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92
91. 아라엘 지파 1
“이로써 네게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대기의 능선을 넘어올 때, 빛을 등지고 스승은 말했다.
“하지만 카자스 해서는 네 육체를 파괴하고 있다, 아자딘. 이건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인간에게는 맞지 않아.”
“맞지 않는다고요?”
“그래. 우리 엘프는 부상을 입어도 언젠가 반드시 그 부상이 완치된다. 관절과 인대가 완전히 재생해서 인간이 겪는 관절염이나 요통 같은 만성 질병은 우리 엘프들에겐 일시적인 부상일 뿐이다.”
“그건 부럽네요.”
“카자스 해서를 사용하면 너는 몸이 상하고, 그것은 계속 누적되어 간다. 노년에 고생할 거다. 네게도 노년이 온다면 말이지.”
스승은 아자딘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자딘, 내가 가르친 것들이 너를 배신할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스승님.”
아자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자스 해서는 절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 깃든 힘.
전령일족의 낙오자로 멸시당하던 그에게 주어진 이 힘만으로도 그는 구원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를 구원해준 것은 자신을 위해서 안타까워하는 스승의 존재.
“저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 힘은 저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
“으윽….”
아자딘은 눈을 떴다. 아니 그는 눈이 없으니 의식이 깨어나고 그의 ‘시력’이 활성화되었다고 해야 하리라.
그날 아침 햇살 같은 눈부신 빛이 아자딘의 뇌리를 자극으로 흔들어 깨운다. 그것은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아자딘은 고개를 들어 아침 햇살이 대지를 어루만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멋지군.”
매번 보는 아침 햇살이고, 어디나 비슷해 보이는 풍광들이지만 풍경을 볼 때마다 추억도 떠오르기에 이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거겠지.
아자딘은 호흡으로 상처를 다스리고 추억으로 정신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깨어났군요. 괜찮습니까?”
지벡이 아자딘을 걱정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지벡 경?”
아자딘은 지벡 경이 자신을 도왔던 걸 어젯밤의 기억에서 떠올렸다. 젝트에게 맞아 늑골이 부러진 것과 흑강전에 찔려 가슴에 상처가 난 것, 위기에 처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그 상처가 전부 치료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일단 상처를 씻기고 연고를 발라두긴 했습니다만 움직이면 다시 벌어질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때 지벡은 아자딘을 무슨 무뢰한 보듯 했다. 왕의 교회 입장에서 전령일족은 보는 족족 죽여야 할 교적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아자딘을 대하는 지벡의 태도는 공손하기만 하다.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 좀 으스대도 될 것 같은데 역시 많이 진지한 사람이군.’
아자딘은 그리 생각하고 지벡에게 예를 표했다.
“폐를 끼쳤군. 그런데 여긴 어디지?”
“란타릭 백작령과 살라스마 백작령의 경계지입니다. 코라 강이 보이지요?”
“으윽. 아이고 삭신이야. 골이 다 흔들리네. 젠장. 화살로 젝트를 꿰뚫었는데도 안 죽다니, 그거 분명히 선을 넘었어. 더 이상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였어.”
“이단심문관과 심판자가 흑마법을 연구하긴 하지만 확실히 선을 넘었더군요. 그래도 그 젝트 경에게 화살을 박아 넣다니 대단합니다.”
젝트 경 같은 강자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대단하다. 지벡은 아자딘을 그런 이유로 칭찬하고 있었다.
심판자 젝트 경은 교회의 정점. 그것을 108령에 불과한 아자딘이 상해를 입힌 것이다.
“방심하고 있길래 흑강전을 먹인 것이긴 하지만 말야.”
“그렇다 하더라도 젝트 경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당신이 이겼겠군요.”
“…….”
부끄러움이 얼굴을 간질인다. 아자딘은 자신의 말이 변명처럼 들려서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지벡 경, 당신은 그럼 교회로 돌아갈 수 있나?”
