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375
374. 모독의 성왕 3
“너무하십니다. 소첩은 그저 당신만을 바라보고 이 만리타향에서 살아가기를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맹세가, 혼약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쉽게 깨어지는 것이로군요?”
“쉽게 깨어지는 건 아니지. 치타이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니 속죄의 의미로 예물을 보낼 것이다. 아랑기 왕국의 재정이 흔들릴 정도로 성의를 담았으니 그대의 부왕께서도 기뻐하실 테지. 흔한 공주 하나 팔아서 제법 괜찮은 수익을 냈으니까.”
“부왕께서 예물을 받았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러니 그대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허락받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배려한 성직자 자리가 그나마 나을 것이다. 안심해. 구난기사단은 백색마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으니 야에가스의 피를 이어받은 그대를 간절히 원할 테니까.”
그리하여 치타이의 공주 하월은 아랑기의 왕비를 거쳐, 이제는 아케나르 주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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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혹한 운명은 비단 아케나르 주교만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왕자가 부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검술과 마법을 익혀 왕국의 온갖 궂은일을 해나가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교회에 귀의하거나 신분과 이름마저 버리고 셀소드가 되어야 했다.
공주들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야에가스 신족의 긴 수명, 강한 신체와 계속되는 젊은 혈기는 그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저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아케나르 주교는 죽지 못해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에게 딱히 거부할 권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이 끔찍한 결혼을 동경했던 자신을 저주하면서, 회한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젊고 아름다운 새 영웅이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자딘이었다.
우습게도 아케나르 주교는 그렇게 끔찍한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자딘을 사모하게 되었다.
플랑크 경의 검을 가지고 온 이 청년은 놀라운 신념과 의지로 차드라 고원을 제패하고, 차근차근 세력을 구축하며 멸망에 대항할 힘을 비축했다.
그러면서 주마다 보내는 편지에는 자신의 후원자인 그녀에 대한 존경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더는 순수했던 10대 소녀가 아닌 그녀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아자딘이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온 다른 남자들과 다른 존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연모의 정을 품는다고 해서, 그것을 아자딘에게 밝힌다고 해서 이 마음이 감히 이루어질 것인가?
하물며 그녀가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는?
아자딘은 그런 그녀라도, 뱀파이어가 된 이후라 해도 그녀를 받아들여 주겠다고 했다.
아케나르 주교의 이름을 버리고 그저 무명의 뱀파이어일지라도 자기 영지에서, 직무를 수행하며 삶의 의미를 갖기를 원했다.
그 다정함을 믿고 기대고 싶다. 하지만 아케나르 주교는, 치타이의 공주 하월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남자의 온정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뱀파이어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이 사모한 남자의 동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저 무도한 아랑기 왕에게 버려져 생과부가 되어 살아가는 나날보다 훨씬 고통스러우리라는 걸 알기에 그녀는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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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자딘은 아케나르 주교, 아니 치타이의 공주 하월이 쓴 편지를 보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태어나길 눈 없는 추물로 태어나서 내가 누군가의 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될 줄이야.’
놀랍게도 아자딘은 정치나 모략, 정찰 기술들에는 뛰어났지만 연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아케나르 주교가 자신을 사모했기 때문에, 뱀파이어가 된 이후, 아자딘의 동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네가 자책할 일이 아니다. 아자딘. 아라엘은 흔히 겪던 일이었어. 만인이 갈망하고 눈독 들이는 대상이었지.]아라엘의 목소리가 상심한 아자딘을 위로했다. 놀란 아자딘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른 이들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 위로라기보다는 체념시키기에 가깝군.’
[갈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아케나르 주교도, 천박한 영혼의 소유자에게 잡히는 바람에 인생을 망쳤지. 그렇다고 아자딘, 동정심 때문에 네 몸을 모두에게 내어줄 것은 아니지 않느냐? 오직 네가 갈망할 때, 그때 사랑해라. 이것은 아라엘의 목소리, 그대의 육체 절반을 구성하고 있는 아라엘의 권한으로 말하는 것이다. 동정심이나 이타심으로 정조를 내어주지 마라. 남자건 여자건 말이지.]‘그런 거 아냐. 그저 마음이 아프군.’
[참아내라. 아자딘. 너는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어.]아라엘의 목소리는 마치 정말 아라엘이 살아생전에 했을 법한 말로 아자딘을 훈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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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딘이 아라엘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니셀다는 아케나르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보아하니, 아케나르 주교께서는 자결한 것 같군요. 왕화의 빛에 소멸한 게 아니라.”
자결한 것 같군요.”
니셀다는 아케나르의 옷을 들었다.
폐광의 부러진 기둥, 그 날카로운 면에 아케나르의 옷이 찔려 뚫린 구멍이 있었다. 아마도 이 부러진 기둥을 향해 돌진해 스스로 몸을 꿰뚫어 자해했으리라.
“음. 그래. 그렇겠지. 아무리 내가 그녀에게 삶을 보장한다 해도 야에가스 신족의 후예인 그녀가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어. 혼자 둬선 안 됐는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내가 안일했다.”
