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217
216. 멸망의 전령 1
아자딘은 몸을 일으켰다. 알디스를 죽이고서도, 뭐가 남아서 다시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만 하티르를 남겨둘 수는 없었다.
“어리석은 딸이었다고? 그녀는 네놈과 일족에 대한 책임 때문에 원치도 않는 싸움에 나서야 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네놈의 만행 때문에 말이야!”
“알디스의 죽음 때문에 날 비난하는 거냐? 죽인 건 너다.”
“제기랄! 차라리 타협할 만큼 했어야지! 그냥 왕좌를 찬탈했다면 모르겠어. 그랬다면….”
아자딘은 일족을 막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일족을 떠나갔을 뿐, 카자스와 알디스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일도 없었겠지.
“그런 식으로는 아라가사가 멸망하기 때문이다. 가혹한 선별훈련을 하지 않으면 아라가사의 능력은 희석되고 사라진다. 하지만 선별 때문에 인구가 늘지 않지. 우리의 인구를 늘리기 힘들다면 저들의 인구를 줄여야지.”
“사람 숫자를 늘리고 줄이는 게 장난이야? 그따위 소리를 태연히 하는 놈들이라면 멸망해도 싸!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 아라가사가 멸망하는 게 차라리 낫다, 하티르! 네가 이끄는 아라가사라면 말이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네놈도 똑같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고 너도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나?”
확실히 하티르가 말하는 대로다. 알디스를 자신이 죽였다는 실감이 아자딘을 덮쳐왔다.
“으윽!”
분노가 극심해지자 현기증까지 머리를 엄습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아무리 왕의 치유 마법을 받았다 해도, 재생 마법이 몸에 남아 있어서 재생력이 발동한다 해도 빈혈은 바로 낫지 않는다.
아자딘이 숨을 헐떡이는 걸 본 하티르는 흑강검을 치켜들었다.
“설마 그날 주운 아크레의 자식이 이렇게나 날 번거롭게 할 줄은 몰랐군. 하지만 이제 끝이다, 아자딘.”
하티르는 아자딘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었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다.
자신을 패퇴시키고 알디스조차 꺾은 녀석이다. 벌레 하나 못 죽일 만큼 다치고 지쳐 보여도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다.
입장을 바꾸어 아자딘이라 해도 의심했으리라. 아라가사들은 어린 시절부터 온갖 속임수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카자스가 까다로운 녀석을 만들었군. 대충 키우면 될 놈을 왜 그렇게 진심을 들여서 키웠는지.”
하티르는 활을 꺼내 쏘려고 했지만 화살통이 비어 있었다. 그는 대신 알디스의 창을 가져와 창의 자루를 자르고 활시위에 걸었다. 화살 깃도 없는 창이지만 이 가까운 거리에서는 충분히 맞추고도 남음이 있다.
아자딘은 눈앞에서 자신을 노리는 하티르를 보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빈혈이 그의 팔다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였다.
-콰앙!
갑자기 하티르의 뒤에서 커다란 팔이 튀어나왔다.
네더의 사신이 실체화되어서 대지를 가르고 튀어나온 것이다.
“아니?!”
하티르는 아자딘을 노리던 활을 뒤로 쏘고 앞으로 뛰어 그 팔을 피했다.
알디스의 창이 팔에 꽂혔지만 아주 약간 박혔을 뿐, 사신의 팔을 따라 혈관이 맥동하자 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멍청한! 나는 적이 아니다!”
하티르가 그리 말했지만 사신의 팔은 가차 없이 그에게 독기를 뿜어내었다. 브투마 왕성을 장식한 비단 장막마저 검게 타들어 가는 끔찍한 독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죽을 부상을 입었다 살아났다고 해도 전령일족의 두령, 만만치 않은 실력자다.
“역시 아직은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일 뿐인가… 아라라트!”
급한 대로 하티르는 황제의 마법을 사용했다.
