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279
278.북제의 야망 2
순수와 낭만, 그리고 퇴폐와 향락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도시의 어두운 골목에서 동전 몇 닢이면 누구나 욕구를 해소할 수 있으면서 편지 한 줄에, 시 한 소절에 목숨을 걸고 사랑에 빠지는 이들이 있는 시대.
편지를 주고받자는 말에 이즈밀라가 당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람은… 어째서….’
지금까지 이즈밀라에게 다가온 이성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의 매력적인 용모, 젊음, 아름다움, 그리고 셀레스티얼로서의 기품에 매혹된 이들.
이즈밀라는 자신에게 다가온 그들을 거울삼아 자신을 바라본다.
천사의 피를 이어받은 셀레스티얼, 기사단의 명예이자 자존심이며 생체 병기.
끊임없이 그것을 자각하게 하였기에 이즈밀라는 그들과 교감을 나눌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호의를 거절할 뿐.
하지만 아자딘은 거울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처럼 이즈밀라의 모습을 반사하는 거울이 아니라 아자딘은 그 자체로 그였다.
항상 자신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서 이즈밀라는 처음으로 이성이란 존재를 의식했다.
그러나 아자딘은 그녀의 마음을 휘저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버밀리온 요새의 병사가 부르자, 그쪽으로 떠나고 있었다.
“그럼 편지하지. 이즈밀라 경.”
“아, 네….”
이즈밀라는 아자딘과 편지하겠다는 약속을 나누고 말았다
*********
자신이 이즈밀라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지 못한 아자딘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딸린 식구가 많으니 해야 할 일도 많다.
아자딘은 연금술 연구실로 향했다.
본래는 챕터마스터였던 헥센마이어 경의 사저였지만, 아자딘은 건물을 분할해 공식적으로 파이어글리프의 연금술 연구실을 만들었다.
그곳에 연금술사 자코모와 혈마법사 버나드를 두어 각종 연금 제품을 직접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오셨습니까? 아자딘 경.”
“작업은 순조롭게 잘 되고 있습니다. 진사에서 직접 수은을 만들어 그걸 기반으로 잘 팔리는 약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만들라고 했지만, 너무 무책임했던 것 같군. 뭘 만들고 있지?”
“보통 ‘아랑기안 매화’의 치료제죠.”
“아랑기안 매화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고?”
아자딘은 버나드의 말에 깜짝 놀랐다.
*********
아랑기안 매화는 휘브리스 대륙 너머에서 전해져온 성병이었다.
이 질병은 성병 특유의 빠른 전파속도로 순식간에 휘브리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제일 처음 발견된 곳이 아랑기 왕국이었기 때문에 ‘아랑기안 매화’라고 놀림받고 있었다.
물론 아랑기 왕국에서는 이 질병을 반릉치독이라고 부르며 반릉에 덮어씌웠고, 그렇게 두 왕국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후술할 일이 없었다면 계속 두 왕국이 신경전이나 벌이고 말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반릉 아카데미가 이 질병의 치료제를 개발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 치료제는 주기적으로 먹어야 하고, 매우 고가였기에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만이 살 수 있었다. 약값을 대지 못한 일반인들은 계속 성병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반릉 아카데미는 이 치료제의 가격을 계속 올려가며 폭리를 취하니, 이에 분노한 아랑기안 상인들이 왕에게 청원했다.
야에가스 신족의 피를 이어받은 신왕이 나서자 반릉 아카데미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질병의 공식 명칭을 아랑기안 매화로 확정 지으면 가격을 인하해 주겠다.’
이에 아랑기 국왕이 분개해 반릉 아카데미의 사절을 베어버림으로써 아랑기 왕국과 반릉 왕국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절을 살해당한 반릉 왕국의 드워프들은 드워프의 자랑인 사석포병대와 드워븐 소서러 부대를 이끌고 전선에 섰고, 아랑기 국왕은 명성 드높은 아랑기안 가드와 함께 직접 친정에 나섰다.
회전에서는 아랑기 왕국의 승리였다.
아랑기안 가드의 압도적인 돌파력 앞에 반릉의 드워븐 소서러는 뿔뿔이 흩어졌고, 패주하는 병사의 시체들로 들판이 메워질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아랑기 군의 승승장구도 거기까지였다.
첫 회전이 끝난 후 반릉은 자신들의 험준한 산악지형과 줄줄이 늘어선 요새에 틀어박혀 농성을 시작했으니, 아무리 강력한 아랑기안 가드라고 해도 반릉의 산세와 요새를 뚫을 수는 없었다.
지루한 공성전이 계속되면서 결국 아랑기 왕국은 반릉 왕국과 화평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승자는 회전에서의 대승리를 거둔 아랑기 왕국의 것이었으니 전쟁 배상금과 승리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아랑기안 매화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반릉과 아랑기는 같은 야에가스 신족을 섬기는 팔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원수가 되었으며, 두 왕국민 사이에서 아랑기안 매화는 금구가 되었다.
‘응, 전쟁에서 이긴 거 아랑기안 가드, 너희 반릉 놈들 쪽도 못 썼지요? 드워프 소서러 마법사 새끼들, 자기 목숨이 소중해서 싸우지도 않고 수염 빠지게 도망쳤다던데?’
