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94
93. 아라엘 지파 3
“미디암!”
이스마일이 깃대를 잡고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려 추락하려는 미디암을 붙잡았다.
“아윽!?”
“큭!”
이스마일과 미디암이 서로 손을 잡은 순간 둘 다 손에서 통증을 느꼈다. 카흐산이 얼마나 세게 집어던졌는지 팔이 빠질 것 같다.
“윽! 아, 안돼!”
팔이 아파서 미디암의 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스마일은 카흐산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성벽 위로 돌아왔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카흐산이 가볍게 양 팔뚝으로 미디암과 이스마일의 목을 휘감아 쳤다.
“컥!”
“꺅!”
이스마일과 미디암이 바닥에 쓰러졌다.
“후후, 대단하군. 아자딘의 종사치곤 너무 실력이 좋은 거 아냐? 역시 에타르로군. 너희들이 성인이 되었으면 날 이겼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어리지.”
카흐산은 이스마일과 미디암을 제압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자딘 같은 반편이에게 맡기기엔 너무 아깝구나. 내 종사가 되는 건 어떠냐?”
그때 카흐산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사를 향해 전령이 기습을 감행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음?”
카흐산은 어느새 요새에 올라온 또 다른 전령, 아자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자딘!”
“미안하다. 보고 있었어.”
“……!”
아자딘이 말하는 게 사실이라면 카흐산과 미디암, 이스마일이 결투를 벌일 때 그는 그걸 차분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카흐산은 아자딘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만약 암습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뭐 허풍이지만.’
아자딘이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이 요새로 올라오면서 본 것이지 딱히, 카흐산의 실력을 구경하려고 잠자코 있었던 게 아니다. 미디암과 이스마일이 요새 밖으로 내던져지고 있는데 그걸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아.”
그런 아자딘 곁에는 기사 한 명이 있었다. 아직 성기사인 그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란타릭 군을 지나 교섭역을 자처하고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아자딘,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군. 요만한 꼬맹이일 때 봤는데 많이 컸구나.”
“실례지만 누구신지?”
“카흐산이다. 2년 위 기수의!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활 부수는 카흐산!”
“아라엘에게 맞아서 질질 짜던?”
“이 개자식 감히 날 조롱해!”
카흐산은 아자딘에게 분개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것보다 네놈, 옆에 저자는 누구지? 왕의 교회의 성기사 같아 보이는데?”
“당신 활을 많이 갖고 있는데 하나 빌려주지 않겠어?”
아자딘은 카흐산이 가지고 있는 네 개의 활에 주목했다. 자신의 활이 부서졌으니 대체품을 구해야 하는데 마침 눈앞에 활이 있지 않은가?
“내 질문이 먼저다. 뭐 하는 거냐, 아자딘? 나는 너보다 두 기수 선배다. 선배 하는 말이 우스운가?”
“사실 조금 우습기는 하네. 어린애들을 기습까지 해가며 가차 없이 공격하던데 말야.”
“이 자식.”
“왜 란타릭과 손을 잡았지? 나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못 들었는데. 어떤 조건으로 손을 잡은 거야?”
“네놈 먼저 대답해라. 그 전엔 네놈이랑 더 말을 섞지 않겠어!”
카흐산도 바보는 아니다. 전령이 되었다면 무예만이 아니라 전술이나 전략에도 능통해야 했다.
아자딘으로서도 더 이상 말장난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젝트 경의 부정을 밝히기 위해 내게 협력하는 협력자다.”
“대가는? 금화인가?”
“아니 정의지.”
“정의?”
“황제의 전령의 진짜 사명. 억울한 이들의 청원을 들어서 이 땅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
“아…하하하. 미쳤구나 아자딘.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나는 황제의 전령이 명예롭기 때문에 하는 거지만 너는 그저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전령을 하는 거로군. 목줄 묶인 사냥개처럼 시키니까 하는 삶은 좀 그렇지 않아?”
“웃기지 마라! 나는 나의 뜻으로 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혹독한 선별 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냐?”
“그래 봤자 아무런 미학도 없이 그저 사리사욕을 위해서 아냐? 사냥개도 뼈다귀를 던져주면 열심히 일한다고.”
