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35
1035회. 부탁 하나 하자
알파 중대 1소대 막사.
엘리오가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던 파비안이 서둘러 다가갔다.
“공작님이 왜 부르신 겁니까?”
“푸토코아 백작가와 싸우지 말라고 하더라고. 나 때문에 푸토코아 백작가가 영지로 돌아가면 곤란하다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알겠다고 했어. 지금 푸토코아 백작가가 빠져나가면 남아 있는 사람들만 힘들어지니까.”
“잘하셨습니다. 푸토코아가 균열을 지킬 때 마족이 튀어나오면, 걔들은 답 없습니다. 남의 손으로 코를 풀 수도 있는데 괜히 건드려서 욕 먹을 거 없습니다.”
“그건 그런데, 복수를 남의 손에 맡기면 되나.”
뒤에서 듣고 있던 케일이 슬쩍 끼어들었다.
“푸토코아 백작가가 히르헤라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 엘리오 님의 복수도 쉬워질 겁니다.”
“엘리오 경이 툭 쳐도 망할 겁니다.”
“망해도 싸죠.”
기사들이 케일의 의견에 동조했다.
식당 앞에서 푸토코아의 남작들에게 모욕당한 일로 푸토코아 백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바탕 푸토코아 백작가를 욕하고 난 뒤 대화가 소강상태에 들었을 때다.
뜬금없이 리들리가 말했다.
“그런데 코르보 마법 병단에 미녀 기사가 있다는 거 아십니까?”
“미녀 기사?”
쿠누트가 관심을 보였다.
“아까 다른 소대 기사들과 만났는데 다들 그 이야기밖에 안 하더라고요?”
“그래? 코르보 마법 병단의 기사가 확실해? 마법사를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기사 맞답니다. 마법사가 중갑 입고 다니는 것 보셨습니까?”
“중갑이면 기사가 맞겠군. 그건 또 언제 봤대? 마법사들 눈치 보여서 나는 그쪽은 쳐다도 안 봤구먼.”
“벨라토스 중대장님과 함께 있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벨라토스 중대원들 말로는 어윈 레더 중대장님의 사촌이라나?”
“아! 어윈 레더 남작이 제도의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지? 제도에 친척이 있을 만도 하네.”
“여하튼 가까이서 본 사람들 말에 의하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쁘답니다. 검술에도 재능이 있어서 이십 대 초반인데 벌써 소드 비기너고요.”
“창조신이 너무 한 사람에게 몰아준 거 아냐?”
“그러게 말입니다. 코르보 마법 병단의 뜻이 까마귀 아닙니까? 여기사 별명이 ‘까마귀가 물어 간 보석’이랍니다.”
“미치겠군.”
“거 말 되네.”
듣고 있던 기사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신이 난 리들리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양념을 쳤다.
기사들은 리들리의 말에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엘리오는 뒤에서 그런 기사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곳 남자들도 강호의 남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게 비슷한데 하계와 상계의 구별이 왜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돌이켜 보면 처음 갔던 ‘왕들의 하늘’도 그랬다.
그곳의 신과 인간, 마족, 천족 들은 하계의 인간들과 거의 비슷했다.
그들과 제법 오래 부대끼면서 지냈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을 고차원적인 존재로 느낀 적이 없었다.
단지 ‘환경’과 ‘영기가 힘의 근원’이라는 게 달랐을 뿐이다.
이 세계도 그랬다.
‘마나’라는 강력한 힘을 빼면 자신이 살던 ‘하계’나 ‘왕들의 하늘’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세계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힘이 다를 뿐, 그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생명체는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이래서야 득도로 선계에 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렇게 엘리오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파비안이 물었다.
“엘리오 경은 안 가십니까?”
“어딜?”
“지금 벨라토스 중대에 한번 가 보기로 했잖습니까. 같이 가시죠?”
“거길 왜 가?”
“왜라니요? 그야 당연히 ‘까마귀가 물어 간 보석’을 보기 위해서죠.”
“쯧쯧! 그 여기사가 아직 벨라토스 중대에 있겠냐?”
“없으면 정보라도 얻어야죠. 가만히 있는다고 누가 알려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얻어서 뭐하게?”
