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226
225. 예언의 기사 4
죽음의 기사 플랑크는 낮에는 망령처럼 투명해져서 보이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그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면 밤에 만날 필요가 있었다.
아자딘은 낮에는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밤이 되면 플랑크를 만났다.
플랑크는 죽음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냉기로 주위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으니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자딘은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아자딘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플랑크 경뿐이었다. 다른 누가 영혼 없는 불경자인 그에게 마법을 전수해줄 것인가?
아자딘은 낮 동안 명상과 조율, 관조를 통해 얻은 깨달음과 질문들을 플랑크에게 물어보았고 플랑크는 지혜의 기사라는 이명에 부끄럽지 않도록 좋은 답을 돌려주었다.
“중요한 것은 비우는 것이네, 아자딘. 지금 그대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어서 망가진 거니 비워 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해. 그런데 신왕진서 사본을 몸에 구겨 넣다니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오크나 할 법한 발상을 했나?”
“아는 오크가…….”
“역시. 하여튼 오크나 엘프가 문제라니까. 그들은 마법을 무슨 도구라도 되는 양 너무나 쉽게 생각하지.”
“아뇨. 하지만 마법을 비워 내라는 건 그 오크도 제안한 방법이었습니다.”
“약간은 상식이 있는 오크였나 보군. 그래도 엘프와 오크를 믿지 말게. 그들은 힘과 지식에 심취한 미치광이들이니까.”
“그, 그렇군요.”
“물론 그냥 무작정 비워 내는 바보짓은 하지 말게. 지금까지 자신의 안에 들어온 것을 언제든 다시 채울 수 있도록 이해하고 체험하면서 비워야 한다네. 내 몸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차 있어서 만지지 못하는 게 아쉽군. 보통 이런 경우 마력을 잘 다루는 스승이 접촉으로 마법을 알려주면 더 빨리 배울 텐데.”
“조금 더 오래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만큼 플랑크 경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뭐. 하하하. 이런 이런.”
플랑크는 아자딘의 넉살 좋은 아부에 웃었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다.
플랑크는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아라가사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40년 이상 구난기사단에 있었던 그였지만 이 청년만큼 순수한 구난기사 신앙인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자신도, 이 청년에 비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전령일족의 지옥 같은 삶에서 남들의 웃음거리와 박해 속에서 살아온 자. 영혼 없는 불경자들 사이에서도 박해받던 이가 구난기사의 뜻을 품고 있었다니.
이다지도 기특할 수 없다.
만약 이런 아들이 있었다면 매 순간순간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었겠지.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자딘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몸의 원기는 지나치게 상해 있었고 찬 바람이 조금만 불면 고통에 신음했다.
그러나 그는 매일 밤, 플랑크가 두른 죽음의 한기에 맞서며 꿋꿋이 계속 밤을 지켜왔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었다.
아랑기의 초원은 따뜻하지만 그래도 가끔 눈이 내려 쌓인다.
눈 쌓인 광야,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 들려오는 곳에서 스승과 제자는 다시금 문답을 나누었다.
“자네는 죽어가고 있네.”
“네.”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살날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그런데 어찌 그리 담대한가?”
“이미 죽으신 분이 눈앞에 있는데 아직 살아 있는 제가 호들갑을 떨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하. 정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군. 자네 같은 제자가 있다면 스승도 할 만하겠어.”
“이미 제 스승이십니다.”
“그래. 그렇군.”
플랑크는 새로운 제자 아자딘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가 죽어가는 것을 안쓰럽게 여겼다.
“왜 죽음에 관대한가?”
“제가 살기 위해서는 기적, 아니면 네더의 사술이 필요합니다. 사술은 바라지 않고 기적은 감히 바랄 수 없으니 모든 이들이 자신의 숙명을 맞이하듯 기다려야겠지요.”
“그렇다면 왜 지금 수련을 하고 있는가? 과거에는 또 왜 그런 혹독한 수련과 사명을 견뎠는가?”
“저는 알디스의 자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라엘에게는… 보복하고 싶었지요.”
“보복? 아라엘이라면 그 자네의 누이 말인가?”
“예.”