‘어이구 승전비 세워서 좋으셨어요? 그런데 왜 아직도 그 병명은 아랑기안 매화일까? 응?’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서로 감정이 상할 말을 하다 나중에는 아예 주먹다짐하게 된다.
그런데 버나드가 바로 그 아랑기안 매화 치료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성병도 이제는 토착 질병이 되어서 독성이 약해졌고, 병에 걸려 죽을 사람들은 다 죽고 난 이후라 망정이지 한창때에 아랑기안 매화 치료제가 유출되었다면 전쟁이 나고도 남았으리라.
“대놓고 팔면 난리가 나겠군. 버나드. 대체 당신 정체가 뭐지?”
아자딘이 물어보자 대답한 것은 놀랍게도 아자딘을 뒤따라 들어온 하프 뱀파이어 수녀, 니셀다였다.
“제 아버지이지요. 오래간만입니다. 아버님. 저를 아시나요?”
“그 모습은… 그렇군. 네 어머니를 빼닮았구나. 니셀다.”
버나드의 말을 들어보니 이들 부녀는 매우 오래간만에 보는 듯했다.
“많이 늙었군요. 아버님. 한때는 반릉 제일의 미남자라 불리던 분이었을 텐데.”
“그러는 너는 많이 컸구나.”
버나드는 그녀를 알아보고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녀간에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자리를 비켜 줄까?”
“아니. 아닙니다. 아자딘 경.”
버나드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를 요청하는 듯한 간절한 시선으로 아자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자딘은 못 본 척 자코모와 함께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부녀간에 진솔한 대화를 나누게.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
“아자딘 경!”
평상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버나드였지만, 이 순간 그는 정말 간절하게 아자딘의 도움을 바랐다.
그러나 아자딘은 매정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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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코모. 버나드는 어떤 놈이지?”
“반릉 최고의… 미남자였었지요.”
“미남자?”
“지금은 저래 보여도 젊었을 때는 미남이었답니다. 반릉 아카데미는 드워프들이 지배하고 있으니 높은 자리에 오르진 못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물도 뛰어나고, 재주도 좋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지요.”
“그래? 의외로군.”
“본래는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만, 딸을 구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소장하고 있던 약재를 훔친 죄로 저희와 같은 연금 노예 신세가 되었지요. 저도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일 뿐이었는데, 설마 그 딸이 니셀다일 줄은 몰랐군요.”
자코모의 말에 따르면 젊은 시절 잘 나가던 버나드는 니셀다를 구하기 위해 반릉 아카데미의 희귀한 약재를 훔쳐 썼다. 그 죄로 연금 노예가 된 후 자코모 일당과 함께 탈출해 지금에 이른 것 같다.
“당신도 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지? 처지가 비슷하니 동병상련을 느꼈겠군.”
“네. 그러던 차에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세상이 참 좁군요.”
“아랑기안 매화의 치료법도 알고 있는데 왜 아랑기 왕국에 투신하지 않았을까? 한창 그 병이 유행할 때 전향했다면 보상이 엄청났을 텐데?”
“아자딘 경은 왜 이런 오지에서 별 볼 일 없는 호스피탈러 에란트로 계십니까? 제가 보기엔 그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 같습니다만? 그렇게 다 제각각의 사정이 있는 법이지요.”
“하기야.”
버나드는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이 고대신의 피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담백하고 침착한 성격의 이 마법사는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 전부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진실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성문이 곧 닫는다는 저녁 시간을 알리는 시종이었다.
“이런, 저녁 연회에 참석하러 가야겠군. 버나드에게는 잘 말해주도록.”
아자딘은 저녁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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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무렵 아자딘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칼린츠 왕자의 연회장은 파이어글리프 도시의 번화가 한복판에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유흥가로 보이는 곳의 언덕을 따라 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고급스러운 가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본래는 부유한 향락객을 위해 만들어진 최고급 건물로, 가장 비싼 객실은 파이어글리프의 저수지를 바라보는 누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드높은 누각에서 주위의 자연 풍광을 즐기며 향응과 요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진 사치스러운 공간이 칼린츠 왕자가 택한 연회장이었다.
‘호스피탈러가 주최하는 연회 장소를 이곳으로 잡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없던 편견이 생기려고 하네. 이거 참. 내가 남에게 편견을 가질 입장이 아닌데.’
전령일족이면서 구난기사단의 성기사가 된 아자딘이다. 남들에게 편견을 가져선 안 될 입장이었지만, 성기사들의 연회를 향락의 공간에서 개최한 칼린츠 왕자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연회장 자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었으니….
아자딘이 들어선 연회장에는 왕의 교회의 기사들이 시립해 있었다.
“아니….”
아자딘은 그렇게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왕의 교회의 기사들 사이에서 익숙한 인물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황제의 전령인 당신이 구난기사단의 일원이라고 이 자리에 와 있는데 저희라고 오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자딘 경?”
“…….”
이단심문관 젝트, 코라사르 왕국에서부터 아자딘을 추격하며 신왕진서를 노리던 이단심문관이다.
사악한 네더 마법을 다루며 왕의 교회의 성기사들을 언데드로 만들어서 부렸던 명실상부한 암흑마법사.
그런 남자가 이역만리 떨어진 차드라 고원에서 다시금 아자딘과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