빛의 검 아라라트가 수평으로 휘둘러지며 사신의 팔을 베어내고 쏟아지는 어둠을 잘라 버렸다.
신화 속에서 사신의 팔을 베는 거대한 빛의 검, 그야말로 신의 위광이라 할 만한 장면이다. 하티르에게 좋은 감정이 없는 아자딘이 보기에도 장엄한 광경이었으니 말이다.
사신의 팔이 잘리고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몸 곳곳에서 빛이 명멸하더니 이내 팔 전체가 타들어 간다.
“해치웠나?!”
하티르가 말하기가 무섭게 지면이 갈라지고 무수한 팔들이 튀어나왔다. 팔 하나하나가 거목에 필적하는 크기여서 그 모습이 오한이 들게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미쳐 버릴 스산한 사기가 팔에서 뿜어져 나왔다.
-성광의 번개!
하티르가 또다시 황제의 마법을 시전해 빛의 번개를 사방에 떨어뜨렸다. 연쇄적으로 번개가 떨어지며 폭발을 일으켜 사신들을 압도한다.
“…….”
아자딘은 사신과 싸우느라 무방비가 된 하티르의 등을 보고 있었다.
빈혈이 불러온 현기증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 무기를 내찌르기만 하면 하티르를 해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공격하기엔 뭔가 이상하다.
알디스와 카자스가, 그 외 많은 일족들이 그에게 충성하다 죽음을 맞이했으니 분명히 하티르에겐 일족 타락의 책임이 있다.
증오스럽다.
이 녀석만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아자딘이 카자스나 알디스와 척을 짓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하티르의 탓으로 돌리고 죽여 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신과 싸우고 있는 이를 기습한다는 건 아자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양심은 무슨….’
아자딘은 스스로의 고집에 기막혀하며 몸을 일으켰다.
“왕좌를 정화하겠다! 불만은 없겠지, 하티르!”
“네놈이… 그건 아라엘이 만든 것이렷다? 아라엘을 믿을 수 있나?”
“모르겠어!”
아자딘은 그리 말하고 아라엘이 넘겨준 신왕진서 사본으로 만들어진 마도서를 꺼냈다.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 마도서는 홀로 순백의 빛을 발하며 눈부시게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물론 아자딘은 눈이 없으니 눈부시다는 건 몰랐지만 이 빛을 볼 때 적어도 아라엘이 사악한 술수를 부리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큭!”
하지만 아자딘이 석영왕좌로 다가가려 하자 네더의 사신들이 방해하기 시작했다.
알디스의 시체가 일어났다.
*********
여름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네더의 사신은 고차원적인 존재다. 우리와는 인식이 확연히 다른 진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지.”
카자스는 그리 말하고 네더의 언어를 살짝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유리병 안에 담겨 있던 벌레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벌레만이 아니다. 네더의 언어를 내뱉은 카자스의 피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뭔가가 돋아나더니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인다.
카자스는 흑요석을 깨뜨려 만든 작은 칼날을 꺼내 자신의 살을 잘라 그것을 절개했다. 그것을 유리병 안에 넣으니 변이한 벌레와 카자스의 몸에서 자라난 벌레가 서로 싸우며 유리병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스, 스승님! 탈출하겠어요!”
“그렇지?”
카자스는 손바닥을 펴서 병 입구를 후려쳤다. 병 안이 피로 물들며 벌레들 둘 다 모조리 죽어 버렸다.
“헉.”
어린 시절의 아자딘은 그 모습을 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네더의 언어가 가지는 무서운 힘, 끔찍하고 사악한 힘에 경이마저 느낀 것이다.
“이 네더의 언어는 누가 기록한 건가요?”
“그것은 사신의 노예다.”
“네?”
“우리가 사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듯 사신 또한 우리가 너무 작고 한미해서 이해하기 힘들지. 그래서 스스로 사신에게 자신을 바쳐 권속이 된 이들이 있다. 그들이 이해한 지식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네더의 언어다만….”
