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89
88. 블랙애로우 1
이스마일은 아자딘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령일족의 소년 소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특히 가진 거 없고 가문의 배경 따위가 없는 이들로서는 전령 선별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평생을 패배자로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그 선별 과정에서 탈락해 평생 패배자가 되어야 할 자가 전령이 되었다. 아무리 장로가 후견인이라지만 파격적인 인사에 다들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 주제에 황제의 전령의 명예 같은 걸 찾다니.
저 휘브리스의 백성들은 아라가사에겐 영혼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데, 저런 놈들을 지키는 게 무슨 명예란 말인가?
아라가사 민족 모두가 거부할 것이다. 그걸 왜 전령 선별 시험에서 떨어지고, 마법 하나 쓸 수 없는 이단자인 아자딘이 무슨 권한으로 결정하느냔 말이다.
‘뭐 실력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아자딘이 살라스마 백작을 토벌하던 때를 떠올리면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일은 아자딘을 보면 피부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혐오감을 느꼈다.
“아자딘은 맞는 말을 하고 있어. 우리는 황제의 전령이고 원래 우리 사명은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었어. 박해받고 있느라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말야.”
이스마일을 더더욱 짜증 나게 하는 건 미디암이 언제부터인가 아자딘을 싸고돈다는 것이다. 아자딘의 언행을 옹호하는 그녀에게서는 감출 수 없는 호의가 느껴졌다. 그 점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미디암 곁에서 그녀의 수발을 들고 있는 그가 아니라 왜 잠깐 만난 아자딘이 더 그녀의 마음을 끄는가? 심지어 아자딘에게는 눈도 없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명예에 굳이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요? 응?”
이스마일이 빈정거리던 그때 갑자기 선견조의 느낌이 끊어졌다.
“어?!”
뭔가가 선견조를 공격해 제거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선견조의 마법은 인조정령인 선견조를 하늘로 날려 보내고 그 감각을 공유해서 정찰을 하는 마법. 이 인조정령은 흐릿할 정도로 투명한 바람의 정령으로 지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발견하고 공격했다는 건… 예사 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큰일이군! 모두 일어나요!”
미디암은 지쳐 있는 여성들을 깨웠다.
“무슨 일이죠?”
델메르가 물어왔다.
“적이 와요!”
“아, 이런.”
나가 여성 샤티도 뒤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기운에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 시냇가를 따라 이동하시오!”
브란드가 사람들에게 그리 외쳤다.
“아니 그럼 상대도 빤히 알 텐데….”
시냇가 외엔 수풀이 우거지게 자라 있으니 야밤에 불도 안 밝히고 이동하려면 선택지가 없긴 하다. 그러나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싸울 수 있는 자는 여기 남아서 적들의 발을 막읍시다!”
브란드는 그리 말하고 쇠지렛대를 허공에 휘둘러보았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 노인. 아, 원래 실성한 거 맞지.’
이스마일은 정말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탈주 노예들이 도망칠 준비를 하는데 자리를 회수하고 짐을 정리하는 데만도 한참 걸렸다. 간신히 짐을 집어 들었을 때 수풀 속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브란드의 손에 들린 쇠지렛대에 명중하고 미끄러지며 놋쇠 세숫대야를 갈라 버렸다.
“크억!”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브란드 경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전령일족의 궁시 못지않은 위력. 애쉬우드 장궁에서 발사한 활이었다.
‘하지만 그 활을 쓰던 놈은 아자딘이 손가락을 잘라 버렸는데? 다른 궁사가 있었나?’
이스마일은 당혹스러워 하면서 몸을 숙였다.
“꺄악!”
여성들은 브란드 경이 피를 흘리자 놀라서 오히려 몸을 일으켰다. 화살을 쏘는 적에게 아주 좋은 표적이었다.
‘짜증 나!’
이스마일은 그 모습을 보며 화를 냈다.