“젝트 경이 흑마법을 사용했음을 증언해서 그를 재판에서 이기고 제 무죄를 입증해야겠습니다만, 당신을 구조하고 도망치는 걸 메이야 경도 보았으니 재판을 하면 교적으로 몰려 사형당하겠지요.”
“어, 음… 그건 좀 미안하네.”
“각오한 일입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확실히 각오를 다질 수 있어서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맙다고?”
“예. 애초에 젝트 경이 이상하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의 직위가 높고 교회에서의 영향력이 커서 감히 맞서지도, 그렇다고 그의 휘하에 들어가지도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마음을 정할 수 있어서 홀가분합니다.”
지벡은 본디 젝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왕의 혈통이면서 만인을 존중하는 그의 예의 바른 태도와 우아한 자태를 싫어할 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지금 만난 젝트 경은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검은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힘의 노예일 뿐이었다.
“젝트 경은 신왕진서 사본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령일족들 또한 신왕진서 사본을 찾고 있다고…. 맞습니까?”
“그렇지.”
“교회의 성기사 입장으로서 생각해보자면 신왕진서가 유출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일이군요.”
“하지만 전령일족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어. 황제의 저주를 해지할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우리 일족의 비원이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지. 그리고 원래 신왕진서를 유출시킨 건 우리니까.”
아자딘과 아라엘, 저주로 태어난 두 남매는 바로 그 신왕진서 사본 유출 사건에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령일족은 믿을 수 있습니까? 신왕진서 사본을 모아서 황제의 저주를 풀어내고 나면, 그러고도 신왕진서 사본이 손에 남아 있을 텐데 그 힘을 거머쥐었을 때 과연 믿을 수 있겠냔 말입니다.”
“아니, 그건 아니지. 황제의 저주만 풀고 끝날 리가 없잖아? 틀림없이 그동안 당한 박해를 되갚아 주려고 할걸. 나도 아라가사라서 잘 아는데 우리 일족은 보상 심리가 강해.”
아자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아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몸을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 아프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적어도 저보다는 낫군요. 조직의 일원이 되면 아무래도 조직의 이득, 논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내 조직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아도 모든 조직이 다 그렇다고 합리화하면서 부덕함이나 실수 등에 입을 다물게 되지요.”
“뭐 너무 자책하지 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전령일족 모두가 다 당신같이 명예를 아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아자딘, 과연 그때 당신은 조직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원래 남의 흉은 보기 쉽지만 자기 잘못은 보기 어려운 법이니까.”
다만 아자딘의 경우 원래부터 전령일족의 이단아이기 때문에 젝트의 수련기사였던 지벡보다 그런 점에서 사정이 나았다.
“으윽 아파.”
아자딘은 바늘과 실을 꺼내서 상처를 꿰매려 했지만 몸을 움직이자 격통이 밀려왔다. 늑골이 부러져서 금이 간 것 같다.
“제가 해드리겠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술이 없습니다.”
보통 상처를 꿰맬 때는 독주를 마셔서 몸이 통증에 무디어지게 한 뒤 꿰매는 법. 그러나 아자딘은 호흡을 고르고 바늘을 내밀었다.
“괜찮아. 그냥해.”
“알겠습니다.”
지벡은 아자딘의 상처를 꿰매고 금 간 늑골을 보호하기 위해 몸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좋아. 끝났습니다.”
“잘하는데?”
“명색이 성기사니까요. 구난기사단만 상처 치료하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닙니다. 음?”
지벡은 코라 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살라스마 백작의 영토가 불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쟁이 시작되는 모양이로군요.”
*********
란타릭 변경백인 가르나헤어 백작은 과거 살라스마 변경백의 영토를 침공했다가 패퇴하고 딸을 그와 정략 결혼시키면서 간신히 화해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런데 지금 살라스마 변경백 카젤 백작이 인류를 배신하고 나가가 되었으며 결국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말로 옛 원한을 청산하고 욕망을 채우기 좋은 절호의 기회였다.
“바로 전쟁이군.”
고지대에서 그 광경을 보던 아자딘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 도적들이 란타릭 백작의 공작원이라고 하던데 그걸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피해 가는 게 좋겠지요?”
