 소녀가 한때 아자딘의 목소리였던 믿음을 아자딘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래. 그것은 한때 나의 믿음이었지. 너에게 그런 말을 한 책임을 져야겠구나. 그거 꽤 무겁군.”
“또 그런….”
이스마일은 책임을 언급하는 아자딘에게 짜증을 냈지만 갑자기 뜨거운 열풍이 아자딘에게서 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
방금까지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던 아자딘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강력한 정기가 그의 몸을 채우고 있었다.
아자딘이 다시금 믿음을 회복했다.
*********
에타르 혈족은 오랫동안 소년의 혈족을 지배하고 지켜왔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를 지키기로 맹세해야 했다.
자신의 재능과 야심을 모조리 소녀에게 바쳐야 했기에 소년은 소녀를 사모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리라.
하지만 어느 날 밤 소녀는 소년을 불렀다.
반편이로 소문난 한 전령에게 도전해서 그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
그것을 들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다.
소년은 이게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무리 하위 전령이라고 해도, 번듯한 가문이 아닌 집안의 전령은 매섭다.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는 강함이 있기에 전령이 된 것이다.
나중에 몸이 더 여물고 난 후라면 모를까 아직 어린 소년과 소녀의 힘으로 현역 전령을 꺾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소년은 소녀를 사모해야 했기에 그는 그 무리한 소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역시 이스마일이야. 고마워. 혹시 뭐 가지고 싶은 게 있어? 보검? 아니면 좋은 활?”
“아뇨. 없습니다. 하지만 긴 여행을 가려면 좋은 신발과 산양이 있어야겠군요. 더운 지방에 갈 거면 말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꺼내 가면 다들 눈치채겠지요.”
“허, 욕심 없기는. 너도 좀 물욕이 있어야 내가 보답하기도 편할 텐데 말이지.”
“아가씨는 제게 보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에타르 혈족은 오랫동안 우리 집안에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네?”
“내가 그래도 뭔가 주고 싶은걸. 아, 그렇지.”
소녀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행여나 나중에 문책 받을 때 내밀어.”
“이건….”
그것은 옥으로 만들어진 작은 부절이었다.
아라가사들이 이 땅에 올 때 타고 온 다섯 배의 선주들이 나눠 가진 증거. 다섯 가문의 계승자들이 죄를 지어 맥이 끊기는 걸 막기 위해 두령이 보증한 면사옥이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감히 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될 물건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 너한테 줄게. 받는 게 좀 그러면 그냥 맡아둬.”
“맡아두라고요?”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니까.”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웃었다.
*********
그 소녀가 울고 있었다.
“아.”
미디암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흐른다.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그녀도 두려웠다.
아자딘이 폐인이 되고, 믿음을 잃고 부서져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자딘에게 받았던 것을 돌려주기 위해서 최대한 태연한 척,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가장 소중한 것을 전해주었다.
다행이다.
받아들여져서 다행이다.
그리고 아자딘이 자신의 기대에 보답해줘서 다행이다.
안도하게 되자 애써 억눌러왔던 불안의 반동이 눈물로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미디암.”
아자딘은 울고 있는 미디암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늦장을 부렸지? 자, 그럼 놀았던 만큼 보충해볼까? 하지만 그 전에 너무 배가 고픈데.”
삶에 의지를 되찾아서 그런지 방금 전까지 참을 수 있었던 허기가 몰려왔다.
“어차피 무거우니까 다 먹어 버리죠, 그럼.”
이스마일이 배낭에서 건량을 꺼내다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배낭의 밑바닥에 있는 목걸이, ‘면사옥’이 손에 잡혔기 때문이었다.
‘아아. 나는… 해방인가?’
이제 더 이상 소녀를 연모하는 척하며 자신의 야심이나 자유를 억제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두령에게 반기를 든 몸. 에타르 혈족에 의리 따위를 지킬 처지가 아니니까.
그런데 왜 마음이 이리도 무거운가.
분명히 그도 바란 일일 텐데.
이 소녀의 마음이 닿기를 그 역시 간절히 바라 마지않았다.
‘결국 나도 아주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 오만하구나, 나는. 행여나 자존심이 꺾일까 봐, 그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 봐 좋아하는 마음조차 한 발짝 떨어져서 관조했으니까….’
이스마일이 복잡한 마음을 억누를 그때였다.
[다 끝났나?]어느새 아자딘과 미디암, 이스마일을 지켜보는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새의 몸통에는 커다란 눈알이 박혀 있었다.
[다 끝났으면 만나자. 근처 강을 따라서 이동하면 동북쪽에 항구가 있을 거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찾아와.]그것은 아라엘의 목소리였다.
