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374
373. 모독의 성왕 2
“왜요? 배가 불러서? 아니면 그겁니까? 당신이 주장하던 대로 어떤 왕이나 신이, 영웅이 사람을 구할 게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미덕을 수양해서 그 결과 자신들을 구해야 하니까?”
지벡은 꽤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아자딘이 구난기사단의 소위 말하는 수양학파에 속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천사의 피를 숭배할 것이 아니라 미덕을 지키고 민중 각자가 무예와 학문, 미덕을 갈고 닦아서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 수양학파의 믿음.
그것은 분명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믿음이지만 실제로 신과 악마가 배회하는 세계에서 갖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믿음이기도 했다.
당장 눈앞에서 네더의 마신들이 사람을 찢어 죽이고 있는데 어느 세월에 수양을 쌓아서 스스로를 구한단 말인가.
“어이쿠. 지벡. 날카로운데. 무서워.”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아자딘 백작. 저는 당신을 존경했고 지금도 존경합니다만, 이 위대한 기적을 걷어찬 당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군요. 지금 당장 당신을 찌르고 대신 제가 그 기적을 대신할 수 있다면 할 겁니다. 웃지 마십시오. 뭐 잘했다고 웃습니까?”
“아니, 이건 웃는다기보다는 난처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웃는 게 마음에 안 들면 뭐 엉엉 울까?”
“그것도 안 됩니다. 아예 표정을 짓지 마십시오.”
“그건 무리한 요구인데.”
아자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가면을 썼다.
“쓰지 마세요!”
“어쩌란 거야?!”
아자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말라는 지벡의 막무가내의 요구에 당황했다.
“저도 제 마음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칼로 토막 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자딘 경. 당신은 설마 수양학파의 이념을 위해서 이 기적을 거부했단 말입니까?”
“아냐, 딱히 내가 수양학파라서 거절한 것은 아니야. 나는 왜 반릉이냐는 거지.”
“무슨 말입니까?”
“반릉에 왕화의 빛을 펼쳐봤자 백성들을 구할 수 없어.”
아자딘은 그렇게 단언했다.
“네?”
대체 이놈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지벡은 이제 아자딘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차라리 수양학파라서 거절했다면 미워하더라도 이해는 갔을 텐데, 지금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자딘은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반릉에 왕화의 빛을 펼치고 그 안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쳐도 이곳은 척박한 땅이야. 평소에서 식량을 수입해 오는 곳이지. 사람들이 겨울을 피해 이곳으로 몰려들어도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차드라라면 모를까 척박한 반릉의 왕좌로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지킬 수 없다.
“야에가스의 영들은 그것을 선별이고 교훈이라고 했다. 그들도 왕의 교회와 야에가스 신왕족들이 타락한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그에 걸맞은 벌을 내리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영원히 족쇄가 될, 교훈을 남기고 그 후에 새로운 약속을 내리려 했지.”
“당신은 그것에 반대했다는 말이로군요. 흠.”
지벡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반대했습니까?”
“나는 야에가스의 신령들에게 말했지. 아무리 매질하고 교훈을 준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연히 잊기 마련이다. 삼위의 대천사가 인류를 위해 희생했어도 몇 세대 가지 못했고, 야에가스의 신령들이 인간의 육신을 빌어 그들의 화신을 남겼어도 결국 타락하는 판이다. 신들의 개입은 이 휘브리스를 여러 신족들의 각축장으로 만들 뿐이다. 쿠르트 판테온이, 판테온조차 갖추지 못한 네더의 이형신들이 지속해서 노리는 판에 가끔 찾아와서 매질하고 기적을 던져준다고 사람들이 바뀔 리가 없지 않느냐.”
“…….”