“끄응. 정말 말이 많은 녀석이군.”
카흐산은 목을 풀고 손을 털며 웃었다.
“역시, 아라엘 님은 널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데. 너 같은 낙오자 놈이 아라엘 님의 동생이란 이유로 한자리하는 꼴은 못 봐주겠다. 지금 여기서 죽여주마.”
“아, 역시 아라엘 쪽인가.”
아자딘은 그 말을 듣고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때 지벡이 아자딘 앞으로 나서서 그를 막았다.
“지금 당신 몸 상태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아자딘을 치료한 그는 지금의 아자딘이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바늘과 실로 상처를 기우긴 했지만 그 상태에서 다시 싸우면 그때는 상처가 덧난다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다. 손톱만 한 상처로도 염증이 도지면 죽는 이들이 속출하는 시대였다.
“뭐야? 성기사를 대신 내세우는 거냐? 재주 좋네? 성기사를 어떻게 구워삶았냐?”
카흐산은 아자딘을 대신해 싸우려 하는 지벡을 보며 황당해했다.
“의기가 드높으면 그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생기는 법이지. 사료만 주면 꼬리를 흔드는 가축이 의기를 이해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만.”
“이 자식! 나 역시 아라엘 님의 뜻에….”
그 순간 아자딘이 움직였다.
카흐산은 아자딘의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워했지만 너무나 어설프고 느리고 약한 아자딘의 움직임을 보고 비웃었다.
‘전령일족의 수치라더니만 정말 그 짝이구나! 그따위 실력으로….’
카흐산은 칼을 뽑을 것도 없다는 듯 아자딘의 칼날에 손날로 칼 옆을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아자딘은 칼을 놓아 버리고 카흐산의 손목을 점했다.
“…어?”
카흐산은 갑자기 정밀해진 아자딘의 움직임과 엄청난 힘에 당황했다. 무엇보다도 접촉한 순간 날뛰는 마력이 아자딘에게서 흐르며 카흐산의 몸 안을 관통했다.
아자딘은 카흐산의 옆으로 걸어가며 거구의 카흐산을 집어 들더니 요새 밖으로 던져 버렸다.
“어어!”
카흐산은 이스마일이 그랬던 것처럼 깃발을 잡으려 했지만 아자딘이 벨트에서 단도를 뽑아 그에게 날렸다. 날아드는 단도의 위세가 강맹해 소의 머리뼈도 뚫을 것 같다.
“큭!”
카흐산은 어쩔 수 없이 깃발을 잡지 않고 요새 밑으로 떨어졌다.
“두고 보자!”
카흐산은 공중에서 화조풍월의 마법을 펼쳐 낙하 속도를 줄이고, 착지의 순간 지면 위를 구르며 최대한 충격을 흡수했다. 그러나 그렇게 구르고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역시 아무런 부상 없이 무사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스마일, 쏴라.”
“네!”
이스마일이 화살을 날리자 카흐산이 욕설을 퍼부으며 화살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와, 대단해요 아자딘!”
미디암이 기뻐하며 달려오는데 아자딘이 식은땀을 흘리는 게 아닌가?
“…어?”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늑골이 부러졌는데 힘을 쓰다니.”
지벡 경이 무리한 아자딘을 보며 혀를 찼다. 휘브리스에서는 사람이 넘어지기만 해도 시름시름 앓다 죽을 수 있다. 하물며 골절과 외상이 함께라면 염증이 도져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령일족이라면 모두 다 날 얕잡아보고 있기 때문에 한 번이라면 쉽게 이길 수 있어.”
“당신네 일족이 전부 다 당신을 얕잡아본다고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당신은 심판자 젝트 경과도 비등비등하게 싸우지 않았습니까? 전령일족들 사이에서도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텐데요?”
“어릴 적에는 내가 좀 못났거든. 그때 모습만 기억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다들 날 얕잡아보지. 덕분에 활을 빨리 보급할 수 있어서 잘되었네.”
아자딘이 손에 월각궁을 두 개 들고 있었다. 카흐산을 집어 들면서 그의 허벅지에 있던 월각궁을 손에 쥐고 빼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 통하겠지. 그래서 말인데.”
