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83
82. 놋쇠의 기사 2
살라스마와 란타릭, 이들 둘은 인접한 영지인지라 대대로 철천지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둘의 영토 경계가 되는 코라 강은 수운과 관개농업, 어업에 있어서 생명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강 유역을 두고 끊임없는 분쟁이 이어져 왔다.
이번 세대의 란타릭 영주는 가르나헤어 백작이었는데, 그는 란타릭 외에도 아디로프라는 영지도 소유하고 있는 대귀족이었다. 하지만 살라스마에 카젤 백작이 등극했을 때 그를 우습게 보고 싸움을 걸었으나 패배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이후 가르나헤어 백작은 전략을 수정해 카젤 백작에게 자신의 딸을 정략결혼으로 보내는 한편 국경지대에 공작원을 투입해 살라스마를 혼란스럽게 만들도록 노예매매를 하고 도적 떼들을 지원하게 했다.
란타릭 영주가 잠입시킨 공작원 중 가장 직위가 높은 이는 도네어라고 불리는 전직 경비대장이었다. 본래 도네어는 이런 잠입작전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사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풍족한 퇴직금을 받아 부자가 되리라고 여겼는데, 자신을 도적 떼 무리로 보내 버린 가르나헤어 백작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마저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지내보니 이게 아주 좋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 신세가 낫다더니 정말 체험해 보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도네어는 도적들이 잡아온 여인 중 원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취하고, 각종 사치품과 보물들을 마음껏 갈취했으며 아예 자신을 위한 전용 광대까지 두었다.
어지간한 귀족들의 궁성이 부럽지 않은 환경을 조성한 그의 소굴을 다른 도적들은 도적왕의 궁성이라 불렀다. 그 도적왕의 궁성으로 나가 여성, 샤티가 진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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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왕, 저희가 나가를 붙잡아왔습니다.”
“뭐? 그게 무슨 헛소리야?”
도네어는 반신반의했다.
“나가들은 죄다 나가슈라 재건을 위한 조직에 속해 있다. 만만치 않은 놈들이지. 어떻게 너희들 실력으로 잡았다는 거냐?”
“그게 말이죠… 그놈들입니다, 그거.”
“손님을 냄비로 처넣는 여관 있잖아요.”
“아, 거긴가? 나가들에게도 독이 통하던가?”
도네어는 기막혀하면서 웃었다.
“그래서 나가는 왜?”
“그 나가가 굉장한 미인이랍니다.”
“인간으로 둔갑한 나가라고요.”
“하, 재미있군. 그냥 여자인 거 아냐? 도적놈들 허풍이 보통 세야지.”
도네어는 그리 생각하고 자신의 궁성 식탁 밑에 사슬로 묶여 있는 이를 끌어냈다.
“컥! 무슨 짓인가? 그대는 지금 기사를 모독하는 것인가?”
사슬에 묶인 이는 수염이 새하얀 노인이었다. 나이가 들어 젊음의 생기가 사라지고 피부는 고목처럼 메말랐지만 이 노인의 풍채는 그가 좋은 교육을 받은 인물임을 짐작케 해주었다.
하지만 현재 그는 머리에 놋쇠 세숫대야를 뒤집어쓰고, 어린아이들이나 쓸 법한 조잡한 목검에 우스꽝스럽게 색칠된 천갑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정신도 온전하지 못한지 품위도 잊고 바닥에 흘린 빵조각을 주워 먹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나, 브란드 경?”
도네어가 빈정거리자 브란드 경이라 불린 노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가 인간으로 둔갑했는지 아니면 백성들이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 거짓을 고했든지, 그도 아니면 그들도 사기꾼에게 속았겠지. 중요한 것은 왕인 그대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지! 그게 왕관을 쓴 자의 사명 아니겠는가?”
브란드 경은 도적왕 도네어의 칭호에서 ‘도적’이란 단어를 지워 버렸다. 그러니 도네어는 그냥 왕이 되고, 그의 부하인 도적들은 그냥 백성 혹은 병사가 되었다.
