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87
86. 놋쇠의 기사 6
“나가 여자, 너를 지켜주는 건 이분의 기사도뿐이다. 내가 그걸 존중하기 때문에 지금 널 살려두는 거야. 내 진의를 모독하지 마라. 아니면 뭐냐? 지금 황제의 전령을 모독하는 거냐? 황제의 전령이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뜻이 거짓되고 망령되다 말하는 것이냐?”
“…….”
아자딘에게서 무서운 살기가 뻗어 나왔다. 명분으로 보나 위압감으로 보나 샤티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때 샤티 앞에 선 놋쇠의 노인이 아자딘이 뿜어내는 살기에 맞섰다.
“너무 위협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일단 이 곤경을 피할 때까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협력해 드리지요.”
아자딘이 자신의 산양에서 무기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장할 수 있는 분들은 이걸로 무장하시고 짐이 가벼워졌으니 불편하신 분은 여기 타십시오.”
갑자기 등장한 아자딘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그가 내준 것을 거부하기에는 다들 너무 궁핍한 상황이었다.
“어떻습니까?”
“알겠네. 기사도가 조롱거리가 된 세상에서 자네 같은 젊은이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감탄했네. 동행을 허락하겠네.”
“감사합니다.”
“다만 저 여성과의 문제는 적어도 일단 안전한 곳에 도착하고 나서 해결하도록 하게.”
노인은 그리 말하며 아자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란타릭의 브란드 경일세. 자네는?”
“저는 황제의 전령, 108령 아자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란타릭의 브란드 경이라니, 기사이신가요?”
“…….”
아자딘이 기사냐고 물어보자 브란드 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치 사람이 급변한 것 같았다.
“그럼 가세.”
그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
갑자기 얼어붙은 듯한 태도를 보인 브란드 경의 변화에 아자딘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때 한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는 바로 샤티에게서 신왕진서 사본을 빼앗아 보관하고 있는, 탈주 노예들의 수장이었다.
“부디 브란드 경을 도와주세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감히 주제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런 의미?”
“네. 그가, 브란드 씨가 브란드 경이 된 계기 말이지요. 가면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지요.”
아자딘은 그녀가 자신 곁에서 함께 행동하는 것을 허락했다. 샤티로서는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었다.
‘저 여자가 내 신왕진서를 가지고 있는데….’
전령일족 옆에 붙어 있으니 도중에 빼앗아 도망칠 수도 없다. 결국 이 기괴한 피난민 일행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
아자딘이 선두에 서고 브란드 경은 후미에서 뒤따라오면서 사이에 여성들을 두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델메르라고 합니다. 본래 란타릭 백작의 공작원이었지요.”
“공작원?”
“네. 저 도적단은 란타릭 백작이 살라스마 변경백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심어둔 이들이지요. 근처 도적단에 노예 상인과의 커넥션을 제공해주고 대신 무기를 공급해 도적들의 세력을 더더욱 강화하는 게 저희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도네어가 조직을 사유화하면서 절 숙청했지요. 여자라서 살해당하진 않았지만….”
“그럼 저 브란드 경은 누굽니까?”
“그는 란타릭에서 유명한 서기이자 변호사, 그리고 교사였지요.”
본래 브란드 경, 아니 브란드는 살라스마와 란타릭의 경계인 코즈마 시에서 유명한 서기이자 변호사였다. 지식인, 교양인으로 명성이 드높던 그와 그의 가족이 재수 없게도 도적 떼에게 잡혔을 때 도적왕 도네어는 노예로 팔기보다는 그들을 이용해 친지들에게서 몸값을 뜯어내는 게 더 이득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브란드의 친척들은 몸값 지불을 거부했고, 이에 분노한 도네어와 도적 일당은 브란드의 사위와 손주를 죽여 딸과 손녀에게 강제로 먹이려 했다.
브란드의 딸에게 남편을 먹이고, 손녀에게 그 형제를 먹이려는 끔찍한 만행에 당연히 먹는 것을 거부했고, 이에 흥분한 도적들은 그녀들을 죽이려 했다. 그때 브란드가 나섰다.
그는 딸과 손녀를 살려줄 것을 조건으로 자신이 직접 죽을 먹었다. 많은 도적이 비웃고 조롱하는 와중에 그는 홀로 묵묵히 그 고통을 견뎌냈고 결국에는 노망이 들고 말았다. 그 끔찍한 일을 겪고 난 후에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변호사, 서기, 학자였던 그는 스스로 옛날이야기의 기사라고 믿는 자칭 브란드 경이 되어버렸다. 도네어는 그게 재미있어서 그를 자신의 전속 광대로 삼아 살려둔 것이다.
“가족을 죽여서 먹였다고요? 일부러?”
아자딘은 도적 떼의 만행을 듣고 당황했다. 기아에 못 이겨 식인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없다. 혹독한 공성전 속에서 식량 보급이 끊겨 굶주리게 되거나 기근이 들어 모두 굶주리게 되면 인륜 따위는 뒷전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서 가족을 죽여 먹이다니? 도적왕 도네어의 인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더 괴롭힐 걸 그랬군.’
아자딘은 자신이 도네어를 화살받이로 만들었던 걸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이 지나면 나을 상처만 입혀놨다. 물론 화살이 깊이 박힌 곳은 이후에도 계속 고통을 주겠고, 잘 치료하지 않으면 그대로 상처가 덧나 죽겠지만. 그러나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 놈에게는 너무 자비로운 처사였다.
“도네어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인육을 조리할 뿐 아니라 도적들에게 약을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들은 각 여관 등지에 퍼져서 음식에 약을 타서 사람들을 납치해오죠. 불필요한 사람은 죽여서 고기로 만들어 버리고 말이지요.”
