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209
208. 빛을 잃을지라도 3
아자딘의 물음에 세라프와 알레프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대답이 빠른 걸 보니 그 질문이 나오길 정말 간절히 바란 모양이다.
“원로원과 두령 하티르는 이 세상을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세상에 절망한 마귀 같은 놈들의 전형적인 짓거리지.”
“반면 아라엘 님은 세계를 파멸시키지 않은 채로 지배하려 하신다. 기왕 세계를 지배한다면 온전하고 안전하게, 더 많은 노예를 두고 지배하는 게 더 큰 권력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 그만. 거기까지.”
아자딘은 이들의 말을 듣고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보지 말고 말하고 싶어 안달 나게 놔둘걸. 괜히 물어봤어. 별로 좋지도 않은 대답인데.’
듣고 나니까 궁금증이 싹 가시고 흥미가 사라지는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두령 하티르와 원로원의 입장은 세계를 아작 내도 어차피 그걸 먹어야 할 아라가사들의 숫자가 적으니까 괜찮다는 거고, 아라엘은 세계를 온전한 채로 먹자는 소리잖아? 아 어떻게 생각하는 게 그 정도 수준이냐, 진짜.”
“오해가 있군.”
아라엘이 아자딘의 말을 정정하러 나섰다.
“나나 하티르나 아라가사를 누구도 핍박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겠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두령 하티르는 아라가사의 인구가 적어서 종국에는 휘브리스인들에게 녹아 없어질 것을 염려하였지. 휘브리스인들을 억압하고 숫자를 줄이지 않으면 아라가사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미친 짓을 한 거야. 반면 나는 아라가사 민족이 종국에는 사라진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더 우선이니까. 융화되어서 평화롭게 사라지는 거라면 거부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휘브리스인들을 무의미하게 죽일 생각은 없다.”
“노예로 쓰려면 무의미하게 죽일 이유가 없겠지.”
“노예제는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아. 열심히 일해야 간신히 먹고 살 만큼의 보수를 주며 쥐어짜는 쪽이 동기 부여나 인적자원 관리 면에서 더 좋지.”
“…….”
“아자딘. 네가 날 믿지 않는 건 알겠지만 적어도 나는 하티르처럼 세상을 파멸시킬 생각은 없어. 목성의 시대는 내 쪽에서 사양이다. 그건 너도 잘 알 텐데? 너는 나에게 괴롭힘을 당한 과거 때문에 날 의심하고 싶어 하는 거겠지만,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제시하는 것 이상의 대안은 없어. 사실 내가 너에게 제안을 하기 전에 너는 혼자서 신왕진서 사본을 모아서 그냥 왕좌에 쑤셔 박을 생각이었지? 그렇지 않아?”
“그래.”
아자딘은 양손을 들었다. 한 손은 날아가 버렸으니 양팔을 들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 한다. 해.”
이리하여 아자딘과 아라엘의 동맹이 성립되었다.
*********
아라엘 지파가 몰락하긴 했지만 아라엘은 여전히 강력했고 부하들의 충성심 또한 여전했다.
무엇보다 인원이 꽤 되었기에 물자도 풍족했다.
“자 그럼 이 팔을 붙이자. 대장.”
스콧은 방부 처리되어 시랍에 뒤덮인 손을 가져왔다.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상태가 양호한 손이었다.
그것을 건틀렛에 넣고 아자딘의 팔꿈치까지 조이고 주술을 거니 손이 아자딘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놀랍군.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는 거지만 환지통이 덜해졌어. 그런데 사령술인가?”
“아니. 이건 무색 마력으로 움직이는 마도구야.”
“흠?”
“대장의 경우는 신왕진서의 백색 마력을 몸에 불어넣었잖아? 그거 때문에 사령술로 움직이면 흑색 마력과 충돌을 일으킬까 봐.”
“놀랍군.”
아자딘은 스콧의 세심함에 감탄했다.
사령술사이니 그냥 사령술로 움직이고 싶었을 텐데 아자딘의 세세한 사정을 헤아려서 순전히 그를 위해서 이걸 만들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일반 마술에도 뛰어난가 보군?”
“뭐 그런 것도 있고 무색 마력으로 움직이는 게 환지통 해소에도 좋거든. 다만 가려움이나 열감 등을 느낄 수 있는데 그건….”
“내가 처리해주지.”
샤티가 아자딘에게 마법을 걸어주었다. 자잘한 상처들이 재생하고 환지통이 가라앉는다.
아자딘은 그들 둘의 도움을 받아들이며 감탄했다.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대장. 나는 저기, 여기까지 하면 안 될까?”
“…….”
“아무래도 이 이상 안에 들어가면 죽을 것 같고. 대장을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결국 용병이거든.”
“나도 부탁하지.”
샤티도 아자딘에게 부탁했다.
“알겠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아자딘은 스콧과 샤티가 떠나는 걸 허락해주고 안장가방을 뒤져 금화들을 꺼냈다.
스콧과 샤티의 헌신이 컸기에 아낌없이 갖고 있는 금화 전부를 그들에게 쥐어 주었다.
“그간의 헌신에 대한 보상이다.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뭐 이 정도면 엄청 인심 좋은 거지. 역시 대장이라니까.”
“그럼 무운장구하기를. 아자딘.”
아자딘에게 금화를 받아든 샤티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서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군.”
설마 자신이 아자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샤티는 진심으로 아자딘의 승리를, 무사를 빌었다. 그래서 그녀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쓰기로 했다.
“아자딘. 이마를.”
“…….”
아자딘이 말없이 이마를 대자 샤티는 아자딘의 이마에 주문을 걸었다.
“무슨 주문이야?”
