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 the Soulless Unholy RAW novel - Chapter 95
94. 아라엘 지파 4
약 이백여 명 정도 되는 병력이 요새 앞에 집결해 있었다. 이미 근처 마을 약탈이 다 끝났는지 어마어마한 양의 전리품과 밧줄에 묶여 끌려다니는 양민들의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저렇게 약탈품이 많으면 이미 도적 떼나 다름없이 기강이 흐트러져야 하는데 놀랍게도 백작의 군대는 이 상황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란타릭의 백작, 가르나헤어가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병사들의 상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병사들이 일제히 하사관의 말을 복창하면서 요새 안 사람들에게 백작과 협상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요새에 깃발이 내걸리고 기사 두 명과 전령일족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아자딘과 지벡 경, 그리고 요새 경비대장이던 훈작 기사가 교섭차 나온 것이다.
가르나헤어도 기사 한 명, 전령일족 한 명을 대동하고 아자딘 일행을 맞이했다.
“내가 란타릭 백작 가르나헤어다. 너희들 중 실권자가 누구지?”
가르나헤어는 머리가 백발이지만 외모 자체는 젊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야에가스 신족의 피가 진한 탓인지 그에게서는 정갈한 정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마치 눈이 스스로 빛나는 듯한 기묘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두려울 정도로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은색 갑옷을 입은 이런 남자가 돌아다니면 시골 소년들은 그가 천사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그런 놈이 민간인 살해를 저지른단 말이지.’
아자딘은 한숨을 내쉬며 가르나헤어 앞에 나섰다.
“접니다.”
“특이하군. 전령일족, 너는 본래 떠돌이가 아닌가? 그런데 네가 교섭을 결정한다고?”
“전문가니까요. 백작님도 교섭에 전령일족을 대동하셨잖습니까?”
“…….”
가르나헤어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그쪽은… 네프티로군요?”
아자딘은 가르나헤어 경 옆에 서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전령위계 제75위인 네프티였다.
전령의 위계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75위쯤 되면 상당한 실력자이며, 특히 네프티는 가문의 배경 없이 스스로 전령이 된 여성으로 전령일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인물이었다.
아자딘보다 3기수 위의 선배로 그녀는 흥미 깊은 표정으로 아자딘을 보고 있었다.
“날 알고 있나, 아자딘?”
“네. 카흐산보다는 유명인이시잖아요? 75령.”
“그래. 정말 네가 카흐산을 이겼단 말이지?”
“카흐산이 직접 그렇게 말하던가요?”
“그래. 훌륭한 일이지. 일족에게 천대받는 너에게 패했다고 말하면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걸 텐데 그는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보다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귀여운 녀석 아니냐?”
“듣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발언입니다만?”
아자딘에게 패한 사실을 발설하는 것만으로도 명예가 더럽혀져서 숨기고 싶어진다.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아자딘 입장에서는 모욕으로 느껴진다.
“물론 널 깔본 것은 사죄하지, 아자딘. 그래서 말인데, 우리 편에 들어오지 않겠나? 아라엘은 널 데려오라고 하고 있어. 지금까지는 네가 무능력자라고 생각해서 다들 반대했지만 카흐산을 이겼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네가 오면 다들 환영할 거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보다는 백작님과 교섭이 우선일 것 같은데? 요새를 열어드리겠습니다. 대신 요새 안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지요. 아울러서 이 근방 마을 사람들 중 살아 있는 이들을 데리고 후퇴하는 걸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마을 사람들까지 말인가? 성을 개방한 대가치고는 많이 요구하는군.”
“재물을 요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도 성문을 열었는데 명분이 서야 할 거 아닙니까?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성문을 열었다고 하면 명분이 서고, 백작님께서도 굳이 악명을 떨치실 필요 없으니 상호 간에 좋은 거래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자딘이 그리 말하자 가르나헤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 날 모욕할 셈인가?”
“네?”
“지금 악명을 논하는 건 내가 백성들을 죽였음을 비난하고자 하는 게 아니냐? 감히 날 면전에서 비난하다니, 무례하구나!”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들으셨다니 죄송하군요.”
“우선 가면을 벗어라. 교섭 현장에 가면을 쓰고 오다니!”
“제가 좀 보기 흉한 모습이라서, 하지만 뭐 알겠습니다.”
아자딘이 가면을 벗자 란타릭 백작도 그 모습에 당황했다.
“눈이….”
“보기 역겨운 모습이라 감추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흠. 어쨌거나 백성들은 내주지 않겠다. 요새 문만 열고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떠나가라. 본래 이 정도 요새 공략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네?”
“너희 중에 브란드라고 하는 노인이 있을 거다. 그놈은 내 저택에서 서기로 근무했던 놈인데 횡령과 도둑질의 죄를 범했으니 내게 넘겨주길 바란다.”
“브란드를 말입니까?”
“그래. 그를 넘겨주지 않는다면 투항도 인정하지 않겠다.”
“흐음. 고작 다 늙어빠진 노인네 하나를 두고 백작님이 직접 나설 일입니까?”
“그 녀석이 훔쳐 간 게 내게 소중한 물건이거든. 아울러서 그 녀석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섬기던 놈이다. 그런 녀석이 배신했는데 살려서 보내면 내 위신에 문제가 될 헛소리를 떠들 공산이 크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백작님의 요구사항은 요새 문을 열고 떠날 것, 브란드의 신병을 양도할 것, 백성들의 신병도 넘겨줄 수 없으며 저희들 목숨만 살려서 보내주겠다, 그런 뜻이군요?”
“그렇다.”
그러자 경비대장이 아자딘을 재촉했다.
“내줍시다. 그거, 요새 밖 백성들이나 서기 한 명 목숨만 넘겨주면 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아직 교섭 중인데 벌써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아자딘은 경비대장의 말에 혀를 찼다.