아자딘은 편지를 접어서 품에 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비난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든 그리셀다의 잘못이지요. 백작님, 아니 전하께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읍! 읍!”
니셀다가 아자딘을 전하라 부르자 에디르가 몸부림치며 반항했다.
“그 호칭은 너무 성급한 것 같군. 그렇게 부르지 마. 이단심문관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그들이 이제 대놓고 죽이려 들걸.”
“알겠습니다. 그저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칭호를 부르고 싶다고 막 부르면 사고 난다.”
아자딘은 아케나르의 재를 쓸어서 옷에 담고 옷을 둘둘 말아 그녀의 재를 보관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네. 음?”
아자딘은 그렇게 말하다 흠칫 놀랐다. 그의 눈에서 떨어진 피가 아케나르의 재 위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옛날이야기에서는 뱀파이어들이 재에 떨어진 핏방울만으로도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허황한 이야기였다. 아자딘의 피가 떨어진 재는 약간 뭉쳐졌을 뿐 아무런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동안 아자딘에게 짜증만 내던 지벡도 아자딘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다.
피를 너무 자주 흘린다.
그러나 아자딘은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뭐 나쁠 게 있나. 괜찮아. 좀 쉬고 돌아가자. 이곳은 위험해.”
그런데 그때 그런 아자딘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늘에 선견조가 떠 있다.
전령일족이 아직 이 근처에 있는 것이다.
*********
아자딘 일행은 전령일족을 피해 이동을 시작했다.
선견조가 날아온 방향의 반대편으로, 산길을 따라 이동하며 최대한 빨리, 몸을 숨긴 채 이동했다.
하지만 그들의 맞은편 능선에 인간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방패를 든 전령일족의 하인들이 요소요소에 늘어서서 길목을 막고 있으며 그들의 곁에는 흑강전을 활에 건 사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윽.”
니셀다와 지벡이 움찔 놀랐다.
선견조가 날아온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심지어 완벽한 공격 준비가 끝난 상태 아닌가?
“조심해. 저 화살은 마법으로도 쳐내기로도 막기 힘들다. 신왕들조차 암살하는 그런 화살이지.”
아자딘이 니셀다에게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파멸의 사룡 아자딘의 비늘로 만들었다는 저 흑강전은 신왕조차 죽음에 이르게 한 무기로서 저것들이 겨누어지면 그 어떤 강자라 할지라도 위험하다.
다만 전령일족들은 그런 명백한 우세를 점하고도 아자딘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래간만인 것 같군. 아자딘. 그간 출세했더군. 그대가 일족을 떠나서 거둔 성과와 활약, 솔직히 감복했다.”
그들의 우두머리 시온 에타르는 아자딘에게 빈정거리는 것인지, 감탄하는지 모를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곁에 늘어선 다른 전령일족들 역시 아자딘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안의 아자딘.’
‘저주받았고, 일족을 배신한 자.’
‘하지만 분명히 가장 약체였는데, 약해서 멸시받던 놈이었는데 그런 놈이 우리 일족의 최강자들을 연패도지 시키고 비원마저 꺾어버렸다.’
‘우리는 강자를 존중했는데 그는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강자인 그를 핍박해 온 것은 우리의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그는 전령일족이면서 저 위선 떠는 팔왕신족에게 백작의 위를 받아내었다. 솔직히 그것은 쾌거였지. 미운 놈이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그때만은 통쾌했어.’
전령일족들은 아자딘을 여전히 일족의 배신자로 여기고 있지만, 그래도 아자딘이 명성을 떨칠 때면 자신들의 어깨도 저절로 으쓱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우리를 배신하고 엿 먹인 놈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우리 일족에서 훈련받고 나간 놈 실력이 이 정도는 된다.’
그런 기묘한 자부심을 아자딘이 충족시켜주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아자딘은 전령일족에게 적으로서 증오받되 강자로서 존중받게 되었다.
그런 아자딘을 향해 시온 에타르가 제안을 해왔다.
“혹시 괜찮다면 다시 일족에 돌아와 협력할 생각은 없나?”
“싫다고 하면 바로 쏠 건가?”
“아아. 그런 멋대가리 없는 짓을 할 수는 없지. 다만 아자딘. 그대가 품고 있는 복안을 이야기 해주지 않겠나? 우리로서는 영문을 모르겠단 말이야. 방금 분명히 왕화의 빛이 발한 것 같은데, 설마 드워프 왕 마나위단이 발한 건 아닐 테고.”
“……….”
“혹시 그대인가?”
시온 에타르는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스스로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세간의 사람들은 아라가사들이 영혼 없는 불경자라 한다. 당사자인 아라가사는 물론 그것을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휘브리스의 백성들과 전혀 다른 이방인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아무리 피를 섞었어도 저들이 아라가사를 차별하는 데, 설마 아라가사의 피를 이어받은 아자딘이 왕화의 빛을 발현시켰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다.
그러나….
“맞아.”
“……!!!”
시온 에타르는 아자딘의 답변을 듣고 너무 놀랐다.
“여,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남자의 아들!”
전령일족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