카자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자신의 지식과 영혼을 사신에게 바치는 짓. 죽음보다 더 끔찍한 파멸이지.”
“하지만 네더의 추종자들이 있잖아요? 그들은 왜 그런 끔찍한 걸 섬기는 거지요?”
“우리가 언젠가 목성의 시대를 맞이할 테니까.”
“?”
“너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대도시에는 10층이 넘는 건물, 까마득한 첨탑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런 첨탑에 불이 붙어서 옥상에 몰린 사람들, 불길이 들이닥치는 걸 보면서 도망갈 길도 없는 사람들은 종종 너무 두려워서 차라리 스스로 불길에 몸을 던지곤 한다.”
“아.”
“창귀 같은 것도 그렇지 호랑이 같은 맹수에게 몰려서 도망갈 길이 없다고 생각되면 때로는 홀린 듯이 스스로 달려 들어가 맹수에게 목을 내주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있다. 마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맹수가 요술을 부려 사람을 홀린다고 생각하지만, 한낱 짐승이 마법을 쓸 리가 없지. 그저 너무나 큰 절망 앞에서 마음이 부러진 이들이 저항하는 것조차 감당하지 못해 능동적으로 자멸을 선택하는 것이다.”
“끔찍하군요.”
“투지를 잃어버리면 스스로 절망에 굴종하게 된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투지를 잃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 싶다만… 나도 우습구나. 너에게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닌데.”
“처지가 아니시라니요?”
“나는 이미 나의 별을 잃었다.”
“네?”
이해하기 힘든 소리였지만 아자딘은 알디스에게 가르침을 얻었기에 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새로 찾으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다.”
카자스는 아자딘의 말을 듣고 힘없이 웃었다.
“자, 이제 활을 쏴야 할 시간이구나. 멍청한 제자야.”
“네?”
“근처의 고블린들을 잡아서 화살을 만들게 했다. 여기 갈대밭이 갈대 화살을 만들기에는 딱 좋지. 이 갈대밭이 다 없어질 때까지 쏘고 쏘고 또 쏘면 이선궁을 터득하지 못한 너도 터득하게 되지 않겠느냐?”
“…이 갈대밭을 말인가요?”
아자딘은 광활하게 펼쳐진 갈대밭을 보며 기겁했다.
활이 너무 강해서 50대만 쏴도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얼굴이 황달처럼 노랗게 물들 지경인데 이 갈대밭을 죄다 화살로 쏴서 없애게 하라니.
“자, 투지를 잃어버리면 스스로 절망에 굴종하게 된다. 투지를 가져라 아자딘.”
“…….”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
아자딘은 거덜 난 왼팔로 활을 잡으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알디스의 경우는 다른 네더 추종자들과 달리 다가오는 절망에 스스로 굴종한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신선한 시체인 상태에서 사신의 힘에 넘어가 권속이 된 것은 그것대로 끔찍한 파멸이다.
“아자딘?”
알디스의 몸을 차지한 그것이 알디스의 목소리로 아자딘을 불렀다.
그 순간 왜 사람들이 불길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지, 왜 끝없는 절망에 스스로를 던지는지 아자딘은 이해할 수 있었다.
믿고 싶다.
알디스가 살아났다고.
설령 지금의 그녀가 레버넌트나 흡혈귀 같은 존재이고, 사악한 기운에 잠식되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영혼이, 그 연속성이 그녀이기만 하다면 기꺼이 이 어둠에 굴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아자딘은 그 알디스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확실히 카자스도, 알디스도, 아자딘을 너무 제대로 키웠다. 투지를 꺾을 절망이 눈앞에 다가오면 아자딘은 반사적으로 저항해 버리고 마니까.
아마도 카자스가 자신이 느낀 절망을 아자딘만큼은 극복하길 바라고 심어둔 행동 기제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