“알겠습니다. 그럼 요새로 돌아가서 상의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요.”
“아니 여기서 직접 결정해라.”
백작은 아자딘이 돌아가겠다는 걸 만류했다.
“빨리 성문을 열지 않으면 결국 끝까지 저항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너희들도 교섭에 응한 것은 성문을 열고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었겠지? 그렇다면 뭐가 문제냐? 백성들의 목숨? 브란드의 목숨? 아 그거냐? 혹시 브란드가 나에 대해서 뭔가 이상한 헛소리를 하더냐?”
“그는 미쳐 버렸습니다. 도적 떼에게 붙잡혀 처자식을 자기 입으로 먹어야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실성해 버렸습니다.”
“그런가? 그럼 더더욱 별거 아니겠군. 설마 노망난 노인네 하나 때문에 너희가 여기서 몰살당하고 싶진 않겠지? 그러니 이 자리에서 결정하도록.”
백작은 강압적으로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 내릴 것을 요구했다.
“저… 드, 들어드립시다. 어차피 백작님 같은 대귀족이랑은 저희가 감히….”
경비대장이 또다시 교섭 현장에서 보여선 안 될 약한 모습을 보이자 아자딘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퍽!
“윽?!”
경비대장이 실신하자 지벡 경이 자연스럽게 그를 부축했다. 마치 아자딘이 그를 입 다물게 할 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호오?”
전령일족과 왕의 교회의 성기사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본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아하니 아직 저희들의 방어력을 맛보지 못하신 모양인 것 같군요, 백작님.”
아자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의 방어력?”
“예. 저까짓 요새 하나 떨어뜨리는 거 식은 죽 먹기니까 너희들이 성문을 열고 항복해봤자 줄 거 하나 없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저희는 저희가 파는 상품의 가치를 입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가 저 요새 안에서 항전해서 백작님의 병력을 야금야금 갉아내면 백작님도 백성들과 노망난 서기 한 명 목숨쯤은 너끈히 얹어주실 마음이 생길 겁니다.”
“감히 날 협박하는 건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지? 네놈이랑은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왜냐면 저는 황제의 전령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목숨이 소중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걸 제 사명으로 삼고 있는지라.”
“황제가 뒈진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말인가? 그렇다면 좋다. 지금 즉시 내가 잡아두고 있는 백성들을 죽이도록 하지. 네놈들이 교섭에 응하지 않으면 내가 붙잡고 있는 백성들을 죽이겠다. 살라스마의 영민들을 줄이는 건 내 전략에도 큰 도움이 되니까. 어때? 백성의 목숨을 귀하게 여긴다면 어떤 선택을 할 거냐?”
“으음….”
듣고 있던 지벡이 침음성을 냈다. 왕의 교회의 성기사이지만 하급귀족 출신인 그는 이런 광기에 가득 찬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하급귀족들 간에 토지나 물, 지하수나 샘을 놓고 분쟁이 벌어질 때는 백성은 철저히 보호받았다. 설령 그게 가축 취급일지언정,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한 보호욕을 보였다.
백성이 죽으면 소출이 급감한다. 하급귀족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가 대귀족인 란타릭 백작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대도시가 영지이기에 언제나 인구가 유입되는 곳을 가지고 있으며 잘 훈련된 병사를 육성할 수 있고, 영민들을 개척촌으로 보내 재배치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대귀족쯤 되면 정략을 위해서 남의 영지 백성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즉, 이 남자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죽일 수 있다.
‘사람의 목숨을 단지 위협용으로 죽일 수 있다고 협박하는 것인가? 혐오스럽군.’
왕의 교회의 성기사로서는 왕화의 빛을, 야에가스의 피를 이어받은 귀족들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눈앞의 이 란타릭 백작의 발언은 혐오스럽고 추악했다.
과연 아자딘은 뭐라고 대답할까?
“아, 그거 참 재밌는 협박이로군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이전부터 백성들을 학살했습니다. 제가 성문을 열어줘도 어차피 백성들을 죽일 거 아닙니까? 성문을 안 열어줬다고 요새 앞에서 사람들을 팍팍 죽여봐야 당신 품위만 망가뜨릴 뿐입니다. 평소에 품위 신경 안 쓰셨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만.”
“흥. 백성들을 죽인다고 내 품위에 손상이 간다고?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자비를 베풀고 있는 거야.”
란타릭 백작은 뻔뻔하게 그렇게 말했다.
죽이는 게 자비라니. 백 보 양보해서 뭐 그게 사실이라 쳐도 백작의 영향을 받은 도네어 같은 놈들이 저지른 짓은 뭔가? 놈은 인간을 끔찍하게 고문하고 가족들끼리 서로 잡아먹게 했다. 그 어디에서 자비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제 조건은 확고부동합니다. 요새 성문을 개방하는 조건으로 저 백성들을 포함해서, 당신의 서기 브란드의 목숨, 백성들의 목숨, 이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의 목숨을 보장해 줄 것. 이 요구사항을 어기고 제 눈앞에서 사람들을 죽여댄다면 전 다른 수를 쓸 뿐입니다. 당신 손에 백성들의 목숨을 붙여두는 것 자체가 그들을 죽이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기 때문이지요.”
“당장 붙잡고 있는 이들부터 죽여대고 네놈들도 죽일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아자딘은 대답 대신 가면을 쓰고 옆에 있던 전령일족 75령, 네프티를 바라보았다.
“네프티, 당신은 아라엘 편이지요? 카흐산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래.”
“이런 얼간이와는 왜 손을 잡았습니까?”
“뭣?!”
백작은 자신 앞에서 모욕을 가하는 아자딘을 보며 분개했다.
“이 자식!”
백작이 분개해서 칼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