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380
379. 두 명의 선지자 3
“정말 그걸로 풀어주겠다고?”
스람은 반신반의했다.
아자딘에게 덤벼들었다가 깨지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옳다.
저 신약선언서라는 서적, 스람 왕자 입장에서는 어쨌건 확인해서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다.
“스람 왕자. 명색이 왕자이니 읽고 쓰기는 할 수 있겠지?”
“뭐? 이 자식이!”
“그럼 좋아. 필사하도록.”
“필사라니?”
“이 신약선언서는 아직 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에게도 사본이 많지 않다. 내가 주는 것은 그대가 읽고, 아랑기 왕실에도 보고서로 제출하도록. 대신 그대는 3부를 필사해서 나에게 주고.”
“날 보고 이단 서적을 내 손으로 필사하란 말이냐? 네놈의 미치광이 짓에 동참하라고?”
이게 일반 서적이라면 장문의 편지 한 장을 세 부로 필사하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단 서적이다. 이단 서적을 필사해서 뿌린다면 종교적으로 중죄를 짓는 것.
왕의 교회에서 스람 왕자를 좋게 볼 리가 없다.
결국 이는 스람 왕자의 정통성, 정당성, 그의 명예를 통째로 거머쥐고 흔들 협박 재료가 될 수 있었다.
“그래. 그게 해방조건이다. 싫으면 뭐 잡혀가서 그냥 몸값 거래나 해야겠군.”
“이 배은망덕한 놈! 아랑기 왕실이 그대에게 변경백 지위를 내렸는데 아랑기 왕실의 일원인 나를….”
“먼저 칼 들고 덤빈 이상 이쪽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줘. 그러게 누가 덤비랬냐? 좋게 말로 하려고 했더니만 괜히 덤벼서 상황이 안 좋아졌잖아. 나도 아랑기 왕국에 은혜를 입은 몸이라 어지간하면 풀어주고 싶은데, 내게 칼을 들이민 녀석을 봐주면 병사들에게 모범이 못돼. 몸값이라도 받아내야 그걸로 부하들 목구멍에 기름칠이라도 하지. 당신도 왕자라면 내 입장 알지?”
아자딘은 스람 왕자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하다.
‘끄응. 이 자식. 하긴 나라고 해도 내게 덤벼든 놈을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지. 몸값 받으면 술이라도 한잔 돌리는 거고. 아니 그런데 내가 인질인데 이 녀석 말에 놀아나면 안 되는데?’
“그래서 대답은?”
“이단의 가르침 따위를 필사하느니 잡혀가겠다!”
“그래그래. 죽을 걱정 없는 왕족이라 이거지? 몸값이 한두 푼도 아닐 텐데. 참 왕족은 속 편해서 좋겠어.”
“ 이자식이! 나 그렇게 잘나가는 왕족 아니라고. 내 위로 아래로 형제들이 주르륵 있으니까 몸값은….”
“몸값은?”
“그, 저기, 너무 많이 안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넉넉한 형편도 아니지만 스람 왕자는 필사해서 교적이 되느니 인질이 되는 쪽을 택했다.
아랑기안 가드들은 스람 왕자가 인질로 잡히자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
“아, 미친놈. 정말 미쳤지 내가. 나도 명색이 왕자인데 이런 미친놈이랑 한배를 타다니.”
차드라 고원의 주도 파이어글리프의 챕터마스터 칼린츠 왕자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아자딘이 쓴 신약선언서가 놓여있었다.
“어쩌실 겁니까? 구난기사단도, 어산더에서도 난리가 났는데요.”
북방 아라가사의 십부장, 잔이 물어보았다.
칼린츠 왕자의 사명 중 하나는 바로 아자딘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것. 그러나 누가 봐도 칼린츠 왕자는 아자딘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칼린츠 왕자의 무능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아자딘이 별격의 존재니까.
전령일족 출신이면서 차드라 고원을 평정하고 산도카르, 나이산도카르를 이으며 아랑기 왕국에선 변경백, 백작의 위를 받아냈다.
