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294
293. 셀레스철 파이어 7
적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해 떠났던 정찰병들이 속속 돌아와 보고했다.
“못해도 사백은 될법한 부대가 북쪽 제재소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서쪽 역시 사백쯤 돼 보이는 브리 병사들이 축사를 습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돼지들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북서쪽에서도 삼백, 아니 사백쯤 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규모의 병력이 셋으로 쪼개져 마을들을 약탈하고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병사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일단 천 이백이라는 숫자부터 압도적이다.
이 정도면 작은 백작령 정도는 멸망시킬 수도 있는 병력이다.
게다가 이 움직임이 문제다.
군략에 무지한 병사들도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렇게 정확히 병력을 쪼갰다는 건 브리들이 그저 약탈을 위해 모인 야만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지시하에 움직이는 조직된 군대라는 것.
게다가 지금 보이는 병력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었다.
후속 부대나 예비부대가 편성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아자딘 경.”
아라미스는 아자딘을 불렀다.
“히포그리프가 날 수 있겠지?”
“물론.”
“그렇다면 혹시 파이어글리프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겠나?”
“요청이야 할 수 있다만. 파이어글리프로 가는 길은 적들의 병력으로 차단되어 있어. 구조가 올 수 없을 거야.”
“그 반대다. 파이어글리프에서 병력이 나오면 우리가 오히려 저들을 앞뒤로 포위하는 셈이 되니까. 적들을 포위 섬멸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뭐?”
순간 아자딘은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을 뻔했다.
파이어글리프의 병력을 싹 끌어모으면 천여 명 정도 될 것이다. 하지만 브리의 숫자는 그 이상인 데다가 빽빽한 삼림지대인지라 인간들의 장점을 살리기 힘들다.
아라미스는 앞뒤로 포위해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쓰자고 하는데, 파이어글리프의 병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라미스 휘하의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무슨 망치나 모루가 된단 말인가?
“무리입니다!”
“포위 섬멸이건 망치와 모루건 간에 전선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대등한 숫자여야 합니다.”
고참병도, 종사들도 아라미스의 제안에 놀라서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가? 우리가 정의이고 상대가 악인데도 안된단 말인가?”
“그건….”
“으음.”
다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왕의 교회처럼 경직된 곳이라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었다.
‘질 거라고 재수 없는 소리를 하다니? 군법으로 다스려지고 싶냐? 이기고 지고는 너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상관이 들이받으라면 백만대군 앞에도 들이받아야지.’
부하들의 사적인 판단을 거부하는 교조적인 발언이다.
하지만 아라미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진심인가?”
“…내가 실례를 범했나 보군. 아무래도 나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라미스는 난처해하며 머리를 갸우뚱했다.
‘마치 어린아이 같군. 그러고 보면 이즈밀라도 세상 물정을 모르곤 했었는데. 물론, 이즈밀라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설마 모든 셀레스티얼들이 다 이런가?’
왜 기사단이 셀레스티얼의 존재를 베일에 감추고, 비밀로 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라미스 경. 실례지만 나이가?”
“왜 묻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대답해선 안 되는 비밀인가?”
“그렇다기보다는… 곤란하군. 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 지혜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아니 반대지. 그대의 나이가 어리니까 지혜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언행에서 지혜를 의심케 하니까 나이를 물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주위 기사들이나 종사들이 말문이 막혔다.
그들은 겁이 나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아자딘은 대놓고 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무슨, 나를 모욕하는 건가?”
“모욕으로 느껴졌다면 용서하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지혜를 긁어모으다 보니 무례를 범했나 보군. 그런데 혹시 근처에 다른 셀레스철 파이어 병력이 있나? 당신들만 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자딘은 아라미스의 감정이 발화되지 않도록 말을 돌렸다.
“남쪽 새클턴에 단장님이 와 계시지.”
“단장?”
“셀레스철 파이어의 단장 카르나 경을 말하는 것이다.”
“카르나 경. 그가 여기 와있다고?”
아자딘은 그 말을 듣고 눈을 빛냈다.
애초에 이건 셀레스철 파이어의 단장 카르나에 대해서 조사하기 위해서 출발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니.
‘아니 기왕이면 세인트 말로리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면… 그래도 지금은 내 사사로운 욕구를 앞세울 때가 아니지.’
아자딘은 아라미스에게 물어보았다.
“카르나 경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파이어글리프에 원군을 요청하는 건 카르나 경과 합류한 다음에 하도록 하고.”
아라미스는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은 아자딘의 제안을 환영했다.
“좋아 그럼 단번에 가볼까?”
아자딘은 내친김에 바로 이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아자딘의 제안에 다들 반대하고 나섰다.
“네? 지금 말이오?”
“다들 연이은 전투로 지쳐있는데.”
“지쳐있는 건 알겠지만 브리 놈들이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적 정찰병이 없었네만?”
“정찰병이 아니라 조금 전에 죽은 드라이어드에 브리 술자가 빙의되어 있었다. 당장 이동하지 않으면 위험해.”
아자딘은 지금 당장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들 아자딘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버려두고 가잔 말인가?”
“맞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지쳐있는데….”
“군마를 이용해서 수레를 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도 데리고 탈출할 수 있을 거야.”
