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10
1010회. 그럼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 볼까?
로디나 대륙 최북단.
캄포데네브(Campodenev, 일명 대설원).
히르헤라 지역.
해거름 무렵.
경공술로 설원을 달려가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병사들이 막고 있었다.
문득 일리아나의 말이 떠올랐다.
―이쪽 방향으로 계속 가다 보면 히르헤라가 나와요. 병사들이 길을 막고 있다니까, 오히려 찾기는 쉬울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정말 히르헤라에 도착한 것일까?
연적하는 반가운 얼굴로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즉시 돌아가지 않으면 체포하여 죄를 물을 것이다!”
“아, 나는 베르나르도 후작님을 만나러 온 사람입니다.”
연적하가 후작의 이름을 거론하자 병사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십인장인 에밀이 병사들을 대표해 나섰다.
“어디의 누구십니까? 저는 경비대의 십인장 에밀입니다.”
“엔아르케에서 온 엘리오라고 합니다.”
“엘리오 님이셨군요. 베르나르도 후작님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습니까?”
에밀은 엘리오를 자신과 같은 평민으로 생각했다. 복장도 수수한 데다, 성도 밝히지 않아서다.
“비슷합니다. 몸이 낫는 대로 찾아오라고 했으니까요.”
“그러시군요. 베르나르도 후작님은 안쪽 숙영지의 막사에 계십니다. 제가 막사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적하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에밀은 빙긋 웃음으로 화답했다.
한참 설원을 걷던 에밀이 지나가듯 물었다.
“후작님의 신임이 대단한가 봅니다?”
“왜요?”
“아픈 사람을 이런 곳으로 부르셨으니 하는 말입니다.”
에밀은 엘리오가 아직 병중에 있을 때 후작이 부른 것으로 오해했다.
“신임은 모르겠지만, 작위를 내리겠다고는 하시더군요.”
“아! 작위요? 부럽습니다.”
에밀이 놀란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데 벌써 작위를 받게 된다니!
“실례지만 엘리오 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스물일곱요.”
“와! 저는 서른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아직 마나를 각성하지 못해서……. 십인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네요.”
“십인장이면 부하가 열 명인가요?”
“예, 병사 열 명을 지휘하면 십인장, 백 명을 지휘하면 백인장이라고 부릅니다. 십인장은 경험 많은 일반 병사들도 할 수 있지만, 백인장은 반드시 수련기사들 중에서 선발합니다.”
엘리오가 군조직을 모른다고 생각한 에밀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는 상대가 아직 평민일 때 친분을 다져 둘 요량이었다.
“그럼 기사들은요?”
상당히 포괄적인 질문이지만 에밀은 용케 알아들었다.
“아직 작위를 받지 못한 기사들을 소위라고 합니다. 소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중대의 깃발을 담당해서, 기수(旗手)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깃발요?”
연적하는 녹림의 깃발을 떠올렸다.
가장 뛰어난 기사가 왜 그런 하찮은 걸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깃발은 곧 그 중대의 표상(表象)이자 명예니까요. 전투 중에 깃발을 잃어버리는 것은 중죄입니다. 반대로 적의 깃발을 빼앗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고요.”
“아하!”
연적하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예의상 장단을 맞춰 줬다.
깃발 따위야 다시 만들면 그만인데 어지간히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다.
“남작의 작위를 받는다면 중위로 임명될 겁니다.”
“중위요?”
“예, 영지별로 보통 세 명에서 네 명의 중위를 두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령의 중위가 세 명인데, 조만간 네 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밀의 설레발에 연적하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너무 앞서가지 마세요. 당장 작위를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요 뭐.”
게다가 야인 출신인 자신을 ‘마나 유저’들과 똑같이 대접해 줄지도 의문이다.
아직 그걸 모르는 에밀은 엘리오가 겸손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하하! 전혀 헛된 꿈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하튼 중위 위로 대위가 있고, 그 위로 부장군, 대장군, 원수의 순입니다.”
“중위 위로도 많네요?”