“자네를 살려 달라고 내게 왔어. 보통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하. 그건 마지막의 마지막에 하는 일종의 회개 같은 것이지요.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오누이들보다 훨씬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
“저는 저의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밤은 어둡고 저는 갈 곳을 모르지요.”
“그런가. 그럼 왜 내게 이것을 배우고 있는가?”
“아직 제게 약간의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힘을 되찾으면 아라가사로서, 두령 하티르가 저지른 짓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속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미디암과 이스마일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자신들의 혈족마저 버렸는데 어떻게든 보상하지 않으면….”
“자네가 뜻이 드높을 때 그들은 자네의 뜻과 의기에 반해서 도운 것이니 그대는 뜻을 찾아야 하네. 그들은 자신들을 도울 노예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대의 의기에 반한 것이니까.”
“의기 말입니까?”
“그래. 자네의 표현 방식대로라면 별이라고 해도 좋을 테지.”
“…별이라.”
아자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게 어딘지 우스워서였다.
‘이 아이는… 불쌍하군. 아무것도 가져본 적이 없는데 오로지 책임만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구나. 나는 기사 된 몸으로 권력에 욕망을 가지다 제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는데 부끄럽구나.’
플랑크는 문득 자신이 왜 망자가 되어 광야를 떠돌았는지 깨달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플랑크가 칼을 빼 들었다.
“스승님?!”
아자딘은 경계했다.
플랑크 본인은 모르지만 그는 때때로 죽음의 기사로 발작을 일으켜 주위를 습격하곤 했다. 아자딘도 몇 차례나 습격을 당했었지만 그 사실을 플랑크 경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오늘의 플랑크는 맨정신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아자딘. 혹시. 구난기사가 되어 보지 않겠나?”
“네? 제가요?”
“그래.”
“아라가사인 제가 말입니까?”
영혼 없는 불경자, 아라가사.
휘브리스 대륙 모두가 꺼리는 저주받은 일족이 만약 구난기사가 되겠다고 찾아왔다면 플랑크는 쌍수를 들고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플랑크가 역으로 아자딘에게 구난기사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자네에겐 사명이 필요해. 하지만 황제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황제의 전령은 더 이상 별다른 사명이 되어주지 못하지. 그러니 구난기사가 되는 건 어떤가? 내가… 서맹을 해주겠네.”
“…서맹을 말입니까?”
“그렇네.”
“그건….”
아자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 알디스가 준 구난기사단의 서책을 보고 감동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구난기사단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것을 전해 준 알디스의 온정이 그를 지켜 주었다.
하지만 알디스는 죽고 아자딘은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래도 어린 시절의 꿈은 여전히 눈이 부신가? 별은 여전히 저 밤하늘 위에 빛이 나고 있는가?
“아라가사의 아자딘. 용기와 지혜와 자비의 대천사들의 이름으로 부르나니 부름에 응해 앉으라.”
“…스승님.”
아자딘은 진심이 된 플랑크를 보며 난처해했다.
이미 죽은 플랑크 경이다. 죽음의 기사로 수배까지 된 신세. 그가 서맹을 한다 한들 다른 사람들이 아자딘을 기사로 볼 리가 없다.
하지만 왜 플랑크가 자신의 기사 서임을 맡아주려 하는지 아자딘은 알 수 있었다.
플랑크는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그가 그 사명을 잃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물론 아자딘은 죽을 생각이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미디암과 이스마일을 돕고 하티르가 저지른 짓을 속죄한다.
간단히 말했지만 이것은 평생을 해도 다 하지 못할 중대한 사명이었다. 아자딘에겐 이미 사명은 충분히 차고 넘치는데도 플랑크는 고집을 부렸다.
그 마음이 이해되어서일까?
아자딘은 플랑크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앉았다.
“그대, 불의 앞에 용맹하며, 부지(不知) 앞에 겸손하며,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라. 세 미덕을 신실하게 지키며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숨 쉴 때까지 무예와 학문을 갈고닦으며 선을 행하겠는가?”
“예.”
“그렇다면 그대는 호스피탈러니라.”
플랑크는 천사들에게 기도하며 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아자딘의 양어깨와 머리를 검으로 짚었다.