“하하하. 정말 재밌게 해준단 말야. 역시 살려두는 보람이 있어.”
도네어는 본래 무두장이의 아들이었다. 언제나 역한 약품 냄새를 몸에 달고 다니는 무두장이는 천한 직업이라, 후에 병사가 되고 이런저런 공을 세웠음에도 그는 다른 이들처럼 평가받지 못했다.
란타릭 백작이 그를 도적질에 투입한 것도 그가 무두장이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인은 그를 왕이라 부른다. 여기는 그의 궁성이 되고, 그는 이곳에서 왕이 되어 백성들을 약탈하고 죽이고 심지어 잡아먹기까지 하는 도적 떼들의 나라가 되었다.
그래, 재미없을 리가 없지. 도적 떼의 왕에 노망난 놋쇠기사가 광대를 겸하고 있으니 이 궁성에 나가 하나쯤 더 추가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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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의 소굴은 분지 지형에 위치해 있었다. 살라스마를 덮친 가뭄도 여기 분지는 피해갔는지 초목이 우거진 분지 안쪽에는 코라 강의 지류가 되는 작은 실개울 하나가 흐르고 그 주위로 도적들의 야영지가 죽 늘어서 있었다.
그 중앙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요새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영구적으로 쓸 만한 건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텐트처럼 가볍게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못해도 반년은 공사해야 윤곽이 잡힐 만한 나무 방책으로 만든 요새다. 나가들의 공작원이던 샤티는 도적들의 소굴을 보자마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란타릭 영주놈 소행이구만. 가르나헤어 백작, 그 음흉한 놈이!’
그녀는 살라스마 변경백의 궁성에 있었기 때문에 살라스마와 란타릭의 알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란타릭 영주의 딸과 살라스마 영주의 아들 카젤이 정략결혼을 하긴 했지만 이들 사이에는 여전히 알력의 불씨가 잠들어 있었다.
그때 병사들이 쇠창살을 열어주었다.
“나와라, 나가. 우리들의 왕이 너를 보자고 하신다.”
“왕? 도적들의 왕?”
“그래. 우리 왕은 궁성에 개인 광대도 데리고 다닌다고. 어지간한 백작들보다 훨씬 왕답지.”
“…….”
농담으로라도 왕을 자처하는 걸 보면 가르나헤어 백작에 대한 충성심이 희박해진 것 같다.
‘어쩌면 살아나갈 수 있겠는데?’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하며 샤티는 병사들을 따라 이동했다.
요새 안쪽 심장부에 위치한 롱하우스에는 금과 상아, 각종 진귀한 보물들이 장식되어 있고 상인들에게서 약탈한 이국적인 옷을 걸친 여인들이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롱하우스가 크긴 하지만 청소하는 데 네다섯씩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반라의 여성들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우두머리가 부하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하는 게 틀림없었다.
‘권력의 맛을 보고 미쳐가는 중이군. 흔히 있지. 이런 놈들.’
샤티는 도적들의 두목, 도적왕이라는 놈 앞에 끌려갔다. 도적왕은 장년의 남자로 상당한 실력자로 보였다.
“이게… 나가라고? 아무리 봐도 그냥 인간 여자로 보이는데?”
“예. 이 여자의 일행도 인간 남자로 보였는데 덤벼들 때 변신하지 뭡니까.”
“그러고 보니 살라스마의 백작이 나가로 변했다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여자도 그 관련자겠군. 그렇지?”
“…….”
샤티는 말문이 막혔다. 이상한 저택을 꾸며둔 도적놈이라 내심 무시하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예리하다.
“대답 안 할 거냐? 고문을 당하거나 하면 기껏 무저항으로 투항한 의미가 없을 텐데. 동료가 구해줄 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너희 같은 놈들과 말을 섞는 것 자체가 굴욕적이라서 참고 있는 거다, 더러운 온혈원숭이 놈아.”