그리고 반쪽짜리이긴 하지만 에란트리 퀘스트도 완수했으니….
그를 견제하지 못한다고 해서 칼린츠 왕자를 비난하는 것은 비난을 위한 비난일 뿐이었다.
문제는 이제 칼린츠 왕자의 선택이었다.
“뒤치기하기 참 좋은 상황이긴 합니다만.”
“미쳤냐? 군권 대부분은 아자딘이 가지고 있는데. 파이어글리프의 파이어 가드들만 가지고 아자딘 뒤통수를 쳤다간 내 목이 산채로 분리될 거다. 그 자식도 차드라 오걸들도 다들 장난이 아니야! 게다가 파이어가드 중에 아자딘 추종자들이 하나둘이 아닌데.”
원래 칼린츠 왕자는 자신의 솜씨에 자신이 있던 인물이었지만, 아자딘을 보면서 격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뒤치기를 하면 아자딘의 원정군을 회군시킬 수 있겠지만, 회군시킨 다음에는?
꼼짝없이 죽는다.
게다가 파이어 가드 중에도 아자딘을 지지하는 놈들이 잔뜩 있으니 이놈들 믿고 아자딘의 뒤통수를 쳤다간 부하들 손에 숙청당할 수도 있었다.
“그럼 뒤치기 안 하고 아자딘 백작에게 충성하시겠습니까?”
“충성은 무슨, 명분상 내가 걔 상급자지. 아직은….”
“그렇군요. 이야. 부하가 왕의 교회 면전에 쌍욕을 퍼붓고 이단서적을 발행하고 선지자를 자처했으니, 그 상관인 칼린츠 왕자님의 배포가 그야말로 패도, 패왕의 길을 걸으시는군요.”
잔은 칼린츠 왕자를 놀렸다.
“크아. 남의 일이냐? 놀리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지나치잖아? 이단 서적을 대놓고 발행하다니?”
그도 당연히 이 신약선언서를 읽어보았다.
아자딘은 왕화의 빛의 근본은 왕좌가 아니라, 만백성을 수호하는 사명에 있으며 지금까지 계속 왕의 교회가 왕화의 빛을 잃고 약해지는 것은 그들이 왕좌와 혈통에만 집착해 사명을 멀리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사명을 지킴으로서 왕화의 빛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왕화의 빛은 더 이상 왕좌라는 유형의 신물에 구애받지 않고, 야에가스의 혈통이라는 유산에도 구애받지 않게 되리라.
그것이 신약선언서의 핵심이다.
참으로 올곧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발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는 당연히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자식, 어째 수양학파일 것 같더라니. 구난기사단 수양학파의 가르침을 왕의 교회에 이식해 놓았군. 왕족과 귀족들의 권위를 훼손하는 걸 왕의 교회가 용납할 리가 없어. 대놓고 너희들이 무능하고 타락해서 왕화의 빛이 꺼지고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욕하는 거 아냐?”
“사실 아닙니까?”
잔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왕의 교회에 어떤 존경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신약선언서는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옳고 그름 따윈 상관없어! 입바른 말이 통했으면 수양학파가 구난기사단 다 장악했어야지! 하물며 상대하는 건 왕의 교회다! 황제 추종자도 이단으로 사냥했는데 이런 걸 보고 넘어가겠냐?”
야에가스 신족의 혈통의 권위는 인정한 황제추종자들도 왕의 교회는 처단했다. 황제 추종자들의 핵심이론은 결국 함량 미달의 왕족, 귀족들이 너무 많다는 소리이며 이는 왕의 교회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이단이었으니까.
아자딘의 이 신약선언서는 황제 추종자들보다도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과격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반응은 어떻지? 아, 아니 뭐 대부분 일자무식이니 이거 뿌려봤자 반응은 없겠지만, 관계자들도 봤을 거 아냐? 다른 놈들 반응은 어때?”