잘 모르는 녹색 마력의 주문이 걸려서 아자딘은 물어보았다.
“축복의 주문이다. 살아서 다시 만나기 위한 약간의 주문이지.”
샤티는 그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그래서 샤티. 어디로 갈 건가?”
스콧이 그녀에게 물어본다.
“모르겠어. 나가들에게 돌아갈까.”
“대장이랑 친밀하던 나가라쟈가 면책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아마도 내가 아자딘과 함께 죽을 운명이라고 여기고 선심을 써준 걸 거야. 나가들은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살아서 돌아가도 나를 용서해 줄지는 모르겠군.”
“흠, 나가라쟈라는 놈들이 다들 한 입으로 두 말 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와 같이 셀 소드나 되자고. 조금 위험하지만 배를 타고 남해군도 쪽으로 나가거나 연안을 타고 올라가서 타라사르 쪽으로 가도 되고. 지금 타라사르에선 용병들을 엄청나게 모으고 있다고 하던데.”
“그래.”
샤티와 스콧은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며 떠나갔다.
*********
“저들을 놔줘도 되겠어? 하나는 나가고 하나는 오크 사령술사인데?”
아라엘은 아자딘에게 물어보았다.
“배신할 사람들이 아니다.”
“흠. 꽤 믿나 보군.”
“물론 믿지. 나는 두령 하티르의 눈에서 끝없는 허무와 체념을 보았다. 그런 이와는 거래 자체가 멍청한 짓이야. 스콧이 깐죽거리긴 해도 멍청한 녀석은 아니거든.”
“뭐 네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손은 어때?”
휘익.
그 순간 아라엘의 머리칼을 가르며 화살이 날아갔다.
아자딘이 재빠르게 화살을 날린 것이다. 사람 머리를 향해 화살을 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위지만 아라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아자딘이 발사한 화살을 눈으로 쫓았다.
“흥….”
화살은 그녀의 뒤쪽 저 멀리 날고 있던 새를 맞췄다.
일반적인 새가 아니라 관측용 마법을 건 새의 시체였는지 화살에 맞는 순간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아래로 떨어진다.
정확한 사격이었지만 아자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역시 완벽하진 않군. 눈을 맞추려고 했는데 날개에 맞았어.”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면 칭송받아 마땅한 실력이지만 아자딘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머리나 목이라면 모르지만 날개인가? 심각한데.”
아라엘도 아자딘의 의견에 동의했다.
스콧이 만들어준 손이지만 당연히 원래 몸보다 좋다고 할 수 없다.
“손이 날아갔는데, 활을 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그런데 그림스로운의 곤봉은 없었나?”
“청건당 놈들이 가져갔다고 들었어. 아문-자덱에게 직접 들었다.”
“그렇군. 그건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데 특화된 무기인데….”
아자딘은 곤봉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지간하면 동족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슬슬 움직일까? 저쪽에서도 우리 위치를 파악한 것 같은데.”
아자딘이 활을 날려서 새를 떨어뜨렸기 때문일까?
하늘에 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령술로 띄운 정찰용 사체들과 선견조 마법들이 새가 사라진 지역 주위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직은 괜찮지만 이래서야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키게 될 것이다.
*********
이미 브투마는 나가들이 섬기는 네더의 사신, 파도의 왕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상에 수초가 자라나고 파도와 바닷물이 밀려와 건물들을 적신다.
황칠을 더해 금색으로 반짝이던 브투마의 건물들은 외장이 벗겨지고 흉측한 이끼와 수초들이 자라나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도시 각지에서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브투마 주민들의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아이가!”
나가들이 살아 있는 인간을 잡아서 어딘가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미 그들 뒤에는 마치 어물전의 생선처럼 도마 위에서 목이 떨어지고 내장이 후벼 파진 시체들이 즐비하다. 인간의 피와 살, 내장을 뽑아내어 만들어진 흉측한 괴물들이 그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나가들은 인간의 근골로는 미이라를 만들고 내장 덩어리들은 뭉쳐서 네더의 권속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가들과의 신의를 이렇게 열심히 지킬 줄은 몰랐군.”
전령일족들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휘브리스인들을 미워한다고 해도 전령일족 역시 인간이었다. 나가가 인간들을 도축해서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은 보기 역겨웠다.
아직 나이 어린 전령은 토악질을 참지 못하고 토하기까지 했다.
“참아. 멍청한 놈아. 시체 좀 봤다고 토하다니. 그러고도 전령이냐?”
“그, 그렇지만….”
“두령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덟 개 왕좌를 다 차지할 때까지는 나가 제국이 필요하다고. 저놈들은 네더의 사교에 물들었으니 저들이 필요하다는 걸 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이지.”
고참 전령은 다른 젊은 전령을 다독였지만 그의 표정도 그리 밝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밝은 표정을 짓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놈이리라.
그러는 사이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나가들에게 끌려와 커다란 나무 도마 위에 내던져졌다.
나가들은 꼬리를 내밀어 그녀의 손발을 묶고, 커다란 글레이브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
젊은 전령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 한 발이 날아가 글레이브를 쥔 나가의 목을 관통했다.
화살이 나가의 목뼈를 잘라 버렸는지 거대한 나가의 몸이 휘청거리며 글레이브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
그와 동시에 맹렬한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나가들을 급습했다.
놀란 나가들이 만들다 만 미이라들을 일으켜 화살받이로 내세우자, 이번엔 푸른 빛의 화살이 날아왔다.
-화조풍월, 청풍명월황학!
화살이 미이라의 머리 높이에서 빙글 원을 그리자 푸른 광륜이 생겨나고 그 광륜에 걸린 미이라들의 머리가 폭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