“백작이 나가로 변한 건 너희들의 소행인가?”
“그가 스스로 선택한 거다. 위대한 코브라 여왕 데비슬린의 권속이 되는 건 영광된 일이니 온혈원숭이에겐 과분한 축복이지.”
“흠. 살라스마 백작이 사교도가 되었단 말이군. 너희들이 그냥 권속으로 받아줬을 리는 없고 뭘 바쳤나?”
“영민들의 시체. 미이라로 만들어서 란타릭의 백작을 밀어 버리려고 했지.”
샤티는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말했다. 시체를 모아 언데드 군대를 만들어 란타릭을 포함해 코라사르 전역을 먹어 치우려고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가들의 여신, 코브라 여왕 데비슬린이 백작을 권속으로 받아준 것은 그가 신왕진서 사본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왕진서 사본을 이야기하면 이 도적들이 어떤 욕심을 부릴지 알 수 없다.
“하하하. 귀족님들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군. 미친 녀석들이라니까 정말.”
“그런 말을 하는 당신도 귀족이 되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은데…. 어때? 당신도 코브라 여왕의 권속이 되는 건?”
“더러운 온혈원숭이니 뭐니 하고 부르지 않았나?”
“그것과 이건 별개지. 권속이 된다면 더러운 온혈원숭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나가 종족은 너희 인간들보다 훨씬 오래 살고 더 강력한 종족이라고.”
샤티는 이 도적들을 혐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포섭할 수 있다면 포섭할 것이다.
카젤 백작이 전령일족에게 살해당해서 나가들이 공들인 작전이 무산되었다. 이 도적왕과 도적무리들을 포섭할 수 있다면 그 피해를 어느 정도는 복구할 수 있을 터였다.
“흠? 잡혀 온 주제에 꽤 기세등등하군?”
도네어는 샤티의 당당한 태도에 미소를 지었다.
“어쩌실 겁니까? 응하실 겁니까?”
“아니 마음에 안 들어. 감히 여기서 나와 대등하게 교섭하려고 하다니 형틀에 매달아라. 먹이는 한동안 동료 나가 시체 있지? 그것만 주도록.”
“넵!”
“…이, 이봐!”
샤티는 도네어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때 전령 한 명이 달려왔다.
“두, 두목님! 큰일입니다!”
“큰일? 무슨 일인데?”
“웬 미친놈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미친놈?”
“네. 나가 여자를 사겠다고 막무가내로 쳐들어오는데 경비 서던 친구들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그 거, 거세를 시킵니다.”
“거세?”
도네어는 샤티를 돌아보았다.
“널 찾아온 손님 같은데 짐작 가는 게 있나? 동료인가?”
“아, 아마도.”
“말해라.”
“날 형틀에 매달겠다면서? 내가 왜 말해줘야 하지?”
“말하지 않으면….”
그러나 도적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두목님!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부디 지휘를!”
“…원 젠장! 알겠다!”
도네어는 급하게 출정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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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타릭 백작령과 살라스마 백작령의 경계가 되는 코라 강 지류 부분의 분지 지대에 들어서자 동부 내륙지방을 괴롭히던 가뭄의 흔적이 사라지고 초록이 우거진 숲길이 이어졌다.
“거 따라오지 마쇼.”
앞서가던 무장상인단의 경호원들은 아자딘 일행이 자신들을 가깝게 따라오자 짜증을 냈다.
“아니 딱히 당신들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길이 일직선이라 그러는 건데.”
“흥. 허튼소리. 당신들 속셈 모를 줄 아쇼? 이 근처에 도적들이 많으니까 괜히 우리한테 얽혀서 따라오려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인원이 많은 게 도적들에게 공격당하지 않고 좋지 않나?”
머릿수만 더해도 도적들 입장에서는 노리기 힘든 타깃이 될 것이다. 아자딘이 그 점을 지목했지만 무장상인단의 용병들은 코웃음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