“뭐, 이 일대는 원래부터 아자딘 백작에게 호의적이라 그런지 다들 좋아하더군요. 차드라 오걸 놈들은 신나 죽죠. 이런 시골에 처박혀 있다가 아자딘 백작이 와서 살판 난 놈들인데. 아자딘 백작이 뭐 향락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사리사욕이 강한 타입도 아니고, 이거 진짜 끝까지 가나 싶었는데 이런 엄청난 야심을 보여주니 아주 좋아 죽습니다.”
“아니, 차드라 오걸 그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관계자들도 좋아한다고? 수양학파를?”
구난기사단 수양학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잘난체하는 내시 같은 놈들이라는 평이었다.
그런데 그 수양학파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식한 아자딘의 이 신약선언서가 백성들에게 인기를 끌다니?
“아자딘이 생긴 게 미남이라서 그런가?”
“에이, 그런 게 뭐 통하겠어요? 글만 보는 건데? 정확히는 수양학파 부분은 다들 별 관심이 없어요.”
“그렇지?! 그럼 뭘 좋아한다는 거야?”
“기적 체험이지요.”
“기적”
“네. 야에가스의 신령들을 만나는 부분을 좋아합니다. 기적의 이야기잖아요. 호사가들이 아자딘 백작의 기적에 대해 입방아를 찧어댄 게 있으니, 그가 기적을 만났다고 말해도 백성들이 매우 합당하게 여기고 있단 말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기행이 이걸 위한 포석일지도 모르겠는걸요.”
신약선언서에는 아자딘이 야에가스의 신령을 만나는 체험에 대해서도 적혀있는데, 백성들은 하나 같이 이 대목을 좋아했다.
그동안 야에가스 신왕의 후손들이 변변치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기본적으로 대중들은 기적을, 영웅담을, 이변을 좋아했다.
야에가스의 신령을 만나서 계시를 받았다는 인물이 실제로 온갖 기적에 가까운 일들을 실천한 인물이다? 대중들이 혹할 수밖에 없다.
아자딘의 신약선언서의 무서운 점은 견식 있는 자들은 수양학파의 가르침에 이끌리고, 견식 없는 이들은 기적과 계시에 끌리도록 적당히 양측 모두의 장점을 포함해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건 너무 나간 해석이지. 그놈은 그냥 원래 이상한 놈이었어. 그런 게 우연히 성공을 연거푸 거두면서 지금의 평판이 만들어진 거지.”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닌가요? 우연이라고 해도 그렇게 계속 성공을 해대면 필연이고 기적이지요.”
“그런데 일반 백성의 반응은 어떻게 알고 있냐?”
“제가 서기랑 필사업자들 모아서 필사시켰거든요. 그런데 필사하면서 읽은 친구들이 다들 감탄하더라고요.”
“뭐? 야. 이 미친놈아. 아무리 네가 북방 아라가사라지만, 돈 써가면서 이걸 필사했다고?”
“어차피 보고서로 여기저기 보내야 할 것 아닙니까? 또 필요하기도 할 테고.”
“야, 이거 이단서적이야! 뿌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왕의 교회가 지랄할 거다.”
“이제 와서 왕의 교회가 지랄하기엔 늦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
하긴 최근 왕의 교회는 힘이 빠져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이변이 일어나는 데 주도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반면 구난기사단은 셀레스철 파이어 기사단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팍 끌고 반릉 왕국 사건을 잘 진화해서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왕의 교회는 북제에게 들러붙어서 왕중왕이라는 유치하기까지 한 칭호를 선사한 것이 아닌가.
“슬슬 편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옵니다. 왕자님. 마음은 결정하셨습니까?”
“음. 그, 그렇지.”
“어디로 결정하셨습니까?”
“아니 원래 나는 아자딘 백작을 선택했었어. 잃을 것은 비루한 목숨뿐이고 얻을 것은 크니까.”
“……….”
“그런데 아자딘이 이런 미친 짓을 하니까 따라가기가 좀 회의가 든달까. 얻을 것은 쥐꼬리만 한데 잃을 것이 내 소중한 목숨이라고.”
“아까 전하고 이야기가 모순됩니다만.”
잔은 칼린츠 왕자의 말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