“나 반릉의 플랑크가 지혜와 용기와 자비의 이름으로 그대를 기사로 임명하노라. 자. 소년이 앉고 기사가 일어난다. 일어나라 아자딘 경!”
“…….”
아자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스승님!”
“아.”
플랑크의 칼이 땅에 떨어졌다. 그의 손가락 끝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의 저주가 풀리고 안식이 그를 찾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
플랑크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떠올렸다.
“그렇군! 아자딘. 네가 내 운명의 예언의 기사였구나!”
“네? 스승님?!”
“고맙구나. 아자딘 경. 네 덕분에 나는 안식에 들게 되었으니….”
그리 말한 플랑크는 자신의 칼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 칼을 가져가라. 그걸 알아보면 구난기사단이 자네를 아예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야! 왜냐면 저건 천사의 피가 들어간 세라마이트 검이거든.”
“스승님….”
“그럼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아자딘 경!”
플랑크는 그 말을 남기고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눈보라 속으로 흩어졌다.
죽음의 기사 플랑크 경이 안식에 들어 소멸했다.
아자딘은 눈 쌓인 광야에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플랑크의 가르침대로 몸속 모든 마도서를 정리한 지금 아자딘의 내면은 평온했다.
그런데.
-두근.
심장이 맥동한다.
“음.”
아자딘은 졸지에 호스피탈러가 되어 버렸다.
물론 광야에서 죽음의 기사 플랑크 경에게 받은 서임이다. 누구도 아자딘을 구난기사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고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말해 봐야 미치광이 취급받을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위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두근.
아자딘은 자신의 몸에 따스한 힘이 감도는 걸 느꼈다.
분명히 천사의 손길 같은 것이 그의 몸 안에서 체온을 높여 주고 있었다. 구난기사의 힘이 아자딘의 안에 깃든 것이다.
“스승님도 내게 참 무거운 짐을 안겨주셨군.”
아자딘은 눈을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일단 이스마일과 미디암을 찾기 위해서 다시금 브투마 방향으로 가야 하나? 아니 하지만 그들이 이동했다면?
케림 산맥으로 돌아가 전령일족의 성역으로 귀환해야 하나?
아자딘이 그런 궁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두근….
“응?”
아자딘의 뇌리 안쪽에 어떠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누군가가 황제의 금화를 놓고 염원하는 모습이다.
황제의 목소리도 사라졌는데 어떻게?
“어?”
아자딘은 금화의 호출을 하는 이의 모습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구난기사들이다. 구난기사들이 황제의 금화로 전령을 부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거리는… 약 20리… 멀어.’
과연 그때까지 닿을 수 있을까? 지금 말도 없는데?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콰르르릉!
겨울의 눈보라를 뚫고 안개를 휘감으며 한 짐승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가슴에 끔찍한 네더 마법의 흔적이 남은 케림 산양이었다.
몸은 반투명해서 뒤가 비쳐 보이고 안개가 그 몸에 휘감겨 움직였다. 아자딘이 손을 뻗자 춥지도 덥지도 않은 수증기 같은 산양의 몸이 확실히 손에 잡혔다.
그리고 그 네더 마법의 흔적은….
“아라엘의 목소리? 살아 있었나?”
아라엘이 만든 인공정령, 아라엘의 목소리다.
아라엘이 죽으면서 소멸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아라엘의 목소리는 애초에 황제의 목소리를 본떠 만든 것이었다.
황제가 죽고도 황제의 목소리가 전령일족들을 돕고 통제했던 것처럼 아라엘의 목소리 또한 아라엘 사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
별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전령도 끝났고, 구난기사들은 타락했으며 사랑하는 알디스는 죽었다.
그러나 아자딘은 구난기사가 되었으며 황제의 목소리인지 아라엘의 목소리인지 모르겠으나 전령을 갈구하는 이들의 염원은 지금도 아자딘을 부르고 있었다.
영혼 없는 불경자가 구난기사가 될 수 있을까?
그 답을 아자딘은 모른다.
다만 그는 스승이 남겨준 세라마이트 장검을 집어 들고 누이가 남긴 안개 산양에 올라탔다.
별이 그의 머리 위에서 눈부시게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