“…….”
“저도 사실 한패거리였는데 그들의 잔혹함을 아무리 떠벌여봐야 누워서 침 뱉기 같아서 말하기 그렇지만, 여하튼 그 후 브란드는 정말 이야기 속의 기사처럼 우리를 도와주었지요. 아마도, 제정신으로서는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럼 지금 그는….”
“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어요. 그러니 부탁이니 그를 상대할 때는 언행에 주의를 기울여주세요. 만약 그가 정신을 되찾거나 한다면 가뜩이나 험난한 길에 고생문이 활짝 열릴 테니 말이지요.”
“음, 그렇군요. 그런데 저희 황제의 전령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이 있을 텐데 제게 그 사실을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나가의 손도 빌리려고 했는걸요. 정말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붙잡아야 할 판이니까요.”
그리 말한 델메르는 눈을 빛냈다.
“또, 무슨 일이 있어도 도네어에게 복수하고 싶고요. 다만 도네어에 대한 복수는 여기 사람들이 무사히 도망치는 걸 우선하고 나서의 일입니다만.”
듣고 있던 이스마일이 하품을 했다.
“지금 추격자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빨리 갑시다.”
“…….”
델메르는 이스마일의 냉담한 태도에 상처받은 듯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상처를 직시하는 고해성사 같은 성스러운 대화였을 텐데 이스마일에게는 그저 듣기 싫은 구걸처럼 들렸다는 뜻 아닌가.
“…….”
아자딘은 델메르의 손을 잡고 말없이 이스마일을 바라보았다.
*********
숲길을 걷다 보니 날이 어두워졌다. 행군에 익숙한 군인들도 길이 아니면 밤에 함부로 행군하지 않는 법. 델메르와 브란드는 탈주 노예들을 쉬게 하고 그들 역시 휴식을 취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이스마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다들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들었으니 신왕진서를 빼앗죠.”
“아니. 빼앗을 거라면 애초에 이들은 내 적수가 아니다. 하려면 진즉에 했지. 그보다 이스마일, 종사로서 좀 주제를 넘는구나.”
아자딘의 말에 이스마일이 혀를 찼다.
“당신이 그러시다면 종사인 저야 따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좋다.”
“왜 이 사람들을 돕는 겁니까? 아무런 대가도 없이?”
“황제의 전령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황제의 어사(御使)다. 황제의 금화는 그걸 제도화하기 위한 장치이지 궁극적으로는 이게 우리들의 올바른 모습이다.”
“네. 황제가 죽지 않고 우리가 계속 황제의 어사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면 말이지요. 우리가 지배하는 것도 통치하는 것도 아닌 백성들을 왜 책임져야 합니까? 권력이라는 보상이 없는데 왜 의무를 져야 합니까?”
이스마일은 진심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자딘은 실소했다.
“하긴… 이해는 간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신왕진서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네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간다는 거다. 보아 하니까 전령 선발 과정이 너무 힘들었나 보구나.”
“네?”
“또래 애들을 제껴야 겨우 전령일족으로서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데 경쟁에서 이기기 힘드니 인성을 함양해야 할 때를 놓치고 오로지 재주 익히는 데만 모든 심력을 기울였구나.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고 먹이는 악당들이 이렇게 많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고작 이런 거라니.”
“…….”
이스마일은 아자딘의 말에 수치심을 느꼈다. 만약 그가 그냥 이스마일을 박정하다 비난했다면 오히려 웃어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자딘은 은근히 이스마일을 조롱하고 있었다.
‘네 재주가 부족한데 어떻게든 일족 안에서 자리매김하려고 인성은 내다 팔았구나.’
‘능력과 재능이 없으니까 인성이라도 팔아 치워서 그 모양이냐?’
아자딘은 이렇게 이스마일을 비난하고 있었다.
“저는 당신처럼 배경이 그럴듯하지 않아서요. 절 예쁘게 봐주는 장로도 없고, 알디스 님이 후견인으로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스마일!”
듣고 있던 미디암이 말렸다. 어쨌거나 종사인 이스마일이 전령인 아자딘에게 이렇게 대드는 것은 위계질서가 엄격한 아라가사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서해주세요, 아자딘. 이스마일이나 저나 아직 어리고 이런 일은 처음 있는 거니까요.”
미디암이 이스마일을 대신해 사과했지만 아자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사과할 필요는 없다. 나는 내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원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생각을 알고 싶으니까. 너희가 자유롭게 발언하지 않으면 너희들과의 대화는 무의미하지 않겠냐. 다만 마음이 좀 아프고 일족의 미래가 걱정되는구나.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에도 이렇게 개자식같이 굴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다니.”
“…….”
“뭐 개같이 말하면 개 같은 대접을 받게 되겠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가슴 속에 담긴 말을 하렴.”
“당신도 별로 어른스럽지는 않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선견조를 좀 시전하겠습니다.”
이스마일은 선견조 주문을 시전해 하늘로 인공정령을 날려 보냈다. 그런데….
“어?”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숲 뒤쪽에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이스마일은 선견조를 해제하고 육안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어두컴컴하지만 별들이 보인다. 그러니 검은 연기 같은 게 피어날 리 없다.
“뒤에서 뭔가가 오고 있어요!”
“…그래?”
아자딘은 자신의 산양을 잡아 탔다.
“할 수 없지. 후방을 잠깐 둘러보고 오마.”
“당신도 쉬셔야 할 텐데요?”
“적당히 둘러보고 오겠다. 너희들은 여기서 사람들을 지키도록.”
아자딘은 길을 돌아가 후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