“영지에 돌아가면 그런 게 다 기념이 되고, 추억이 되는 겁니다.”
“난 그런 추억 필요 없다.”
엘리오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간이침대에 드러누웠다.
파비안은 차마 더 권유하지 못하고 리들리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케일이 숙소에 남은 쿠누트에게 물었다.
“너는 왜 안 갔어?”
“유부남이 미녀 기사를 봐서 뭐합니까?”
“아, 그랬나? 파비안은 당분간 벨라토스 중대에서 살겠군. 한동안 팬텀 기사단 근처를 기웃거리더니만. 이번에는 좀 오래가려나?”
그래도 파비안의 일이라 엘리오가 관심을 보였다.
“팬텀 기사단에는 왜요?”
팬텀 기사단은 에스카토스 왕국의 마력총사대다. 총기사 전원이 마나 유저라 그 파괴력은 소드마스터 못지않았다.
“왜긴 왜겠습니까? 팬텀 기사단에 여기사들이 많으니 그런 거죠. 여기사들의 경우 근접전보다 원거리 싸움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력총사대에는 여기사들이 많습니다.”
“아!”
엘리오는 이내 관심을 거뒀다.
그 뒷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파비안이 그중 세라라는 여기사에게 꽂혀서 한동안 제집 드나들듯 했었습니다.”
책을 꺼내 들고 있던 쿠누트가 끼어들었다.
“지금도 가끔 기웃거리기는 합니다.”
엘리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코르보 마법 병단의 여기사에게 눈독을 들인다고요?”
“어떻게 해 보겠다기보다 젊은 기사들이 좋다고 몰려다니니까 괜히 그러는 걸 겁니다. 휴식 시간에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건 또 그렇네요.”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파비안의 나이대에 주둔지의 병영 생활은 꽤나 답답할 게다.
엘리오의 시선이 문득 쿠누트의 손으로 향했다.
“그 책은 뭔가요?”
“아, 이거요? 무료할 때 읽으려고 가져온 마나 개발서입니다.”
“마나 개발서요?”
“마나를 체계적으로 수련하는 방법을 기록한 겁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건 이제 막 출발선에 선 것이나 다를 바 없거든요. 파비안과 같은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죠.”
쿠누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엘리오는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했다.
“나도 책을 읽고 싶은데 혹시 글자를 배울 만한 곳이 있을까요?”
“예? 글자를 모르십니까? 대륙 공용어는 잘하시면서?”
엘리오가 손에 낀 반지를 들어 보였다.
“이게 통역을 해 주는 아티팩트라서요. 메이지 칼로스 님에게 받은 선물입니다.”
“아!”
“통역이 이상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책도 읽어 보고 싶어서요. 대륙 공용어를 배우면 통역이 더 잘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거라면……. 음. 파비안에게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건 어떠십니까?”
“파비안에게요?”
“파비안이 귀족 가문 출신이라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제가 아는 기사들 대부분이 평민 출신이라 남을 가르칠 수준은 못 됩니다.”
“파비안이 귀족 출신이었어요?”
“그의 부친이 단승 귀족이었습니다. 그때 받은 성도 있을 겁니다. 파비안은 자기가 평민이라 잘 쓰지 않지만요.”
“아하.”
엘리오는 파비안이 돌아오면 글자를 가르쳐 달라고 하기로 마음먹었다.
살면서 마구잡이로 익힌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한낮에 나간 리들리와 파비안은 해거름 무렵이 돼서야 돌아왔다.
케일과 쿠누트가 한마디씩 했다.
“얼굴은 봤냐?”
“하도 안 와서 얼어 죽은 줄 알았다.”
파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못 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요?”
“또 무슨 소문?”
쿠누트의 물음에 파비안이 엘리오를 힐끔거리며 답했다.
“그 여기사와 엘리오 경이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뭐어?”
“거기서 엘리오 경 이름이 왜 나와?”
케일과 쿠누트가 파비안과 엘리오를 번갈아 보았다.
간이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엘리오가 침대를 내려가며 말했다.
“만나기는 했어요.”
“예에?”
“진짜요?”
이윽고 파비안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엘리오 님, 왜 만났다는 얘기를 안 해 주셨습니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 걸 말해?”
