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48
1048회. 괜히 제 옆에 있다가 큰일 나요
흑마법사에게 마족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이다.
흑마법사가 한번 마족이 주는 힘에 취하면 두 번 다시 벗어나지 못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것으로 시작해 끝내 자신의 영혼까지 담보로 걸게 되지만, 대다수의 흑마법사들은 그걸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자기 합리화인지, 아니면 정말 생각이 그렇게 변해 가는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흑마법사 딜런 던포드는 보좌에 앉은 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전지전능하신 마그눔 오프스시여. 우매한 자에게 말씀에 담긴 뜻을 풀어 주십시오.”
흑마법사가 마족을 만나려면 의식이 필요하다.
흑마법의 과정은 간단하다.
뭔가를 바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얻는 식이다.
이때 소환된 마족은 소환자(흑마법사)의 소원을 들어준다.
소환된 마족을 소환자 뜻대로 부리는 것은 흑마법 궁극의 단계라 할 수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제물로 흑마법사 자신이 사용된다.
그러니 흑마법사 딜런 던포드가 ‘마족을 끌어들이라’는 명령 앞에 조심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그는 보좌에 앉은 마그눔 오프스가 자신의 최후를 원하는지,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빙벽에서 가까운 모쿠바스는 몰록의 영지다. 모쿠바스를 건드려 몰록을 균열까지 끌어내면 그 뒤로는 저들이 알아서 움직여 줄 것이다.”
“아, 예…….”
흑마법사 딜런 던포드는 머리를 조아렸다.
보좌에 앉은 이가 자신의 최후를 원하는 게 아님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타메이온의 모쿠바스를 침략해서 몰록을 끌어내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못 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거야말로 모쿠바스를 침략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인 까닭이다.
***
히르헤라 주둔지.
베일럼 왕국의 합류로 가장 이익을 본 사람들은 균열 감시부대다.
6일 동안의 점검 시간이(점검이라고 하지만 실은 휴식 시간) 15일로 변했으니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균열 감시부대는 사상자 수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만큼 기사와 병사 들의 스트레스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이유로 균열 감시부대 기사와 병사 들 사이에 술과 도박이 성행했지만, 그걸 감독하는 지휘관은 없었다.
베르나르도 후작군.
루퍼스 중대.
해거름 무렵.
마지막 한 모금의 밀주를 마신 엘리오가 아쉬운 눈으로 빈 병을 보았다.
알파 중대장에게 받은 상등품 밀주는 강호에서 즐겨 마시던 향설주(香雪酒)보다 훨씬 맛있었다.
밀주라기에 ‘몰래 유통되는 술’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파 중대장이 준 것은 벌꿀이 들어간 밀주(蜜酒)였다.
“쩝, 쩝…….”
엘리오가 입맛을 다시며 밀주의 마지막 여운을 즐길 때,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식사를 알리는 종이었다.
엘리오는 굼뜬 동작으로 옷을 갈아입고 막사를 벗어났다.
루퍼스 중대 막사를 지나는 그의 귓가로 도박패 돌리는 소리와 술주정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쯧! 쯧!”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됐다.
자신의 의사와 달리 끌려온 징집병들인 데다가, 주둔지에서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주둔지에서 삼 년을 복무하면 영지로 보내 준다지만, 알파 중대의 사상자 숫자를 보면 몇이나 무사히 돌아가게 될지도 의문이다.
그러니 병영 생활에 무슨 희망이 있겠나.
다른 지휘관들 역시 그걸 알기에 숙영지 내에서의 술과 도박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저녁 식사 종소리에 맞춰서 식당으로 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저녁 식사만큼은 밤늦게까지도 가능했기에 더 꿈지럭거리는 경향이 있었다.
설원 위를 터덜터덜 걷던 엘리오가 멈칫했다.
‘이것 봐라?’
오랜만에 은밀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이세계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감시당하기는 처음이다.
푸토코아 백작가와 긴장 상태를 유지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뭐하는 놈들이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제법 많은 숫자다.
그들 모두 어찌나 신중하게 움직이는지 강호의 경험이 없었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엘리오는 휘적휘적 걸어 기사들 전용의 식당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 있는 기사들 중에 절반이 낯설었다.
기사들의 가슴에 그려진 ―처음 보는― 문양들을 보니 베일럼 왕국의 기사들 같았다.
엘리오는 음식 접시를 들고 에스카토스 왕국 기사들 근처로 향했다.
그러자 식사 중이던 에스카토스 왕국 기사들이 갑자기 눈인사를 건넸다.
