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64
63. 아라엘의 목소리 3
데릭도 왜 아자딘이 자신을 불신의 시선으로 보는지 알고 헛기침을 했다.
“이걸 봐라.”
데릭은 부츠를 벗어서 자신의 발목을 내밀었다. 그의 발목 위에 새로 돋아난 힘줄 같은 것들이 들러붙어 있는데 선홍색 조직들은 바로 아자딘이 조금 전 보았던 ‘아라엘의 목소리’라는 정령이 까마귀에 붙어 있던 조직을 연상시켰다.
“전보다 더 튼튼하고 강해진 데다가 아픔도 사라졌다. 다시 현역으로 뛸 수 있게 된 것이지.”
“일족을 배신하고?”
“일족을 배신한 건 내가 아니다. 두령 하티르와 장로들이지. 그들은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장로 케나한의 경우는… 흡혈귀였지. 그래서 아라엘 님이 직접 처단하신 거다.”
“아라엘이 그렇게 주장하는 건가? 당신이 직접 눈으로 봤을 리는 없잖아?”
“하지만 두령 하티르가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 두령과 원로원이 그동안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갈구하고 금지된 마법들을 연구해왔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다만….”
“그걸 빌미로 봉기할 때 구심점이 없었는데 아라엘이 구심점이 되어줬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
“하지만 이거에도 흑색 마력이 느껴지는데?”
아자딘은 데릭의 발목을 가리켰다. 그의 끊어진 힘줄을 대신해 몸 밖에 붙어 있는 저 근육들에게서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것은 녹색 마력의 힘이다. 생명의 근원을 관장하는 힘이지.”
“녹색 마력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흑색 마력도 있다니까.”
“날 너무 바보로 보는군. 마법도 못 쓰는 네가 마법에 대해서 뭘 안다고?”
“…….”
“설령 아라엘이 흑색 마법에 손을 댄다 하더라도 그것은 화조풍월만으로는 우리가 지배자가 되기에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화조풍월이란 황제가 우리 일족을 노예로 쓰기 위해 부여한 힘이지. 진정한 힘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기존의 지배자들, 두령과 원로들을 비토할 때는 그들이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이유를 들면서 정작 아라엘이 흑마법에 손을 댔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는 일족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릴 필요 없다고 옹호하다니.
아자딘은 억지를 쓰고 있는 데릭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맛이 갔군. 대체 언제 아라엘을 만나서 그쪽에 투신하게 된 거야?”
“너와 헤어지고 나서 바로다. 아라엘 님을 만난 게 아니라 그분의 목소리를 만났지.”
“아라엘 님?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기로 했나? 예전엔 욕하면서 부르지 않았나?”
“그때는 내가 뭘 모르던 무지한 때였지. 하지만 이제 그녀는 살아 있는 신이자 우리 일족의 구원자이시다.”
“충신 나셨군. 아니 광신도라고 해야 하나.”
아자딘은 이렇게 뻔뻔하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데릭에게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만큼 아라엘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녀가 선보이는 ‘아라엘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현인신에 가까운 힘을 발휘한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다. 억압당하고 있던 전령일족, 아라가사들에게는 마침내 기다리던 구원자가 왔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안 돼.’
그러나 아자딘은 아라엘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자딘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입혀서? 그것도 있지만….
‘아라엘은 너무 위험해.’
그녀의 성품이 잔혹하고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아라엘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패왕. 패도를 걸으며 자신의 발아래 방해되는 것들은 전부 유린한다. 그런 인물이 휘브리스 대륙 전역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이라도 품으면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그래도 대체 뭔 조건을 들고 왔는지는 궁금하군.’
아자딘은 데릭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왜 날 보려고 한 거지? 날 보고 아라엘의 편에 서라고? 그럼 뭔가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편지를 받아왔다.”
“편지?”
“너만 보여주면 된다는군.”
“어디.”
아자딘은 데릭에게 편지를 받으려다 흠칫 놀랐다. 편지로부터 심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졌다.
‘뭐야 이건? 이게 아라엘의 편지라고?’
아자딘이 머뭇거리자 데릭이 비웃었다.
“왜? 누이의 편지가 두려운가?”
“두렵지.”
이 편지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힘, 그리고 아라엘의 목소리.
아라엘의 능력은 갈수록 강력해져 이제는 인간인지도 의심스럽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살아 있는 여신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부정할 길이 없으리라.
아자딘은 심호흡을 하고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 순간 어둠이 아자딘을 집어삼켰다.
*********
“…….”
아자딘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위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편지의 마력에 이끌려 들어갔을 때, 아자딘은 아라엘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데릭도, 주위의 다른 누구도 아자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자딘은 그 편지를 구겼다.
“이놈! 감히 무슨!”
“그분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구기다니!”
다른 이들이 보기엔 아자딘이 편지를 읽지도 않고 구긴 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이미 읽었어.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조건이라서 거절한 거지. 그리고 설령 구겼으면 뭐? 내가 여동생 편지도 못 구기냐?”
데릭이 코웃음 쳤다.
“누나 아니냐?”
“여동생이라니까.”
편지에 걸려 있던 마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아자딘이 편지를 모욕한 것으로 보였다. 데릭 곁에 있던 이들이 무기를 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데릭?”
“이 기회에 저 자식을 죽여 버리죠?”
“아자딘 따위가 아라엘 님의 혈육이라고 우리 윗사람이 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조직의 위계질서를 정리하기 위해서도 무능한 놈을 사전에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령일족의 대다수, 사실상 전부는 아자딘에 대해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역자의 자식이라 증오하고,
무능해서 멸시하였으며,
그런 주제에 편법을 써서 전령이 되었기에, 격노했다.