“물론 엘리오 님에게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저희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러자 케일과 쿠누트가 한마디 했다.
“파비안, 거기에서 내 이름은 빼라.”
“나도.”
순간 발끈한 파비안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가만히들 계십쇼. 저희가 벨라토스 중대에서 얼마나 원망을 들었는지 아십니까? 엘리오 경과 어떤 관계냐고 묻는데……. 대답하느라 아주 진땀을 뺐습니다. 어떤 관계십니까?”
“아무 관계 아냐. 벨라토스 중대장님이 고맙다고 나를 불렀는데, 그 자리에 여기사가 먼저 와 있었던 것뿐이야. 커피 한잔 마시고 바로 나왔다고.”
“우와! 그 여기사와 커피까지 마신 겁니까?”
“누가 여기사와 마셨대? 벨라토스 중대장과 같이 마셨어.”
“눈동자가 사파이어 같다던데, 정말 그렇던가요?”
“사파이어는 모르겠고, 청금석처럼 시퍼렇기는 하더라.”
“볼 건 다 보셨네요?”
“바로 앞에 앉았는데 어떻게 안 보냐? 커피는 뭐 눈 감고 마시냐?”
“그래서 소문의 여기사를 가까이서 본 소감은요? 말씀해 주십쇼.”
흥분한 파비안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기사들은 그런 파비안을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빤히 엘리오를 보는 게 다들 궁금한 모양이다.
“예쁘긴 하더라만 그렇다고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로 예쁜[傾國之色]’ 건 아니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 정도?”
사실 엘리오에게 남궁연보다 더 예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저 정도만 해도 대단한 칭찬이라 할 수 있다.
파비안은 생전 처음 듣는 해괴한 비유에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세상에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로 예쁜 사람도 있습니까?”
“있어.”
“누구요?”
“내 처.”
“아…… 예, 물론 그러시겠지요. 아무튼 엘리오 경과 여기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파비안은 순순히 물러섰다.
자기 처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사람이니 더 물으나 마나였다.
촉각을 곤두세우던 기사들도 시들한 얼굴로 흩어졌다.
자기 간이침대로 돌아가려는 파비안을 엘리오가 불렀다.
“파비안.”
“예?”
“부탁 하나 하자.”
“뭔데요?”
“나한테 대륙 공용어 좀 가르쳐 줘.”
“대륙 공용어요?”
엘리오가 손가락의 반지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아티팩트 신세를 지고 있잖냐. 말만 통하지 책을 못 읽는다.”
“아! 하기야 영주가 되시면 공문서 정도는 읽으실 수 있어야겠죠?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여기사 어쩌고 하면 맞는다.”
“그런 거 아닙니다.”
“말해 봐.”
“저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십쇼. 그럼 저도 대륙 공용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설마하니 그가 그런 조건을 내세울 줄은 몰랐다.
“야, 차라리 여기사로 하자. 내가 자리 한번 주선해 줄게.”
“싫습니다. 여기사는 만나 봐야 그림의 떡 아닙니까? 저는 엘리오 경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뜻밖에도 파비안은 여기사와의 만남까지도 거절하고 검술에 매달렸다.
그제야 엘리오는 그가 검술에 진심임을 알아차렸다.
‘아, 귀찮은데.’
여기사를 소개시켜 주고 털어 내려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사들이 한마디씩 했다.
“오오! 파비안! 드디어 정신 차렸구나!”
“현명한 선택이다.”
“이렇게 되면 최후의 승자는 세라 경인 건가!”
그러자 파비안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그만들 하세요! 여기서 세라 경 이름이 왜 튀어나옵니까!”
엘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펄펄 뛰면서도 부인하지 않는 걸 보니 그 속을 알 것도 같다.
그래도 여기사의 소개를 마다하고 검술을 가르쳐 달라니, 정신이 아주 글러 먹지는 않은 것 같다.
“파비안, 3년간 내 밑에서 검술을 배우겠다고 맹세하면 가르쳐 주마. 그 정도 각오가 없으면 여기사를 소개받는 것으로 만족해라.”
엘리오가 웃음기 없는 눈으로 파비안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