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05
1005회. 내가 거절하면요?
스타우로스 공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야인을 보며 말했다.
“네 영기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뛰어나다. 작위를 받았느냐?”
“안 받았습니다.”
연적하는 작위가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이곳에 와서 뭘 받은 일이 없는 터라 그렇게 답했다.
그러자 스타우로스 공작은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작, 아직도 야인에게 작위를 내리지 않소?”
“보수적인 영주들은 꺼려 합니다만 최근에는 많이 완화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됐군. 저 정도 영기면 소드 익스퍼트(전문가) 수준은 될 것 같은데……. 작위조차 받지 못했다니.”
“야인을 너무 좋게 보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영기는 많고 적음을 떠나 마나 유저(Mana User)의 상대가 못 되지 않습니까?”
스타우로스 공작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후작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대체로 ‘마나 유저’가 ‘영기 수련자’보다 두 단계 위의 무력을 가진 것도 사실인 까닭이다.
“그렇다 해도 저 야인의 영기는 소드 비기너(입문자) 수준은 상회할 것 같은데. 왜 푸토코아 백작이 야인을 병사로 썼는지 모르겠군.”
“푸토코아 백작이 보수적이라 그랬을 겁니다.”
보수적이라는 말에 스타우로스 공작은 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본래 고대의 인간은 수인들처럼 영기를 수련했다.
그러다 차츰 마나(Mana)를 각성하게 됐고, 종국에는 영기를 버리고 ‘마나의 길’로 들어섰다.
영기가 생명체의 정기(精氣)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마나는 만물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
그것이 영기보다 마나가 더 뛰어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인간과 달리 수인족(獸人族)은 영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마나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인간은 ‘마나의 선택’을 받은 스스로를 상위의 존재로, 그렇지 못한 수인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수인은 마나의 저주를 받았다’는 속설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 이유들로 인간은 수인을 배척하고 멸시했다.
마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 중에는 그걸 제 주변의 수인 탓으로 돌리는 자들도 있었다.
대체로 보수적인 자들이 매사를 수인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숲으로 들어가 그런 수인들과 어울리고, 심지어 영기까지 수련하는 인간이 ‘야인(野人)’이다.
로디나 대륙의 인간들은 야인을 ‘인간의 고귀함을 버리고 수인과 붙어먹은 부정한 존재’로 여겼다.
그러니 푸토코아 백작이 보수적이라면 아무리 야인이 뛰어나도 작위를 내렸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전후 사정을 파악한 스타우로스 공작은 ‘굳센 숲’ 부족 출신의 야인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의 관심은 또 다른 생존자인 코드란테스 백작에게 향했다.
“야인에게 알아야 할 건 다 알아낸 것 같구려. 코드란테스 백작을 만나러 가 봅시다.”
말과 함께 공작은 돌아섰다.
전투가 벌어진 ‘히르헤라 균열’에서 ‘스쿠툼 원정군’과 제때에 만나려면 아무리 비공정으로 날아다닌다 해도 서둘러야 했다.
궁정 마법사 칼로스도 미련 없이 공작의 뒤를 따랐다.
홀로 남겨진 베르나르도 후작이 야인에게 말했다.
“그대를 고용한 푸토코아 백작은 ‘히르헤라 균열’에서 전사했네. 그대가 원한다면 남작의 작위를 내리고, 내 휘하의 기사단에 받아 줄 용의가 있네만. 어떤가? 아, 물론 치료를 마친 후에 말일세.”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다소 개방적인 베르나르도 후작은 ―공작에게 후한 평가를 받은 야인을― 가신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연적하는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므로 덥석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기묘한 눈으로 야인을 보았다.
야인이 남작의 작위를 생각해 보겠다니?
영지의 귀족들이 알면 펄쩍 뛸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인지라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알겠네. 부상에서 회복되면 나를 찾아오게.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함세. 나는 ‘히르헤라 균열’이 아니면, 클루톤의 영주성에 있을 걸세.”
“예.”
연적하가 답하자 베르나르도 후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홀로 남겨진 연적하는 다소 황당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 허전한 게 마치 광풍이 쓸고 지나간 느낌이다.
“그나저나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반지를 낀 뒤로 말은 통했지만, 모르는 말들이 너무 많아 어린 시절 글공부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작위, 마법사, 야인, 마나, 소드 익스퍼트, 마나 유저 등등…….
“‘히르헤라 균열’은 빙벽의 갈라진 틈새를 말하는 거 같고…….”
그렇게 하나하나 떠올리니 얼추 흐름을 알 것도 같았다.
왜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빙벽을 두고 싸움이 일어난 거다.
“상계도 하계와 별 차이가 없다는 건가.”
‘왕들의 하늘’이나 ‘네 번째 하늘’이나 다툼은 여전했다.
그러려면 상계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생각해 보라.
기껏 도(道)를 닦아서 상계로 올라갔더니 하계처럼 패를 갈라 대가리 터지게 싸우고 있다. 이래서야 득도가 무슨 의미냐 말이다.
“모르겠다. 젠장.”
고개를 젓던 연적하는 침상에서 천천히 내려갔다.
남궁연이라면 모를까?
자신처럼 아둔한 사람에게는 너무도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한쪽 벽에 세워 두었던 막대기를 짚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괴팍한 여자가 달려와서 길을 막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만난 고관들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던 모양이다.
‘왕들의 하늘’처럼 이곳도 철저한 신분 사회라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하계에서 생각하는 상계와 진짜 상계의 모습이 이렇게 다르다니.