‘무력하고 한심한 것들. 얼른 달아날 것이지 피 좀 봤다고 아우성이라니. 아라가사라면 열두 살 어린 소년도 피 정도야… 배에 칼을 맞아도 일단 도망친 다음 낚싯바늘로 배를 꿰매고 있을 거다!’
이스마일이 분개해서 그녀들을 바라보자 미디암이 그를 흔들었다.
“이스마일, 흥분하지 말고 수풀로!”
“아, 네!”
이스마일은 자신이 흥분했었다는 데 부끄러워했다. 약자들을 보니 너무 미워서 그만 흥분한 것 같았다. 이래서야 자신이 미워하는 저 약자들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렇게 미워서 견딜 수가 없을까?
브란드 경이 쓰러지고 탈주 노예들이 소란을 피우는 사이 도적들이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우리 소굴에 불을 질러?”
“그동안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대접해 줬더니만 정신을 못 차리지?”
도적들이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데 마치 숲속의 승냥이 떼들 같아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에는 폭력과 탐욕이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도네어… 얼마나 더 악업을 쌓아야 만족하겠는가!”
“이야, 브란드 경. 늘 떠들어대는 게 농담인지 알았지 뭐야. 설마 진심인지 몰랐네. 이거 우리가 진정한 기사님을 못 알아봤구만.”
도적들의 두목 도네어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숲의 그림자 아래에서 걸어 나왔다. 희미한 별빛 아래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마치 도금을 입힌 청동가면 같았다.
“그래, 감히 도망치려고 하다니. 어디로 갈 셈이지? 란타릭인가? 그곳으로 가서 뭐 하려고?”
도네어가 빈정거렸다.
“브란드 경, 알고 있겠지만 나는 란타릭 백작의 명을 받고 이곳에 온 인물이다. 내가 한 모든 행동은 란타릭 백작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란타릭 백작령으로 도망치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힉!?”
탈주 노예들은 그 말을 듣고 기겁했다.
란타릭 백작이 이 도적의 배후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란타릭 백작령으로 도망쳐봤자 어디서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나만이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다. 노예로 팔아주지. 어디 부잣집 놈들의 종이 되겠지만 잘하면 후처가 될 수도 있어. 그게 좋은 인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그전에도 너희들의 삶은 비참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말하는 도네어도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귀족이 아닌 한, 이 휘브리스의 모두는 비참하지. 하물며 너희들은 가족의 살점을 먹은 괴물들 아닌가? 식인은 중죄라고. 성기사들이 알게 되면 산 채로 화형이다.”
탈주 노예들은 도네어의 비열함에 치를 떨었다. 강제로 사람들을 죽여 그 가족들에게 먹이고 인간의 마음을 파괴한 주제에 이제 와서 그걸로 협박하다니!
“식인?”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브란드가 기겁했다. 애써서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끔찍한 참상이 떠오르기 시작한 듯했다.
“아….”
브란드의 손에서 쇠지렛대가 떨어졌다.
“그래, 이제 기억난 모양이군. 여기 있는 놈들 모두는 식인의 죄를 범한 자들이다. 그것도 가족을 말이지. 너도 예외는 아냐, 브란드 경. 참 대단한 기사 납셨군.”
“아아… 거, 거짓말이야! 나는….”
“흐흐흐. 이거 참 참을 수 없단 말이지. 이거 보는 게 재밌어서 계속 살려뒀단 말야.”
도네어는 몸서리를 치는 브란드를 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 순간 화살이 수풀을 꿰뚫고 도네어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
화살은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던 미디암과 이스마일이 동시에 날린 것이었다.
“이런….”
도네어는 검을 들어 화살 하나는 쳐내고 다른 화살은 피해냈다. 날아드는 화살 두 발을 한 동작에 처리하다니, 예사롭지 않은 칼솜씨다. 과연 란타릭 백작이 심어둔 공작원들의 리더가 되기에 손색없는 솜씨라고 할 만했다.
허나 도네어는 화살을 쳐내고 신음했다.
“크윽!”
어느새 그의 머리에 또 다른 화살이 꽂혀 있었다.
전령일족의 기예 이선궁.