그런데 아라엘이 스스로 일어나면서 아자딘에게 회유의 손짓을 보낸다.
아무리 격차가 벌어져 있는 남매라 할지라도 혈육의 정이 있는 것일까? 그래서 아자딘이 장로 카자스의 연줄로 전령이 되었던 것처럼 다시금 아라엘의 연줄로 그들 위에 선다?
그건 아라엘 편에 서서 반역한 전령일족들 모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하, 어이가 없군. 이제 막 반란을 일으켜서 당장 조직을 추스르기도 어려울 판에 벌써부터 연공서열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그래서, 날 죽이겠다고? 아라엘이 시켰나? 아니면 너희들 자의적인 판단이냐? 어느 쪽이건 좋아. 날 너무 얕잡아보는데 대가는 너희 몸으로 치르게 될 거다.”
아자딘은 근육통으로 고통받는 몸에 카자스 해서, 화조풍월의 힘을 돌렸다.
마치 팔다리를 저며내는 듯한 끔찍한 통증 때문에 몸이 움직이지 않지만, 카자스에게 배운 호흡법을 사용하자 통증이 사라지고 근육에 힘이 돌아온다.
싸울 수 있다.
싸우고 나면 다시금 더 심한 피로와 근육통이 몰려오겠지만.
그런데 데릭이 부하들을 말렸다.
“그만.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네? 하지만….”
“데릭 님.”
“그와 싸워선 안 된다. 아라엘 님은 정말 ‘동생’을 아끼니까.”
데릭은 아자딘과의 싸움을 금지시켰다.
“뭐? 이 개자식이?”
아자딘은 아라엘을 언급하는 데릭에게 분개했다.
아라엘이 그를 아낀다고?
웃기는 소리다. 지금까지 아자딘을 모욕하고 때린 놈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어떤 놈들도 아라엘만큼 끔찍한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따위 소리를 모든 이들에게 말한단 말인가? 대체 얼마나 능멸해야 만족할 것인가?
하지만 아자딘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보내도 데릭은 정말 건드리지 않을 심산인 것 같았다.
“너와 싸울 생각은 없다, 아자딘. 네가 공격한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도망치겠다.”
“그렇게까지? 의외로군.”
아자딘은 데릭이 자신에게 적개심이 없는 걸 보며 의아해했다.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주려고 했는데 왜 안 덤비지?’
아자딘은 편지를 읽고 난 뒤 일부러 구겨 버렸다. 데릭 일당을 도발해서 이 기회에 버릇을 고쳐줄 셈이었다. 그런데 데릭이 너무 신중하다.
아자딘을 경계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라엘에게 당부받아서?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건 간에 전령인 아자딘이 먼저 싸움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교섭은 결렬이야. 그래도 데릭 당신을 봐서 싸우진 않겠어. 돌아가.”
“이 자식! 지금 살려주는 건 네놈이 아니라 우리란 말이다!”
“무능력자 주제에!”
“반역자 혈통!”
“아니 지금 일족에 반기를 든 건 너희잖아? 그리고 반역자 혈통이면 아라엘도 그런데? 너희들이 좋아 죽는 아라엘이야말로 반역자 혈통에 지금 또 반역한 몸 아니냐?”
아자딘이 그 점을 지적했지만 이미 광신도가 된 일족의 하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들은 혁명이다!”
“우리가 진정한 일족이지.”
“정말 편리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군.”
아자딘은 데릭의 부하들을 조롱했다.
“그만. 알겠다. 물러가도록 하지. 하지만 조심해라 아자딘. 여기는, 이 살라스마는 심상치가 않아. 지역장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도망쳤을 정도니까 잘 알겠지? 네가 아라엘 님의 은총을 받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다만, 갑자기 나 있을 때 죽어서 내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도 원하지 않으니 말이다.”
“알겠으니까 얼른 가봐.”
아자딘은 데릭 일행을 무슨 날파리 내쫓듯 손짓해서 내몰았다.
*********
아자딘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나온 데릭의 부하들은 분노했다. 감히 아자딘이 자신들을 능멸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건방진 자식!”
“아자딘 저놈 저대로 놔둬도 되는 겁니까?”
“어릴 때 저놈 진짜 활줄도 못 거는 멍청이 놈이었어요. 8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을 쌌다니까!”
저택 밖으로 내몰린 데릭의 부하들은 아자딘의 오만한 태도에 분개했다.
아자딘은 반역자 신분에 기초 훈련도 통과 못 한 낙제생으로 전령일족들 사이에서 신분이 가장 낮았다. 그런 놈이 운 좋게 카자스 장로의 제자가 되어 전령이 되더니만 자신들을 무시한다.
그런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멍청한 놈들.”
데릭이 그런 이들을 말렸다.
“그 아자딘이 아트라 권속들을 열 놈 넘게 처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
“네?”
“동쪽 끝 역참 마을에서 백작의 사생아가 끌고 다니던 용병단의 절반을 아자딘이 죽였다. 우리 개입 없이 말이다.”
“그, 그건….”
“게다가 우리가 이송한 코젤 공자, 그 녀석도 아자딘에게 당했어.”
데릭은 그동안 아자딘의 활동을 이야기했다. 다들 어린 시절의 아자딘에게 선입견이 박혀 있어서 전령이 된 이후의 활동을 경시했지만 냉정하게 살펴보면 감출 수 없는 증거들이 있었다.
아자딘이 적어도 제대로 황제의 전령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는 증거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선입견이 강한지 데릭의 부하들이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