*********
약속 장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라엘과 그녀의 부하들이었다. 화조풍월의 4인과 꽃의 디미아의 동생 제니스, 그리고 그들의 하인들로 이뤄진 10명이었다.
아자딘은 그들을 헤아려보고 혀를 찼다.
한때 위세등등하던 아라엘 지파의 꼴이 말이 아니다.
‘화조풍월의 4인과 제니스를 제외하고는 전령이던 이는 없군. 역시 두령이 본색을 드러내고 코라사르가 떨어지니까 다들 갈아탔나?’
두문불출하던 두령 하티르가 모습을 드러내고 원로원의 야망이 실현되자 아라엘 지파에 있던 이들 대부분이 등을 돌린 것이다.
끝까지 아라엘에게 충성하는 건 이들 다섯 명과 그들의 하인들 뿐, 그런데 거기에 아자딘에게 익숙한 얼굴 둘이 추가되어 있었다.
“대장! 무사해서 다행이야.”
스콧과 샤티가 아라엘 일당과 함께 있었다.
“넌 거기서 뭐 하고 있냐?”
“그게, 아무래도 내가 인재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오라고 하는 곳이 많아서.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려니 힘들군.”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잡혔어. 도망치려고 했는데 이들에게 잡힌 거라고.”
샤티가 정정해주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거지?”
아자딘은 아라엘에게 물어보았다.
“그야 힘을 합쳐야 하니까. 자, 이건 네 거였지?”
아라엘은 그리 말하며 아자딘에게 뭔가를 던져주었다. 아자딘의 안장 가방이었다.
안을 살펴보니 아주어 스틸로 만들어진 도끼창의 머리, ‘청의 처형인’과 금화들, 심지어 황제의 금화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신왕진서 사본들은 없었다.
“어떻게 찾았지?”
“아문-자덱을 습격했거든.”
“음? 설마 죽였나? 그런 녀석도 피난민들을 집결시키고 지휘하는 데는 필요했을 텐데.”
“널 감옥에 가두고 죽으라고 버려두고 간 녀석을 옹호하다니. 여전하군.”
“황금왕에게 은혜를 입었는데 그 자식을 죽여 버리는 건 좀 그래서.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엔 아라엘, 너도 아문-자덱을 죽이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라엘은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아니다.
설령 그녀가 아문-자덱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그를 죽일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죽이는 걸 보류하지 않을까?
어차피 이 혼란이 잦아들고 나면 아문-자덱은 힘이 빠질 것이다.
본래는 정식 후계자로서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브투마에 기반을 두고 있던 그는 지지기반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 황금왕의 또 다른 자식이며 북방에서 군대를 조련하고 있는 다르한-자덱은 그 기반을 온존할 테니 아자딘이 굳이 아문-자덱에게 보복하지 않아도 향후 그에게 남은 길은 험란하다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라엘이 생각이 있다면 굳이 아문-자덱을 죽여 혼란을 불러일으킬 리 없다.
“그래. 신왕진서 사본만 빼앗았을 뿐이지.”
아라엘은 그리 말하고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새하얀 백색 마력의 문자들이 떠올랐다. 무수한 빛의 언어들로 된 광구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춤춘다.
신왕진서, 완전하진 않고 여기저기 이빨이 빠져 있지만 타락하거나 오염되지 않은, 강력한 백색 마력의 마도서다.
“그건?”
“내가 모은 신왕진서 사본들과, 네가 모은 것들, 그리고 원로원이 오래 전에 필사해둔 것을 합쳐서 만든 거다. 이것을 브투마의 왕좌에 집어넣으면 두령이 더럽힌 왕좌를 정화하고 내가 브투마의 신왕이 될 것이다.”
“…….”
놀라운 성과다. 아라엘에게 이런 게 가능하다니.
알디스가 코라사르를 차지하기 전에 이걸 일족들에게 보여주었다면 과연 다들 아라엘을 칭송하고 그녀를 위해 일족에게 반기를 들 법도 하다.
하지만 하티르와 알디스가 코라사르를 손에 넣고 이제 브투마마저 함락시킨 지금에 와서는 그 의미가 퇴색한다.
“엄청 많이 모았나 보네? 그런데 이걸 보여줘도 이게 전부인가….”
아자딘은 화조풍월의 4인들과 제니스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원로원이 새겨 놓은 질서 앞에 무력하니까.”
“오랜 세월 노예로 살아온 놈들이다. 신분이 낮은 놈들 중에는 아라엘 님의 이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래도 다섯 가문이나 원로원에 저항하고 싶지는 않은 게지.”
새의 세라프, 바람의 알레프가 울분을 터트렸다.
그 말을 들으니 너무 궁금해진 아자딘이 물어보았다.
“아라엘이 하려는 게 원로원이 하려는 거랑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