“쩝! 상계에는 부처와 신선들만 살 줄 알았는데…….”
구시렁거리며 걷다 숙소로 돌아오니 괴팍한 여자가 쪼르르 달려왔다.
“부러진 다리로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요? 한시도 가만히 못 있겠나 본데, 자꾸 이러면 아무리 야인이래도 다리가 뒤틀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아야죠.”
잔소리는 여전했지만 말투나 표정은 이전보다 부드러웠다.
연적하가 여자와 눈을 맞췄다.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다소 황당한 소리를 했다.
“뭘 봐요? 야인 주제에. 빨리 나아서 떠날 생각이나 해요. 주변에 야인이 있으면 ‘마나의 축복’이 비껴 간다고요.”
“야인이 뭐예요?”
연적하의 말에 놀란 앰버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어맛! 뭐예요? 대륙공용어를 할 줄 알아요?”
“할 줄 알게 됐네요. 야인이 뭔지나 말해 봐요.”
“본인이 야인이면서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모르니까 묻죠. 입 아프게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연적하의 강압적인 태도에 앰버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떠나기 전에 ‘후작가의 가신(家臣)이 될 야인이니 잘 돌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깊은 숲에 짐승과 사람의 혼종이 사는데 그걸 수인이라고 해요. 숲에 살면서 수인과 관계하는 인간을 야인이라 하고요.”
“내가 야인이라고요?”
“처음에 대륙공용어를 못 알아들으셨잖아요?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말을 하고, 또 후작님도 야인이라고 말씀하셔서……. 야인 아니세요?”
“맞아요. 야인.”
연적하는 새로운 신분을 만들 자신이 없어서 그냥 맞춰 주기로 했다.
앰버가 입을 삐죽였다.
자신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야인이면서 왜 야인을 모르는 것처럼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후작이면 신분이 높나요?”
순간 앰버는 기막힌 얼굴로 청년을 보았다.
‘후작이 뭔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후작의 지시를 생각해 꾹 참았다.
“왕 아래에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오등작이 있어요. 후작이면 엄청 높으신 귀족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연적하는 이참에 궁금한 걸 다 물어보았다.
질문이 끝나자 앰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청년을 보았다.
‘아무리 야인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지? 그 정도는 수인들도 알겠다.’
하지만 후작가의 가신이 될 청년에게 ‘왜 그렇게 무식하냐!’고 따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성심껏 답했다.
“……‘마나의 축복’을 받으면 마나를 자유롭게 쓸 수가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마나 유저’라고 불러요. 이제 됐나요?”
앰버가 지친 얼굴로 청년을 보았다.
아직 ‘마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그녀는 야인과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대충 알겠네요. 고마워요. 가 보세요.”
연적하의 말이 끝나자 앰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나를 야인이라고 한 거였구나. 야인 맞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의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을 알고 나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마나 유저가 영기 수련자보다 두 단계쯤 더 강하다는 건 또 뭐야? 그건 검기로 검강을 이긴다는 소리잖아. 그 정도로 마나가 뛰어나다고?”
그건 내공과 영기의 차이와 비슷했다.
영기를 쓰면 반푼이 취급을 받는 것도 그래서다.
“마나와 영기가 공존하지 않는다니 이제 와서 마나를 수련할 수도 없고. 난리 났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나 유저’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상대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날 오후.
치료사라는 또 다른 여자가 약그릇을 들고 숙소로 찾아왔다.
연적하는 약을 받자마자 군말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진기요상을 하는 것과 비슷하게 내상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역시 상계의 약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일리아나가 빈 그릇을 받침대에 올리며 말했다.
“못 보던 반지를 끼셨네요? 갑자기 로디나어를 할 수 있게 된 건, 역시 그 반지 때문인가요?”
“네.”
연적하는 선선히 시인했다.
어차피 후작이 보는 앞에서 받은 반지라 속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치료사라는 이 여자는 괴팍한 여자와 달리 태도의 변화가 없어 대하기가 편했다.
“아티팩트까지 주시다니, 후작님이 통 큰 투자를 하셨네요.”
연적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은 궁정 마법사에게 받았지만 딱히 알려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요.”
“‘산의 부족’이시고요?”
“아뇨. ‘굳센 숲’이에요.”
일리아나가 빙그레 웃었다.
‘굳센 숲’이라는 이름에서 야인들의 순수함이 느껴진 탓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푸토코아 백작령에서 당신이 살아 있는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가만있지 않으면요?”
“돌아와서 푸토코아 백작령을 위해 일하라고 하겠죠.”
“내가 거절하면요?”
“당신은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후작님이 당신을 가신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니까. 그 대신 영지의 야인들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몰라요.”
“괴롭힌다는 건가요?”
“심하면 토벌을 할 수도 있어요.”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토벌을 해요?”
“죄야 만들면 있죠. 야인 부족들은 산속에 살면서 세금을 내지 않잖아요. 영주 입장에서는 도둑이나 다름없죠.”
“야인 부족이 도둑질도 하나요?”
“안 하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살아가는데 도둑질을 어떻게 해요?”
말을 하고 일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야인이 그걸 왜 나에게 묻지?’
“그래서 내가 백작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가요?”
순간 화들짝 놀란 일리아나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푸토코아 백작령에서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그에 대한 대비를 하라고 말한 거예요.”
“아하! 알려 줘서 고마워요.”
연적하가 새삼스럽게 약제사를 보았다.
마음 씀씀이나 생김새가 ‘왕들의 하늘’에서 처음 만난 공지유를 닮은 것도 같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나는 쑥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