전쟁이 벌어지는데 굳이 군대와 얽혀서 좋을 게 없다. 특히 지금의 아자딘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그때 아자딘은 뭔가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제길. 보여선 안 될 게 보였는데.”
“뭡니까?”
“케림 산양.”
“이 산양 말입니까? 이것보다 작은 것들은 상인들도 종종 쓰던데요.”
지벡은 아자딘 곁에서 내려다보았다. 불이 피어오르는 요새도 작게 보이는데 여기서 산양을 알아볼 수 있다고?
“내 종사들의 산양이야. 분명해.”
이 거리에서 산양인지 말인지 알아보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누구 산양인지도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들에게 민간인들을 보호하라고 했으니 당연히 가까운 마을에 갔겠지. 그런데… 하필 전쟁이 지금 시작된 거고. 도우러 가야겠군.”
“당신의 지금 몸으로는 싸울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활도 부러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도와줄 수 있나?”
아자딘은 대놓고 지벡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후. 알 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왕의 교회의 성기사인 제게 말입니까? 당신은 정말… 넉살이 좋군요?”
“알 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지. 평생을 함께해도 진가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짧은 순간에도 모든 것을 증명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
“왜?”
“지나친 과찬입니다. 타세요. 당신의 산양은 지금 타기 좀 그렇지요?”
지벡은 자신의 말에 오르며 아자딘에게 손을 내밀었다.
*********
아자딘의 예상대로 미디암과 이스마일은 난민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마을에 도착했다가 란타릭 백작의 군대가 갑자기 습격해와서 요새로 피신한 상태였다.
요새의 주둔군은 고작 스무 명 남짓이었는데 대신 요새 벽이 워낙 튼튼하게 잘 만들어져 있어서 그 정도 인원으로도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그 도적놈들이 왜 사람들을 죽이고 인육을 먹였는지 알겠군.”
미디암은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치를 떨었다.
란타릭 백작의 군대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이 요새를 함락시키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을 셈인 것 같았다.
요새 병력은 얼마 되지 않지만 코라 강을 넘는 교두보를 위협할 수 있는 주요 요충지이고, 현재 살라스마는 왕의 교회가 접수하고 있어 빠른 기동으로 그곳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철저히 코라 강 유역을 먹어치우는 게 정치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란타릭 백작의 군대가 선택한 것은 잔혹한 학살과 처형이었다.
그들은 요새 밖 농장과 어촌을 무차별로 습격해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 덕에 요새 앞에는 화살받이로 내세워진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쳐라!”
뒤의 병사들이 명령하자 발에 밧줄이 묶여서 도망도 못 치는 농민들이 요새 문을 끌이나 쟁기 같은 걸로 때리며 말 그대로 조금씩 갉아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아무리 튼튼한 요새라 해도 결국 뚫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살받이인 민간인들을 죽일 수도 없다.
“어, 어떻게 하지요?”
“젠장. 미친놈. 란타릭 백작 저거 미친 거 아냐?”
요새 병사들과 방어 지휘관은 광기에 가까운 공세를 퍼붓는 란타릭 백작군의 행패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흥분한 사람들의 땀 냄새, 아직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인데도 피어나는 피 냄새, 그리고 쇠와 쇠가 맞물리는 고통의 소리가 요새 앞을 가득 채웠다. 아직 고통은 다가오기 전이건만 절망은 극에 달했다.
“비켜서세요.”
그때 한 소녀가 성벽 위에 올라섰다.
“미디암, 우리는….”
이스마일은 미디암을 말리고 싶었다.
전령일족은 박해받는 존재. 그 정체를 알리고 다녀서 좋을 게 없다. 여기서 민간인들이 몰살당한다 한들 그들이 나설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디암은 변했다. 저 증오스러운 남자를 만난 이후, 휘브리스인들을 지키려 한다.
‘백성을 지키는 것이 아름답다.’
아자딘의 말 한 마디 때문에.
“화살을!”
미디암은 이스마일에게 화살을 부탁하고 성벽 위에서 활을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