아자딘은 기사들은 하마해서 이동하고 기사들의 군마로 수레를 끌자는 제안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깜짝 놀랐다.
“아니 어디 천한 것들을 위해 기사가 말에서 내립니까? ”
“저희는 저들을 구조해 주는 것만으로도 삼위의 대천사가 내린 신성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자딘 경. 아무래도 당신은 기사단으로서의 경험이 일천하여… 기사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시간이 부족했나 보군요.”
“전령일족으로서의 재주는 뛰어나다는 건 알겠지만… 기사의 소양은 영.”
아라미스에 대항해 피난 가자고 할 때는 한편이었던 기사들이 이번에는 아자딘의 제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휴식을 좀 취하면 저 야만스러운 브리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소. 굳이 귀한 군마로 짐짝을 끌게 하면서 농부처럼 이동할 수는 없소.”
“아니 젠장. 왕의 교회의 성기사들도 아니고 당신들이 무슨….”
아자딘은 그렇게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세간에서는 왕의 교회의 성기사를 구난기사단보다 더 강력한 성기사로 여기고 있었는데, 아자딘이 그만 구난기사단 안에서 그런 세간의 평판을 그대로 드러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이렇게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들이 이렇게 반대하는 이유를 아자딘은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농부들을 멸시하는 것도 멸시하는 거지만, 진짜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말에 타고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서 도망칠 수 있는데, 말에서 내리면 모든 피난민, 부대원들과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
브리들이 기사나 귀족이라고 딱히 생포해서 몸값을 받아줄 것 같지도 않으니, 기사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아자딘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젠장. 이건 또 이것대로 짜증 나네. 차라리 적이면 조져버리고 명령권을 빼앗을 텐데.’
차드라 고원에서 아자딘은 자신을 적대하거나 음해하려는 세력들을 분쇄하고 지휘권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아라미스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인물이다.
비록 이런저런 부족한 면이 있긴 해도 아라미스 정도면 전령일족인 아자딘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인물이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인물을 실각시키고 그 실권을 빼앗는 것은 정당방위지만, 호의적인 인물마저 무너뜨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악행이다.
결국 아자딘은 자신에게 협력적인 자경단원들과 함께 마을의 수레를 모으고, 식량 등을 실어서 피난 준비를 먼저 해두는 작업에 착수하는 정도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
구난기사단의 단원들이 아자딘의 제안을 반대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야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자딘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 한 합리적인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지, 결코 브리의 위협을 얕잡아 본 것이 아니다.
“야, 불침번 잘 서라.”
그래서 기사들은 종사들에게 명했고.
“병사들끼리 로테이션으로 불침번 서도록.”
종사들은 병사에게.
또 병사들은 서로의 지위와 연배를 놓고 서로서로 미루었다.
결국 자경단원과 제일 경험이 적은 병사가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올 무렵,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자정 넘어서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그리고 그 부슬비가 기척을 지워주는 틈을 타 브리의 척후가 마을에 침입하다 알림줄에 걸렸다.
-덜커덕!
아자딘이 피로에 찌들어 지금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병사들과 마을 주민들을 닦달해서 마을 곳곳에 깔아둔 알림줄이었다.
“브리들을 보아하니 신체 구조상 낮게 이동하기 힘들 테니 이 높이로 알림줄을 깔도록!”
브리들의 다리는 뛰어난 도약력과 빠른 이동속도를 보장하지만, 그런 만큼 방향전환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머리에 난 뿔은 포복이나 쭈그려 앉기를 힘들게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밧줄에 금속 솥, 냄비, 프라이팬이나 소리 잘나는 도기 조각들을 연결해 보강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그게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빗소리 때문에 식기가 내는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잡은 알림줄에 뭔가 걸린 것을 알아챘다.
“적습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브리들의 투창 공격이 시작되었다.
*********
아자딘도 졸다가 잠에서 깼다.
“이런. 개자식들.”
이 시간에 쳐들어온 브리에 대한 욕설인지, 아니면 그렇게나 이동하자고 했는데 끝끝내 아자딘의 주장을 무시하던 기사들에 대한 욕설인지 모르겠다.
“몸이 무겁군.”
평소에는 아라엘의 목소리를 경계로 세우고 푹 잤었는데, 이번엔 아라엘의 목소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잠을 얕게 잤더니 자도 전혀 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움직여야 했다.
아자딘이 건물 밖으로 나와 보니 숲길과 강 너머로 브리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못해도 팔백, 그러니까 2개의 혼성부대가 몰려온 것이다.
“망했군.”
어지간하면 사기 떨어지는 소리는 안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찮다.
아자딘 자신이야 살아서 도망칠 수 있더라도 이 마을 사람들, 그리고 병사들은 몰살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기사들이 말을 타고 도망쳐 봤자다.
마을 중앙에는 돌을 깔아서 비가 와도 말발굽이 안 빠지지만, 숲은 진창이 되어 말을 타고 도망칠 수도 없을 테니까.
물론 브리의 발도 발굽으로 되어있으니 그들의 기동력도 저하되겠지만, 같이 기동력을 잃으면 손해 보는 건 어디까지나 숫자가 적은 쪽이다.
아자딘도 이제는 신념의 기로에 섰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인가? 아니면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