하나의 화살 그림자에 또 다른 화살들을 숨겨둔 것이다. 대낮에도 막기 힘든 기술을 어두운 밤에 쏜 것이니 영문을 모르고 당할 만도 했다.
-풀썩!
도네어가 쓰러지자 산적들이 기겁했다.
“앗?! 두, 두목?”
“이럴 수가!”
또다시 화살이 수풀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퍼퍽!
도적들이 속절없이 화살에 맞았다. 그런데….
“어?”
“별로 안 아픈데?”
“자, 잠깐만! 머리에 꽂혔다고 이거!”
도적들은 자신들의 몸에 꽂힌 화살을 보며 기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다. 게다가 상처 부위에서 실지렁이 같은 벌레들이 일어나 상처를 메꿔 피도 조금 흐르다 말 뿐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
보다 못한 도네어가 일어났다.
“네놈들이 그러면 내가 연기를 한 보람이 없잖아. 이렇게 눈치가 없나.”
그는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던 화살을 스스로 뽑아내었다. 상처에서 실지렁이 같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구멍을 메우는 게 보였다.
두개골에 화살이 꽂혔는데 멀쩡히 일어나며 상처를 벌레들이 메우는 괴물이라니!
“두목!”
“네놈들이 멍청해서 잔챙이들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잖냐. 그 녀석들, 틀림없이 그 전령일족이 데리고 다니던 어린애들이다.”
도네어는 아자딘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령 아자딘이 끌고 다니던 아직 앳되어 보이는 소년 소녀, 그들의 솜씨임이 틀림없었다.
“어쩌죠?”
“너, 너.”
“네?!”
“수풀에 들어가서 저것들을 찾아라. 꼬맹이 둘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도적들은 도네어의 말을 듣고 수풀로 뛰어 들어갔다.
“윽… 비열한!”
브란드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지만 도네어는 칼을 들고 걸어나가 칼자루로 브란드를 후려쳤다.
“카하하하! 대단한 기사님 나셨어! 놋쇠 기사!”
브란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도네어가 발을 들어 쓰러진 브란드를 걷어차려 하자 뒤에서 델메르가 뛰쳐나와 칼을 찔렀다. 하지만 도네어는 그 공격 역시 가볍게 막아내고 델메르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이봐, 델메르. 아직 네가 나설 때가 아니야. 아무리 심심해도 얌전히 짱박혀 있으셨어야지.”
“이, 이 자식! 도네어!”
델메르가 저항했지만 도네어는 그녀를 한 손만으로 번쩍 집어 들었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괴력이었다.
그때 도네어는 델메르 옆구리에 못 보던 가방이 있음을 알아챘다.
“응? 뭐야 이 가방은? 나가 여자 가방이지?”
도네어가 가방을 열어보았다. 눈부신 빛이 가방 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흠. 이게 그 기사님이 원하던 물건인가?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종이라니.”
도네어는 가방 안에서 빛나는 종이들을 꺼내 보고 의아해했다.
“설마 이건?”
“그래, 신왕진서 사본이다!”
탈주 노예들 사이에 있던 나가 여성 샤티가 몸을 드러냈다.
“신왕진서 사본이라고?”
물론 도네어도 신왕진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왕의 마도서.
야에가스 신족들의 힘의 근원.
그게 이거라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종이를 보니 확실히 믿음이 간다.
“그래, 그걸 코브라 여왕께 바치면 여왕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실 거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죽어.”
샤티가 그리 말하자 도적들이 발끈했다.
“뭐? 네깟 것이 지금 우릴 협박하는 거냐?”
“내가 죽인다는 게 아냐. 그 기사가 너희들을 살려둘 것 같으냐?”
도적들이 발끈했지만 도네어가 그들을 말렸다.
“그래, 좋아 나가 여자. 재밌군. 무슨 말을 할 거냐? 어서 말해봐. 재밌는 이야기를 하면 들어주지.”
도네어는 샤티가 무슨 말을 할지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네, 저도 듣고 싶군요.”
수풀 속에서 새로운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