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16
1016회. 엘리오 경과 함께 다니겠습니다
아이스 오우거가 달아난 뒤로 빙벽 앞은 고요했다.
아이스 오우거의 출현에 그보다 하위 마수들이 달아난 탓이다.
케일과 그의 병사들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연적하가 데니스 로빈 남작을 불렀다.
“남작님?”
“작전 중에는 중대장님이라고 불러라.”
“예, 중대장님. 균열 정찰은 언제부터 하면 됩니까?”
그러자 데니스 로빈 남작이 엘리오를 힐끔 보았다.
곧 남작이 될 그에게 균열 정찰 임무를 맡긴 것은 데리고 있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정도 말해 주면 알아서 눈에서 멀어질 것 같았는데, 정말 균열 정찰을 제대로 해 볼 생각인 걸까?
“내가 경에게 말한 순간부터 균열 정찰은 시작된 거다. 경도 곧 지휘관이 될 사람인데 그 정도는 알아서 판단해라.”
“아!”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상관인 남작이 자신에게 그 정도 권한을 줄 줄은 몰랐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장비로 최선을 다할 수 있겠나?”
데니스 로빈 남작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엘리오의 장비라고 해 봐야 ―검을 걸 수 있는 고리가 부착된― 벨트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가벼워야 움직이기 좋습니다.”
“입만 살아서……. 쯧! 가 봐라.”
데니스 로빈 남작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기사쯤 되면 체인 메일도 천옷처럼 가볍게 느껴지니 엘리오의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에 불과했다.
연적하는 데니스 로빈 남작에게 묵례를 해 보이고 균열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황당한 얼굴로 보던 데니스 로빈 남작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엘리오 경, 그쪽이 아니야.”
자살하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왜 홀로 균열을 향해 가냐 말이다.
그러나 연적하는 어깨 위로 손을 ‘척!’ 들어 보일 뿐 멈춰 선다거나,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
정말 엘리오가 균열을 향해 직진하자 데니스 로빈 남작이 버럭 소리쳤다.
“엘리오!”
그의 부름에도 끝내 엘리오는 균열로 들어가 버렸다.
깜짝 놀란 데니스 로빈 남작이 균열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엘리오는 균열을 통과해 저편으로 넘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던 파비안이 설원에 중대 깃대를 박아 넣고 데니스 로빈 남작의 곁으로 달려갔다.
“중대장님. 엘리오 경은 어떻게 됐습니까?”
“벌써 빙벽 너머로 건너가 버렸다.”
“찾으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장비도 변변치 않으니 이대로라면 바로 죽을 겁니다.”
“찾으러 가면? 우리는 살 수 있고?”
“…….”
데니스 로빈 남작의 말에 파비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경도 봤잖나. 내가 불러도 스스로 걸어갔다고. 내가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기는 하지만…….”
파비안이 말꼬리를 흐렸다.
야인 출신임을 알게 된 뒤로 따돌렸지만 그래도 같은 막사를 썼다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균열 정찰을 하랬지 누가 균열로…….”
흥분해서 소리치던 데니스 로빈 남작의 말이 뚝 끊어졌다.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병사들에게 ‘균열 정찰’은 당연히 ‘빙벽 안쪽 인간계의 정찰’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봐야 균열의 입구까지가 전부다.
하지만 상호 교감 없이 단순히 지시만 놓고 보면, ‘균열을 살피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제야 데니스 로빈 남작은 ‘자신과 야인 출신 엘리오 사이에 뜻이 엇갈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받아들였다 해도 누가 그런 지시에 따른단 말인가.
더구나 변변한 장비나 병력의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입만 뻐끔거리는 데니스 로빈 남작에게 파비안이 다시 물었다.
“이대로 포기합니까?”
그러자 데니스 로빈 남작이 심각한 얼굴로 반문했다.
“기사들의 막사에서 엘리오 경을 괴롭히거나 따돌린 적이 있나?”
“엘리오 경이 야인 출신이라 따돌리기는 했습니다. 저희도 야인 출신의 기사는 처음이라…….”
