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221
220. 멸망의 전령 5
아라가사에게는 힘이 전부다.
아니 아라가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힘이 없는 자는 존중받지 못한다. 무력하고 저주받은 소년 시절부터 아자딘은 몸소 느껴왔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평생을 쌓아올린 힘이 지금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자딘의 힘은 카자스 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정제되지 않은 불완전한 화조풍월의 힘을 격발시켜 순수한 신체능력으로 바꾸고, 그 체술로 화조풍월의 암살 마법들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신체가 망가진 지금 카자스 해서는 사용할 수 없다. 일상생활조차 가능할지 의문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일족의 내전에 개입하여 많은 이들을 죽게 만들고 그래서 도달한 결과가 폐인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너무나 끔찍하다.
이 끔찍한 현실에 눈 돌리기 위해 고개를 돌린 아자딘에게 인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배를 타고 피신 중이다. 나가들을 피해서 내륙으로 이동 중이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반릉으로 향할 것이다.”
“브투마는?”
“브투마는 안정되어 가고 있다. 하티르는 죽었고, 원로원은 붕괴되었지. 물론 오대 혈족과 그들의 상회는 남아있으니 그들 중심으로 다시 일족이 재집결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우리의 승리다.”
“승리라고…?”
“그래. 뭐 피해가 크긴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왕좌에 아라엘의 마도서를 넣었고, 원로원을 분쇄했으니까. 다만… 그 뒤처리를 위해서 필요한 게 있다.”
인딤이 몸을 일으켰다.
남자라고 여겨질 만큼 장신이지만, 근육질 몸에 살포시 돋아난 가슴이 인딤이 사실 여자라는 걸 알려주었다.
놀랍게도 인딤은 옷을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아자딘을 덥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딤이 아자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네 몸이 필요하다.”
“…….”
인딤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더니 아자딘을 번쩍 들어올렸다. 몸이 회복되지 않은 아자딘은 저항할 수 없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지금의 나는 죽일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신왕진서도 다 브투마의 왕좌에 집어넣어서 더 건질 것도 없는데?’
그런 의문은 곧 풀렸다.
선창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고 그곳에 아라엘과 화조풍월의 4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니… 4인이던 인물들이라고 해야겠지.
화조풍월의 4인 중 살아남은 이는 인딤과 세라프, 그리고 디미아 뿐이었다.
넷 중 셋이 살아남았으니 대단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하인들, 그리고 디미아의 동생 제니스도 보이지 않았다.
“아자딘. 내 동생. 깨어났나?”
아라엘이 아자딘을 돌아보았다.
“디미아와 인딤이 일주일 내내 체온으로 나와 널 데웠어. 죽을까 봐 걱정했는데 살아났구나. 다행이다.”
“…아라엘.”
아자딘은 아라엘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두 다리가 잘려 지혈대로 다리를 묶어둔 상태였다.
아자딘도 폐인이 되었지만 아라엘 역시 그렇다. 그래서 아자딘과 아라엘 둘 다 체온을 높이기 위해 일주일 내내 디미아와 인딤이 알몸으로 체온을 나누어준 것이다.
아자딘으로서는 전혀 기억에 없는 걸 보니 일주일 내내 혼수상태였으리라.
‘그 잘난 아라엘도 폐인이 된 건가? 하지만… 아니, 그녀는 나보다 상황이 낫지.’
아라엘은 아자딘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마법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체술인 카자스 해서와 달리 아라엘이 사용하는 것은 진짜 마법이니 그녀는 다리가 잘렸다 하더라도 여전히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저렇게 많은 신체를 잃어버리면 더는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리라. 아마 남은 수명도 많이 깎였으리라.
“다리는….”
“원로원을 파멸시킨 대가지. 아라가사는, 원로원은 이제 멸망했다. 뭐 오대 혈족은 남았지만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라고 생각해.”
아라엘은 아라가사가 멸망했다고 말하려던 것을 원로원으로 고쳐 말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원로원도 너도 다른 민족들을 학살하고 착취하더라도 지배해서 우리 아라가사들을 부강하게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너희끼리 내분을 겪은 결과 아라가사가 쇠락하다니. 너무 부끄럽지 않아?”
“후회는 없어. 원로원의, 하티르의 행동을 막은 건 너잖아, 아자딘? 그렇다면 너도 원로원보다는 우리가 더 정당성이 있다는 걸 알텐데? 그러니까 우리 편에 서서 싸운 것 아닌가?”
“너희 편이 된 기억은 없어. 물론 치료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제 어쩔거지? 다리도 잃었고… 몸도 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아라엘은 전장의 여신이어야 했다.
아라엘 지파는 그녀의 카리스마로 인해 유지되고 있는 것. 아라가사들 사이에서 아라엘이 카리스마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아름답고 강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강하지 않으면 존중받지 못하는 건 비단 아라가사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다.
야에가스 신족들, 신왕들 사이에서도 신체 결손이 있으면 왕위계승권을 잃는 관습이 있다. 아라엘이 아무리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두 다리가 없으면 지도자 위치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야망을 버리고 어디 은거하며 평범하게 살아갈 건가, 아라엘?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너는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
“아니. 싸우지 못하면 아라가사는 죽는 거야. 그리고 사실 지금 나도 너도 피를 많이 흘려서 목숨이 위험한 상태이고. 그런데 아자딘, 그거 알고 있어?”