“구난기사단의 수양학파와 야에가스 신앙을 합쳐서 통합하고 싶다. 스스로 구원하고, 신령과 천사들과 협력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성장시키고 싶다. 단순히 신을 숭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과 천사들조차 한계를 가질 때 그들을 조력하는 별격의 인격과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그것은 오래전 삼위의 대천사가 이미 인간에게 알려준 진실이고 구원이었는데, 그것을 실천하고 싶다. 야에가스 신령들이 만약 이것에 동의한다면 이것을 왕의 교회의 새로운 약속으로, 신약의 교리로 삼고 싶다.”
아자딘은 오랜 소망을 말했다. 놀랍게도 그런 점에서 아자딘은 북제와 닮아있었다.
구난기사단과 왕의 교회의 신앙의 통합.
인간의 의지를 하나로 합쳐 계속해서 덮쳐오는 악신의 무리에게 대항해 인류의 힘을 집결시키고 싶다는 욕망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왕이나 대귀족, 그게 아니더라도 이 세계의 역사와 향후의 미래에 대해서 고뇌하는 이라면 결국 도달할 결론.
다만 아자딘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조차 거부할 수 있고, 북제 코헨 라이오네어는 수단이 어찌 되었건 결과를 자기 손으로 거머쥐려 한다.
그런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지벡은 아자딘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차라리 북제의 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야에가스의 신령들을 영접하는 영광된 자리에서 이런 개소리를 했다는 걸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 왕좌를 부수고 일어난 겁니까? 좋게 말하면 그렇지만 나쁘게 말하면 결국 당신이 구난기사단 신앙자이기 때문에, 수양학파 신앙인이기 때문에 명백한 기적을 거부하고 왕좌를 파괴한 겁니다. 끔찍한 이단 행위입니다.”
“내가 부순 게 아니라니까. 정확히는 야에가스의 신령들이 부쉈다.”
“왜요?”
“야에가스의 신령들의 뜻이 갈라졌어. 일부는 내게 긍정했고 일부는 내 뜻을 부정했다. 내 뜻을 긍정하는 이들은 나에게 그 뜻을 펼쳐보라고 신왕진서를 넘겨주면서 이 축복의 힘을 주었고, 내 뜻을 부정하는 이들은 내가 이적과 기적의 증표를 가지고 있어서 결국 야에가스 신앙의 권위로 그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을 싫어했지. 이미 야에가스 신령들이 선택한 성왕의 징표를 갖게 되었는데 옥좌마저 멀쩡하면 왕의 교회 사람들은 내가 그 어떤 헛소리를 해도 나에게 굴종할 거 아냐? 그래서 그들은 옥좌를 부쉈다.”
“…당신이 성왕이란 말입니까?”
“부끄럽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아자딘이 자신의 머리쪽을 가리키자 다시금 성스러운 헤일로가 나타났다.
“…하아.”
지벡은 자기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아니, 왜 쉽게 갈 수 있는 걸 이렇게 어렵게 가는 겁니까. 왕화의 빛의 매개로 죽는 게 걱정이면 차라리 그 점을 합의해서 어떻게 했어야지, 왕좌를 부숴버리고 새로운 교리를 들고 와서 이게 신약이라고 선포할 셈입니까? 미쳤습니까? 저 에디르를 보십시오. 당장 눈앞에서 목도한 사람도 저 난리인데….”
“그래도 재밌고 보람찬 일이 될 거야. 지벡. 왕의 교회 출신인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나에게는.”
“…처웃지 마십시오. 뭘 잘했다고 처웃습니까. 쳐버리고 싶게!”
지벡은 미소 짓는 아자딘을 보면서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
간신히 분노를 다스린 지벡을 설득하고, 에디르는 그냥 묶어둔 채로 산의 심장 요새를 벗어났다.
아자딘 일행이 나온 곳은 셀레스철 파이어 기사단이 침공했던 해안 쪽이 아니라 북쪽, 케림 산맥 방향의 옛 폐광이었다.
“음… 본래라면 이곳에 아케나르 주교님이 계실 겁니다만.”