“설마 알파 중대가 자신을 따돌린다고 생각해서 항명하지 못한 건가?”
“…….”
파비안은 왠지 그건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니스 로빈 남작은 혼자서 점점 심각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오가 알파 중대의 집단 따돌림에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게 아니고서야 항명이나 확인의 과정도 없이 어떻게 균열로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느냐 말이다.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엘리오 경을 설득하러 균열 안으로 들어갈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균열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는가?’도 문제지만, 그보다 자리를 비워도 되는 기사가 없었다.
마나 소드를 다룰 수 있는 기사(소위)들은 소대(小隊)마다 한 명씩 있다.
조금 전의 경우처럼 마수가 출몰하면 기사가 소대를 이끌고 싸워야 한다.
데니스 로빈 남작은 그걸 지적한 것이었다.
문득 파비안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달려오면서 설원에 박아 놓은 깃발이 보였다.
‘제길…….’
아무리 봐도 알파 중대에서 행동이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기수의 역할은 중대장을 보좌하는 것이다.
그 말은 중대장의 양해를 구하면 된다는 소리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파비안은 기사의 명예를 생각해 당당하게 나섰지만, 내심 남작이 만류해 주기를 바랐다.
균열 너머 마족들의 땅 타메이온은 기사 둘이서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데니스 로빈 남작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후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엘리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자신의 미래가 암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마지막까지 엘리오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파비안 경. 훌륭한 결정이다. 경은 우리 알파 중대의 표상이자, 귀감이 될 것이다. 깃발은 나에게 맡기고 차이가 더 벌어지기 전에 출발해라.”
데니스 로빈 남작의 말에 파비안은 괜히 나섰다며 자책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파비안은 롱소드를 뽑아 들고 즉시 균열 속으로 달려갔다.
***
균열 건너편 타메이온.
빠르게 균열을 통과한 연적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이쪽 편에도 마수가 바글거리지는 않았다.
“이러니 하루에 열 마리 정도 나온다고 했겠지.”
물론 마수의 크기와 능력을 생각하면 굉장한 일이기는 하다.
왕궁 차원에서 인근 영지를 끌어모아 막지 않았다면 아이스 오우거 같은 놈들이 마을 몇 개는 몰살시켰을 게다.
“그러고 보니 아이스 오우거는 어디로 간 거야?”
연적하가 눈밭 위를 세밀하게 살폈다.
균열로 다시 도망쳤으니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는 말은 진리다.
“크헝―!”
우렁찬 포효와 함께 아이스 오우거가 눈 덮인 숲에서 튀어나왔다.
“깜짝이야!”
연적하는 아이스 오우거보다 놈이 내지른 소리에 더 놀랐다.
그리고 한낱 마수 따위에 놀랐다는 데 짜증이 난 그는 천둔검을 뽑자마자 길게 그었다.
콰자자작―!
아이스 오우거의 가슴이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자그마한 인간의 가공할 칼질에 놀란 아이스 오우거는 벼락처럼 몸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나 그걸 그냥 두고 볼 연적하가 아니다.
그는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아이스 오우거 주변을 돌며 개 잡듯 아이스 오우거를 두드렸다.
콰직! 콰직! 콰직!
천둔검에 베일 때마다 아이스 오우거의 몸에서 마치 얼음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궁지에 몰린 아이스 오우거가 돌연 머리를 번쩍 쳐들더니 절규하듯 괴성을 토해 냈다.
“크허어어엉―!”
충격파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지면에 켜켜이 쌓였던 눈더미가 폭발하며 허공으로 비산했다.
뒤이어 아이스 오우거의 눈에서 혈광이 뻗어 나왔다.
광포화가 된 것이다.
광포화된 아이스 오우거는 공포심을 잊고 연적하에게 덤벼들었다.
“흥! 달아나도 살려 줄까 말까인데 어딜 덤벼들어?”
연적하가 냉소를 치며 하늘 높이 도약했다.
우우우웅―.
영기를 가득 품은 천둔검에서 묵직한 검명이 울렸다.
