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30
29. 성기사들의 학살 6
전령일족과 나눈 약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판결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길가의 돌에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을 어긴 죄로 처벌해야 하는가?
전령일족과의 약속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길가의 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이들이다.
아니 길가의 돌이라면 감히 왕화의 빛을 어지럽히지 않으니 황제 추종자인 그들은 길가의 돌보다 훨씬 질이 나쁜 쓰레기들이다. 그런 쓰레기들과의 어떤 진지한 약속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약속을 어기건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건 그 대상이 전령일족이라면 면책한다.
이렇게 휘브리스의 백성들은 전령일족들을 영혼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며 명예와 법률이 응당 보여야 할 최소한의 원칙조차 거부한다.
그런 판국에 아자딘이 그들에게 약속한다 한들 정말 그들이 참회기사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자딘은 휘브리스의 백성들을 동정했다.
“휘브리스 백성들은 휘브리스의 원칙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해지겠지. 여기 사람들은 성기사에게 보복하기를 선택한 대가로 농장을 버리고 도망가야 한다. 그건 매우 고달픈 삶이 될 거야. 그러니 그런 결정을 내가 내릴 수는 없지.”
“그런 것치고는 성기사들을 죽이기 싫어하는 것 같더군요.”
이스마일이 물어보자 아자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적과 싸우다 힘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할 때면 모를까 내가 이길 거 빤히 아는 상대들을 죽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불필요한 살인을 해야 하니까.”
“…….”
절대적인 자신감이다. 왕의 교회의 성기사를 상대로는 황제의 전령들도 이런 자신감을 보이기가 쉽지 않은데.
실제로 왕의 교회의 성기사들은 미디암이나 이스마일이 쏘는 화살을 귀신같이 쳐냈고 아자딘이 던지는 투창도 눈에 보이면 피해냈다. 투창에 맞은 수련기사는 후방에서 기습당해서 걸렸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은 이런 성기사들을 상대하면서도 그런 여유를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유랑민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 고되니까 가급적 휘브리스의 제도와 법 아래에서 처리할 수 있길 원했다 그거군요?”
“그렇지. 음, 그런데 장례가 다 끝났는데 이 녀석은 어디 갔지?”
잠시 후 농장에서 도망갔던 타르키가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돌아왔다.
“아, 저기 끝났나 보군요.”
“또 돌아왔네요? 그대로 도망칠 줄 알았는데.”
“아니 그 제 입장상 왕의 교회의 성기사와 싸울 수는 없어서.”
“그런 식이면 저희랑 함께 다니는 것도 곤란하지요.”
미디암이 신랄하게 비난했다. 황제의 전령과 다니는 것도 불경죄라고 죽이려 드는데… 타르키의 입장상 아자딘과 함께 여행하는 것도 안 좋을 것이다.
미디암이 그걸 따지자 할 말이 없어진 타르키가 머쓱해했다. 사실 타르키가 아자딘과 함께 행동하려 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해 줄 용병단이 사라진 지금, 혼자서 여행하다가 노상강도나 마물, 심지어는 다른 이복형제들의 암살자를 만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자딘에게도 타르키가 필요했다.
‘이 녀석의 모친이 황제의 금화를 제공했지? 게다가 그 용병단도 고용했다. 조사할 필요가 있어. 더구나 어쨌건 그는 금화의 청원자가 되었으니 적어도 우리를 쉽게 배신하진 못할 테고. 성기사들과의 교전을 피한 거야 뭐 휘브리스 귀족이니 어쩔 수 없겠지.’
아자딘은 타르키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시를 내렸다.
“일단 최대한 정비를 마무리 짓자. 씻고 옷 갈아입고… 화살들 줍고. 이거 세탁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아자딘은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수습하는 동안 최대한 정비를 하도록 했다.
*********
농장의 생존자들은 돈 될 만한 것들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의 교회의 성기사들을 죽이는 데 가담했고 전령일족인 아자딘과도 거래를 했으니 더 이상 이 농장에 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야!”
양을 치던 어린 소녀가 문득 아자딘을 비난했다.
“당신들이 우리 농장에 오지 않았다면! 엄마 아빠가 죽을 일도 없었어!”
“쉿.”
오빠로 보이는 청년이 소녀의 입을 막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어린아이라서 그만….”
농부의 아들이 겁에 질려서 아자딘의 눈치를 살폈다. 소녀가 비난한 것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자딘은 소녀의 발작적인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어쩔 건가요?”
미디암이 농민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녀의 순수한 호기심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탓이었다.
“인근 친척집으로 가서 피신해 있을 겁니다. 결혼시킬 수 있는 아이들은 결혼시키고 취직시킬 수 있는 애들은 취직시키고. 밭은… 어차피 가뭄이 점점 심해져서 더 경작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니까요.”
농부의 아들은 자신들이 가려는 방향을 가리켰다. 남서쪽, 살라스마와 반대되는 길이다.
“그럼 여기서 갈라져야겠군요.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전령께 황제의 축복이 있기를.”
농부의 아들이 그리 말하자 어린아이들이 기겁해서 자신들의 형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예의상 황제의 축복을 언급한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휘브리스 백성인 아이들에게는 두렵고 황망한 일이었다.
[백성들이 날 무슨 역병처럼 대하고 있군. 나는 백성들에게 문명과 지혜를 갖도록 노력하였는데 말이다.]황제의 목소리가 저들의 반응에 억울해했다.
“후계 구도를 정하지 못한 권력자는 아무리 성군, 현군이래도 욕먹어 싸지.”
[그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내가 이룩한 한 세대의 평화만 해도 값진 것이다. 하물며 야에가스 신족의 한 세대는 정말 길지.]“그러시겠지요.”