아자딘은 그리 말하고 요새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어, 저 말입니까?”
시선을 느낀 요새 지휘관이 당황했다.
“이야기할 게 있어.”
아자딘은 요새 지휘관을 손가락으로 불러 병사용 막사로 들어갔다.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따로 이야기하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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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요새를 넘겨주고 화평을 맺자.”
“네? 그, 그런 짓을 했다가는 살라스마 백작님이 저희 껍질을 산 채로 벗길 겁니다.”
“살라스마 백작은 이미 죽었어. 당신들을 처벌할 사람은 없지.”
“그래도 나중에 살라스마 백작이 될 사람이 저희를 처벌하지 않겠습니까?”
“흠. 이거 원, 휘브리스인이 나보다 아는 게 없군. 생각해봐. 현재 란타릭 백작은 왜 갑자기 여기를 침공했지?”
“그, 글쎄요?”
“살라스마 백작의 적자가 생식능력을 잃어서 상속권을 잃었으니까. 란타릭 백작의 입장에선 공들여 정략결혼을 시켜놨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살라스마의 상속권을 잃을 줄 몰랐지. 그래서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 거야. 크게는 자신의 딸에게 상속시켜주길 바랄 거고, 작게는 어쨌건 코라 강 수역 인근을 먹어두려는 거지. 다른 사람이 백작이 되더라도 유역을 먹어두면 이후 정세에서 유리해질 테니까.”
듣고 있던 성기사 지벡이 감탄했다.
‘대단하군. 정치적 식견도 훌륭하잖아. 요새는 성기사들조차 팔왕의 법을 배우지 않는 판국인데 그가 황제의 전령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란타릭 백작에게 이 요새를 넘겨준다면 저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어쨌건 나중에 살라스마 백작이 될 사람이 보면 우리를 살려두고 싶겠습니까?”
“백성들은 자유롭게 풀어주고 병사인 당신들은 란타릭 백작 편으로 돌아서. 그쪽이 피를 덜 볼 거야. 란타릭 백작이 이 일대를 학살하는 건 아예 이 근처 마을을 지워 버리고 자기네 주민들을 이주시켜서 이곳이 자신 땅임을 확실히 하고 왕의 교회조차 그걸 인정하게 만들려는 거라고. 하지만 원래부터 여기 근처의 봉토를 받은 훈작 기사나 하사관들이 란타릭 백작에게 투항하면 굳이 백성들을 학살할 이유도 없어지지. 합법적으로 이 땅을 점유할 명분이 생기는 거니까.”
“주, 주인을 바꾸란 말입니까?”
요새 지휘관은 과연 훈작 기사인지 아자딘의 말에 껄끄러워했다. 주인을 함부로 바꾸는 짓을 하면 대대로 그 불명예가 남게 된다.
“란타릭 백작은 오히려 대접을 잘해 줄 거야. 그리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약간의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거야. 그건 진짜 영웅호걸이 할 법한 일 아닌가? 높으신 귀족들이야 한소리 하겠지만 이곳 백성들은 당신의 선택을 고결하다고 이해해줄 거라고. 뭣하면 내가 노래라도 지어놓을까?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오명을 쓴 기사의 노래라니 인기 있을 법한 주제잖아?”
“당신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요. 설마 당신들이 여기 요새를 지키는 동안 죽은 살라스마 백작이 살아와서 구해주겠습니까?”
이스마일이 한 마디 추가했다.
“화, 확실히… 이대로 싸워봤자 말라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조건으로 투항하는 게 오히려 명예로운 일이 되겠군요.”
아자딘의 말에 요새 지휘관도 마음이 동한 모양이다.
“그래. 성이 깨지기 전에 스스로 열어주면 살려주는 건 무사로서 당연한 도리이니! 우린 살았어!”
병사들도 다들 안심하고 있는 듯했다.
‘그게 과연 그렇게 될까요?’
미디암은 란타릭 백작의 무시무시한 행각을 떠올리고 반신반의했지만.
‘냅 둬. 기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그때 갑자기 밖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여러 병사들이 동시에 복창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란타릭 백작 가르나헤어다! 전령일족! 교섭에 응하도록!”
란타릭 백작 가르나헤어가 먼저 교섭을 시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