“뭐를?”
“형제끼리는 서로서로 피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걸? 쌍둥이라면 더더욱 확률이 높지.”
“…….”
아자딘은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아 있는 화조풍월의 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세라프와 알레프는 형제지간이었다. 디미아와 제니스 또한 자매지간이었다.
이들 둘 중 한 명만 살아남았는데, 상태가 놀랍게도 멀쩡하다. 아라엘이 두 다리를 잃을 정도라면 그들에게도 사투였을 텐데?
“설마?”
아자딘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다시금 자세히 바라보았다. 마법을 쓸 줄은 모르지만 카자스가 네더 언어를 해석하고 네더 마법을 익힐 때의 조수로 참관했기에 네더 언어를 읽을 줄은 알았다.
지금 여기에 적혀 있는 마법진은 네더의 마법이다.
“무슨 생각이야?”
“내가 말했지?”
인딤이 다가와 아자딘을 안아들어 마법진 위에 올려놓았다.
아자딘은 꼼짝도 못하고 마법진 위에 섰다가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라엘 님의 피와 살이 되어라.”
“너희들 설마… 형제를 흡수한 거냐? 미친…!”
“각자가 원해서 한 일이었어!”
세라프가 그리 항변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형제를, 알레프를 죽게 할 리가 있나! 하지만 둘 다 죽어가느니 누군가는 살아야 했지!”
“그… 그건.”
그건 합리적이다. 하지만 아자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말도 안 돼! 아라엘! 나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네게 모든 걸 빼앗겼어! 아라가사의 생득권인 마도서도! 눈알도! 그런데 이제는 내게서 목숨마저 빼앗겠다는 거냐? 너무하잖아!”
“그렇지? 하지만 아자딘. 지금 그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아라엘은 주문을 시전했다.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발동하기 시작한다.
네더의 사악한 마법, 사령술과 생명을 관장하는 녹색 마법 등등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마법들이 아라엘에 의해서 시전되었다.
아자딘은 그 복잡한 마법들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몸이 말을 안 들어. 저걸 처다볼 수밖에 없어.’
보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마법진을 발동시킨 아라엘이 잘린 양다리를 대신해 지팡이를 짚더니 훌쩍 몸을 날려 마법진 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걸 보던 디미아와 세라프, 그리고 인딤이 흠칫 놀랐다.
“아라엘 님!?”
“무슨….”
“뭘 하시는 겁니까?!”
아라엘은 옴짝달싹 못 하는 아자딘을 붙잡아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로, 무릎 밑이 찢어져 지혈대를 묶어둔 허벅다리에 올렸다.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생각해 보면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구나, 동생아.”
“누가 동생이야. 내가….”
아자딘은 항변하려 했지만 문득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라엘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라엘은 마치 정말 사랑스러운 상대를 바라보는 듯한 애틋하고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자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디스가 어린 시절의 아자딘을 바라보던 것과 같은 표정이다.
아자딘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아라엘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던가?
“아자딘. 사랑받지 못해서 괴로웠지?”
“뭐?”
“우스운 일이구나. 사내는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해 고통받고, 여자는 욕망의 대상이 되어서 고통받는 게 세상의 꼬락서니라고 생각하지 않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라엘?”
그렇게 물었지만 슬프게도 이미 그는 아라엘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내는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부와 권력을 차지하거나 어지간히 용모가 빼어나지 않는 한, 사내가 여성에게 갈구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여성은 외모가 떨어지더라도 누군가는 그녀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즐겁기만 한 일인가?
전혀 아니다.
타인의 욕망에 자신의 운명이 유린당하는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를 대체 왜 하는가?
“너도 고통스러웠다고? 인기가 너무 넘쳐나서 주체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려는 거야?”
물론 아자딘도 바보는 아니다.
두령 하티르가 아라엘의 특출난 태생에 관심을 가져 그녀를 품으려 했었다는 이야기에서 이미 아라엘이 자신이 생각하던 그저 잘나서 주체 못 하는 인물이 아니라, 원로원의 질서 하에서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위협받던 존재임을 알았다.
아라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능력을, 힘을, 그 필요성을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나이가 차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티르의 첩이 되어 원로원의 사악한 마법사들이 원하는 대로 아이를 낳아야 했으리라.
그리고 아마도 하티르는 아자딘과 아라엘의 조상, 그 계보를 따져보면 아자딘과 아라엘도 하티르의 자손이었으리라.
끔찍한 소리다.
아자딘이 무력한 존재여서 박해를 받았다면….
아라엘은 유능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어서, 아주 좋은 혈통마 취급을 받았다.
가뜩이나 가혹한 아라가사의 삶에서, 그런 운명이 내정되어 있다면 어린 소녀는 얼마나 고통받을 것인가?
그러나….
아자딘은 그 내부 사정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이해해 버리면 아라엘에게 상처입고 괴롭힘당하며 자살까지 생각했던 어린 날의 자신은 누가 소중히 여겨준단 말인가?
아라엘의 상처 하나하나는 모두가 이해해야 하고, 심지어 아라엘에게 학대당했던 아자딘 자신도 그녀를 이해해줘야 한단 말인가?
웃기지 마!
그렇게 되면 어린 시절의 아자딘이 너무나 가엽다!
아자딘은 아라엘의 과거를 이해하는 걸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