*********
아자딘 일행의 현 위치에서 살라스마로 향하는 길은 북쪽으로 가는 길과 서쪽으로 가다가 코라사르 전역을 관통하는 회색강을 따라 북상하는 두 가지 루트가 있다. 아자딘은 서쪽으로 가서 회색강을 따라 북상하는 루트를 택했다.
“약간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난민들이 이쪽으로 많이 이동할 테니 사람들 사이에 묻어가기도 좋고, 강물의 수량이 얼마나 줄었는지 보면 가뭄이 어느 정도 극심한지 알 수 있겠지. 전령으로서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
아자딘은 루트를 정하고 난 후 길을 따라 걸었다.
‘사막의 등뼈’ 산맥 동쪽은 가뭄의 영향을 덜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도 가뭄의 영향이 느껴진다. 아직 봄인데도 가도 곳곳의 길가에 풀과 나무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타르키는 아자딘이 성기사들과 싸울 때 도망간 게 마음에 걸리는지 더더욱 열심히 아자딘에게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이야 대단하십니다. 왕의 교회의 성기사들은 수련기사일 때가 오히려 팔팔하고 기운이 넘친다는데 그들을 다 처치하다니.”
“보긴 봤어요? 어떻게 싸우는지?”
미디암이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 그,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느라 못 봤나 보군요.”
“윽.”
소녀가 자신을 비난하자 타르키는 당혹스러워했다. 원래 성격 같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지금 그의 입장으로는 전령일족의 높으신 신분이라는 티를 팍팍 내는 미디암에게 함부로 성질을 낼 수 없었다.
“음, 좀 조용히 해라. 피곤하니까.”
아자딘의 경우 무장이나 장비를 많이 싣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케림 산양에 타면 부하가 너무 많이 걸린다. 그래서 고삐를 잡고 걸어가는데 아무리 아자딘이 보통 사람들보다 체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최근 계속 전투를 거듭했으니 피로가 쌓여 있었다.
“다른 행인들도 많으니까 허튼소리는 하지 마라. 성기사를 처치했느니 뭐니 그딴 소리 하면….”
아자딘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아자딘 일행에게 한 상인들이 호객을 시작했다.
“거기 길가시는 분들. 차라도 한잔 하십시오.”
길거리에서 차를 파는 행상이었다.
차는 팔왕국 전 국토에서 인기 있는 음료다. 아니 그보다는 생활필수품에 가깝다. 몇몇 물이 맑은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석회질이나 불순물들이 많아서 그냥 마시면 병이 들기 십상이었다.
찻잎을 넣고 물을 끓이면 물의 석회질이나 불순물들이 찻잎에 들러붙어 물이 정화되어 마실 만하기 때문에 야에가스 신족들은 차의 재배와 음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래서 길가에 보면 여행객에게 차를 끓여주고 돈을 받는 행상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람 한 명이 지고 다닐 만한 물지게 같은 것이 구비된 포장마차에 화로를 걸고 거기서 찻물을 끓여 차를 우려낸다. 개중에는 간혹 사탕쑥을 넣어 만든 과자를 파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아자딘 일행에게 호객하는 상인의 포장마차에는… 코라사르 보부상 조합의 작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자자, 길이 멀고 물은 별로 없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그는 포장마차에서 아주 작은 나무 의자들을 꺼내 길가에 놓았다. 아자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상인이 타르키 쪽을 힐끔거렸다.
“저 기사님은?”
“금화의 청원자다. 괜찮아. 정보가 유출될 일은 없다.”
아자딘은 그렇게 단언했다. 금화의 청원은 굉장히 강력한 서약 마법의 일종으로 그 마법을 사용한 이들은 전령일족을 자의적으로 배반하지 못 한다. 전령일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타르키처럼 민간인을 약탈하던 놈을 아자딘 성격에 참아줄 리가 없지 않은가?
“아, 그렇습니까?”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상인의 표정이 굳었다. 더 이상 영업용 미소를 지을 필요 없다는 안심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3개월 전 갑자기 절차도 무시하고 전령이 되신 분, 어디로 가십니까?”
노골적으로 빈정거린다. 본래 전령일족이 인사이동을 하는 것은 2년에 한 번씩 있는 하지 축제 때다.
그때 늙거나 다쳐 더 이상 전령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은퇴하고, 임무 중 사망하거나 은퇴한 이들로 인해 생기는 빈자리를 젊고 유능한 이들, 혹은 전령의 종사들로 추천을 받은 이들로 채워 넣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자딘은 그러한 절차를 무시하고 특례로 3개월 전에 전령이 되었다. 전령일족의 장로 카자스의 적극적인 추천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본디 아자딘은 배반자의 자식이며 전령일족들 사이에서 낙오자, 무능력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오죽하면 우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아자딘에게 시집 보낸다’라는 으름장이 먹혀들겠는가?
그래서일까? 하인 계급에 불과한 이 찻집 행상도 아자딘에게 빈정거린다.
‘아자딘의 실력을 보면 그렇게 무시하지 못할 텐데.’
미디암은 그리 생각했지만 그녀 또한 아자딘의 실력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 얼마나 미숙했느냐는 소문만 일족들 사이에서 계속 전해지고 있으니 하인들조차 그를 무시하는 것이다.
“살라스마로 가는 중이다. 뭔가 일이라도 있나?”
“네. 거절하셔도 무방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미 지역장님의 임무를 많이 거부해서 미운털이 박히셨다면서요? 아니 지역장님 임무를 거절하려면 뭐 하러 전령하십니까?”
“황제의 금화 일을 하느라.”
“하하. 금화 일이 그렇게 많이 있지도 않을 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