버나드는 혈마법으로 아케나르 주교에게 위치각인을 해두었다. 가까워지면 그녀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간단한 마법이었는데 어째 아케나르 주교가 보이지 않는다.
“저기 저거 아닌가요?”
니셀다는 폐광의 부러진 기둥을 가리켰다.
부러진 기둥에 아케나르 주교의 옷이 걸려있었고 그 주위로 재가 흩어져 있었다.
설마 아자딘이 왕좌에 앉을 때 발현한 왕화의 빛이, 뱀파이어인 그녀를 태워버린 것일까?
“아, 맙소사.”
아자딘은 다가가서 그녀의 옷을 살펴보았다.
그 옷과 잿더미 주위에는 한 장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아케나르 주교의 필체로 쓰인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자딘은 편지를 들어 읽어보았다.
*********
아케나르 주교, 치타이의 공주로 태어난 하월은 순진무구한 소녀였다.
동화책과 연애소설을 읽고 다가올 사랑을 동경했다.
그러나 수녀와도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는 사춘기가 되어서도 부친과 궁궐의 내시들을 제외한 성인 남성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사교 무대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아랑기의 사절로 방문한 스람 왕자는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그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스람 왕자는 하월 공주를 자신의 배필로 맞이하게 해달라고 부왕에게 간청한 것이었지만, 아랑기의 왕 카르나고 4세는 하월 공주를 자신의 비로 맞이하겠다는 뜻을 치타이 왕국에 내비쳤다.
아직 10대 중반에 불과한 어린 소녀의 운명이 그렇게 편지 몇 통으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교적 양호한 것이었다.
신의 피를 계승한 왕족은 다른 이들보다 오래 살았고, 오랜 세월 유지되는 젊음은 왕성한 성욕과 그에 뒤따르는 많은 자손을 낳았다.
자식을 총애하는 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왕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야에가스의 왕자들은 자신의 숙명에서 도망쳐 모험가 혹은 셀소드가 되던가 아니면 교회에 귀의해 성기사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싸워서 자신의 운명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어서 소모될 뿐.
치타이의 공주 하월은 너무 어리고 순진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
하월은 왜 사람들이 자신을 동정하는지 몰랐다.
자신보다 열 배는 더 오래 산 왕과 결혼해 왕비가 되는 것은 물론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실제 나이와 달리 아랑기의 왕은 야심만만한 미청년이었다.
30세만 되어도 햇볕에 그을리고 기생충과 질병에 시달려 바싹 늙어가는 범속한 인간들과 달리 신의 피가 흘러서 100세가 넘어도 청년의 모습을 유지하는 아름다운 존재. 부와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고귀한 혈통의 왕.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배우자였다.
100년을 권력자로서 살아온 이의 영혼이 어떤 색으로 물들어 있는지, 아직 10대의 소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지의 대가는 아주 비싸게, 그녀의 몸과 인생으로 치러야 했다.
*********
“절 보고 지금, 구난기사단으로 출가하란 말인가요?”
아랑기의 왕비, 하월 공주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은가면을 보며 기가 막혔다.
“왕이 새로운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어산더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생겼다. 북제 코헨 라이오네어의 딸과 결혼해야 하는데 그녀가 단순한 희첩이 아니라 정식으로 왕비의 자리를 원하고 있으니. 그대는 규율을 탓해라. 왕비를 하나밖에 둘 수 없는 우리 조상들의 고리타분한 규율 말이지.”
“…….”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수녀원이 아니라 구난기사단의 주교 자리를 얻어 주겠다. 주교구 안에서 그대의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게 좋을 거야.”
하월 공주는 자신을 내다 버리며 타락을 즐길 것을 추천하는 왕의 천박한 발언에 당황했다.
왕이 다른 애첩들, 애인들을 거느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분노와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지금까지 다들 그래왔으니까.
그녀의 아버지인 치타이의 왕도 그러했으니까 하월 공주는 묵묵히 왕비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