“고위 귀족들이 많으니까요. 대위는 자작, 부장군은 백작, 대장군은 후작, 원수는 공작이라는 식이지요. 참고로 총사령관은 에스카토스 4세 전하십니다. 북방의 전투에 참가하시는 경우가 없어서 먼발치에서도 본 적은 없지만요.”
“혹시 작위가 높을수록 검술의 경지도 높은가요?”
“그건 반반입니다. 보통 소드마스터는 백작, 소드 익스퍼트(전문가)는 자작, 소드 비기너(입문자)는 남작의 작위를 받습니다. 여기서 작위를 물려받게 될 경우 약간의 오차가 생깁니다. 후계자의 검술 경지가 높지 않아도 선친의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요.”
“아하!”
“전투에서 그런 지휘관을 만나면 아주 피곤해집니다. 영지별로 임무를 부여하는 것도 그래서죠. 영주 손에 자기 영지병의 생사를 맡긴다고나 할까요? 살든 죽든 너희들의 문제다라는 거죠. 고위 귀족들이 수련에 열심인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물론 제정신을 가진 귀족들에 한해서지만요. 아,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여하튼 영지별로 전투에 투입된다는 것만 기억해 두십쇼.”
에밀은 귀족들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인 견해를 서둘러 덮었다.
히르헤라로 들어가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덩이가 보였다.
구덩이를 본 연적하는 열흘쯤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메케한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던 구덩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에밀이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북방지대에는 저런 게 없는데 왜 히르헤라에만 있는지. 와이번의 둥지라는 말도 있는데……. 그런 거치고는 크레이터 주위가 너무 깨끗해서. 비늘은 거녕 뼛조각 하나 없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게다가 곧 알게 되겠지만 히르헤라 전체가 이 모양입니다. 와이번의 둥지가 아무리 넓어도 그 정도는 아니죠. 분명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마수의 짓이 분명합니다.”
연적하는 그것이 유성우(流星雨)의 흔적임을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병사들에게까지 감춘 것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한 식경(약 30분)쯤 길을 따라 북상하니 마침내 빙벽이 나왔다.
빙벽 뒤편 후방에 화려한 막사들이 보였다.
연적하는 에밀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연신 빙벽을 살폈다.
빙벽의 균열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두 배쯤 넓어져 있었다.
그가 빙벽에 관심을 보이자 에밀이 불쑥 말했다.
“창조신의 스쿠툼(방패)에 균열이라니, 놀랍죠?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왕국에서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제국의 마법사가 오면 어떻게든 메꿔 줄겁니다.”
문득 궁정 마법사 메이지 칼로스를 떠올린 연적하가 물었다.
“왕국의 마법사도 있지 않나요?”
“아! 메이지 칼로스 님은 5서클이시거든요. 5서클의 ‘아이스 월’로 막아 봤는데 금방 깨졌답니다. 칼로스 님 말씀이 빙벽과 비슷한 강도를 갖추려면 6서클 마법인 ‘메가 아이스 월’을 써야 한답니다.”
“그래서 제국의 마법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5서클의 ‘아이스 월’로는 사나흘이면 다시 뚫리거든요. 지금은 메이지 칼로스 님께서 사나흘에 한 번씩 ‘아이스 월’로 틀어막고 있는 중입니다. 제국의 마법사가 도착할 때까지 메이지 칼로스 님을 지키는 게 우리 임무죠.”
“그래도 생각보다 잠잠하네요?”
열흘 전의 피 말리는 전투를 생각하면 빙벽 앞은 수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그럴 수밖에요.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불사조 기사단과 푸토코아 백작가의 그리폰 기사단으로도 충분한데, 왕실의 팬텀 기사단까지 와 있으니까요. 특히나 히르헤라 주둔군의 최고 지휘관이 소드마스터인 에스카토스 공작님 아닙니까.”
“…….”
연적하는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베르나르도 후작의 막사 앞에 도착했다.
막사를 지키고 있던 후작의 친위대원들을 대표해 최고 선임자인 수련기사 마커스가 나섰다.
“무슨 일이오.”
그러자 에밀이 답했다.
“저는 경비대의 십인장 에밀입니다. 이쪽은 엔아르케에서 온 엘리오라는 분인데, 후작님과의 면담이 약속되어 있다 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마커스가 에밀과 엘리오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돌아가고, 당신은 잠시 기다리시오.”