이윽고 아이스 오우거의 머리 위로 오 장(약 15미터)여 길이의 광망(光芒)이 떨어졌다.
서걱―.
광망은 아이스 오우거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양단한 것으로도 부족한지 바닥까지 일 장(약 3미터)여 깊이로 잘라 버렸다.
두 쪽이 난 아이스 오우거 사이에 가볍게 떨어져 내린 연적하가 뒤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너 뭐냐?”
설원 위에 파비안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었다.
엘리오의 신위를 목격한 파비안은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파비안 클라우드입니다.”
“누가 이름 물어봤냐?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중대장님이 엘리오 경을 설득해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뭘 설득해? 균열 정찰하래서 열심히 하고 있구만.”
“그, 그러셔야죠. 예.”
“넌 왜 오락가락해? 낮술 먹었냐?”
“아닙니다.”
“어쭈?”
뻣뻣하던 파비안이 흐물흐물하게 나오자 연적하가 그를 빤히 보았다.
엘리오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파비안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간의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엘리오 경이 소드마스터인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드마스터?”
파비안은 엘리오의 표정에서 그가 소드맨들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야인이다.
야인이 어떻게 그처럼 강해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로디나 대륙에서는 검사를 소드맨이라고 합니다. 마나를 각성한 소드맨의 검신에서 ‘마나 포스’가 피어나면 소드 비기너(입문자), 검이 ‘마나 오라’로 빛나면 소드 익스퍼트(전문가), 검에서 ‘마나 블레이드’나 ‘오라 블레이드’를 발출하면 소드마스터라 칭합니다.”
“내가 소드마스터라고?”
“조금 전에 경께서 광포화한 아이스 오우거를 ‘오라 블레이드’로 양단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제야 연적하는 이 세계에서 ‘검강’을 ‘마나 블레이드’나 ‘오라 블레이드’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다.
역시나 하계와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소드마스터 위로는 또 뭐 없어?”
“그랜드 마스터라 불리는 경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와아! 있기는 있나 보네?”
솔직히 연적하는 그랜드 마스터가 있다는 말에 살짝 놀랐다.
그건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보다 강한 인간이라니?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랜드 마스터는 어떤 거야?”
“일검에 산을 자르고, 바다를 양단한다고 합니다. 마그눔 오프스(Magnum opus)의 ‘메테오 스웜’에 버금가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그눔 오 뭐?”
“마법사의 최고 경지를 마그눔 오프스라고 칭합니다.”
“우리 같은 검사로 치면 그랜드 마스터라는 거지?”
“예, 하지만 솔직히 ‘메테오 스웜’이 더 끔찍하기는 합니다. ‘메테오 스웜’이 떨어지면 도시 하나는 가루가 되어 버리니까요.”
실제로 ‘메테오 스웜’을 경험한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메테오 스웜 무섭지.”
왠지 경험해 본 것 같은 말투에 파비안은 엘리오를 슬쩍 보았다.
“왜?”
“메테오 스웜을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봤다면 어쩔 거고 안 봤다면 또 어쩔 거야? 신경 끊어.”
“예.”
파비안은 말 잘 듣는 종자처럼 토를 달지 않았다.
고분고분해진 파비안을 보던 연적하가 물었다.
“너 돌아갈래? 아니면 나랑 같이 균열 정찰할래?”
“엘리오 경과 함께 다니겠습니다.”
아직 ‘마나 포스’에 이르지 못한 파비안에게 소드마스터와의 만남은 축복과도 같았다.
파비안은 어떻게든 엘리오에게 한 수 지도받고 싶었다.
마나와 영기의 차이가 있지만, 검을 쓴다는 점에서 같으니 분명히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나 따라다니려면 길눈이 밝아야 돼. 내가 길눈이 좀 어둡거든. 아니, 솔직히 많이 어두워. 그냥 길치라고 보면 돼.”
“그런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처음 배치받은 곳이 북방에서 두 번째로 험하다는 몬타노사 산맥의 레인저 부대였습니다.”
파비안은 엘리오의 곁에 남기 위해 ―흑역사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첫 복무지까지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