마커스의 지시에 에밀은 군말 없이 왔던 길을 돌아갔다.
미커스는 엘리오의 감시를 다른 친위대원들에게 맡기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온 마커스가 엘리오에게 다가갔다.
“작위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작위가 없다는 대답에 마커스의 말이 본래대로 돌아갔다.
“평민이라니 주의 사항을 알려 주겠소. 대화 중에 후작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아서는 안 되오. 그리고 후작님이 묻는 말에 짧고 간단하게 답하시오. 알았으면 들어가 보시오.”
연적하는 사내에게 눈인사를 보낸 뒤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의 현황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베르나르도 후작이 고개를 힐끔 돌렸다.
엔아르케라고 하기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야인이었다.
“여어! 부상이 꽤 심하다고 들었는데 벌써 나은 건가?”
“치료사의 실력이 좋았습니다. 모두가 후작님 덕분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기이한 눈으로 야인을 보았다.
대륙 공용어도 모를 정도로 폐쇄된 생활을 한 야인치고 꽤나 격식 있는 행동이 아닌가 말이다.
“일리아나의 실력이야 클루톤까지 알려질 정도로 정평이 나 있지. 내가 자네를 엔아르케로 데리고 간 것은 거리도 가깝지만, 그곳에 일리아나가 있기 때문이었네.”
“그 정도로 유명한 치료사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도 자네처럼 야인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
“예, 떠나기 전에 말해 주더군요.”
“역시 그랬군. 자네에게라면 과거를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했네.”
“치료사에 대해 잘 아시나 봅니다?”
“‘오리샤’는 숲의 수호자이자 약초 치료사의 신이라네. 그런데 일리아나가 믿는 신은 ‘오리샤’가 아니야. 오히려 전쟁 수호신인 ‘샤스트라 파라크티’를 믿고 있지. 치료사와 전쟁 수호신이라니, 꽤나 흥미롭지 않은가?”
연적하는 전쟁 수호신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본래 그녀는 왕실 ‘옵티머스 기사단’의 종군(從軍) 치료사였네. 그런데 일 년 전쯤 돌연 사직하고 엔아르케로 내려왔지. 그녀를 내 ‘불사조 기사단’의 종군 치료사로 끌어들이려고 하다가 알게 된 것들이네.”
“아!”
그제야 보이는 엘리오의 반응에 베르나르도 후작은 피식 웃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확실히 애송이다.
“자아! 그럼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 볼까? 나를 찾아온 걸 보면 작위에 뜻이 있는 것 같은데, 맞나?”
“예.”
연적하는 선선히 인정했다.
로디나 대륙에서 야인의 신분으로는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당장 푸토코아 백작가에 복수를 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평민 신분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귀족을 죽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귀족이라면, 얼마든지 ‘유스티아 여신’의 이름으로 결투를 신청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전에 자네의 오라(Aura)를 보았으면 하는데.”
말과 함께 베르나르도 후작이 자신의 검을 휙 던졌다.
후작의 검을 받아 든 연적하는 즉시 검기를 방출했다.
츠으으―.
검 주위로 희뿌연 안개가 피어 올랐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포스’로 불리는 검기였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베르나르도 후작의 말에 연적하는 영기를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우웅―.
묵직한 검명과 함께 검신이 하얗게 빛났다.
외관상 ‘소드 익스퍼트’의 ‘마나 오라’와 같았다.
엘리오의 얼굴을 살피던 베르나르도 후작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의 표정이 조금 전 ‘포스’를 선보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다.
순간 ‘그게 전부인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눌렀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엘리오가 소드마스터의 전유물인 ‘마나(혹은 오라) 블레이드’까지 선보인다면 아직 ‘소드 익스퍼트’인 자신과 비슷해지는 까닭이다.
야인과 비슷한 경지의 후작이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베르나르도 후작이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오라’는 약해지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베르나르도 후작이 입을 열었다.
“됐네. 이제 그만 ‘오라’를 거두게.”
순간 검에 맺혀 있던 광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