에스카토스 왕국만 있을 때는 본체만체하더니, 베일럼 왕국이 합류하니 괜히 친한 척을 한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던가.
엘리오는 그동안 데면데면하던 기사들에게 머리를 까닥여 보인 후 구석 자리에 걸터앉았다.
접시에 담긴 음식을 절반쯤 먹었을까?
땀 냄새를 풍기며 파비안이 그의 앞에 철퍼덕 앉았다.
“중대장님. 식사 때 혼자 다니지 마시고 저도 좀 불러 주십쇼.”
“그 반대로 해야 되는 거 아냐? 참모가 중대장을 모시러 와야지. 어떻게 중대장이 참모를 모시러 가냐?”
“할 일 없는 사람이 움직여야지요. 저는 검술 훈련에 집중하느라 종소리도 잘 못 듣습니다.”
“그럼 안 돼. 주변 환경의 변화를 잘 감지해야 진정한 검술의 마스터가 될 수 있어.”
“쩝, 쩝. 검술 훈련을 하다 보면 걸어갈 힘도 없습니다. 그런 제가 중대장님을 모시러 가야 합니까?”
“누가 모시러 오래? 말은 바로 하자고. 내가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알아?”
“뭔데요?”
“각자가 생을 그리는 거[各自圖生].”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신이 들어도 이상한 소리에 엘리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모처럼 문자를 썼더니 통역이 엉망이다.
“각자가 알아서 살아가자고.”
“에이, 그래도 정이 있지 어떻게 그럽니까? 중대장님과 제가 어디 보통 사이입니까?”
“중대장과 참모 사이지.”
엘리오는 칼같이 끊었다.
이 세계에서 인맥을 넓혀 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에이, 왜 그러십니까. 중대장님과 저는…….”
“닥치고. 요즘 이상한 사람들 못 봤어?”
“이상한 사람요? 어떤 사람을 말씀하시는 건지…….”
“못 보던 사람들이 부대를 기웃거리는 거 본 적 있냐고.”
“많죠. 베일럼 왕국 기사와 병사 들이 안 쑤시고 다니는 데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닌대?”
“그렇지 않아도 제가 한 사람을 잡고 슬쩍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에스카토스 왕국 귀족 탓을 하더라고요?”
“왜? 우리 쪽에서 뭘 어쨌기에?”
“고위 귀족들이 히르헤라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랍니다.”
“아하! 정보 수집이라는 거군?”
“맞습니다. 중대장님 눈에 거슬리면 루퍼스 중대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하겠습니다.”
“놔둬. 그쪽도 알 건 알아야지. 뭐, 이곳 상황을 안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기는 하죠.”
식사를 마친 엘리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습관처럼 에너지 볼을 한 움큼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느긋하게 막사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또다시 끈적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 사람들아. 정보를 수집하고 싶으면 말을 걸라고. 다 가르쳐 줄게.’
하지만 애석하게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엘리오는 터벅터벅 루퍼스 중대로 걸어갔다.
“잠시만요!”
누군가의 부름에 엘리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청순하게 생긴 금발의 여기사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나요?”
“헉! 헉! 네에.”
“왜요?”
“혹시 셀레투스 기사단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이런, 도와주고 싶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아, 모르세요? 베일럼 왕국의 마력 총사대인데.”
“몰라요. 내가 다른 왕국의 사정에 어두워서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혹시 베일럼 왕국군 진영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어두워지니까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어요.”
순간 엘리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살다 살다 나한테 길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내가 길눈이 진짜 어둡거든요.”
“아, 네에…….”
여기사의 표정이 급속하게 어두워졌다.
잠시 생각하던 엘리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뭐, 그래도 베일럼 왕국군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아요. 안내해 드릴게 따라오세요.”
말을 마친 엘리오가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그러자 여기사가 빠르게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감사해요. 저는 셀레투스 기사단의 애나 로건이라고 해요. 에스카토스 왕국의 팬텀 기사단을 찾아 나섰다가 그만 이렇게 됐네요.”
“팬텀 기사단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아뇨. 아는 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찾아갔던 거예요.”
“굳이 팬텀 기사단을요?”
“위에서 이것저것 알아 오라고 압박을 가해서요. 어머,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죄송한데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세요.”
엘리오는 그녀의 유쾌한 너스레에 옆을 힐끔 돌아보았다.
저게 미리 준비된 대사가 아니라면 꽤나 재밌는 사람 같은데, 과연 그녀는 어느 쪽일까?
“그럼 저녁 식사도 못 하셨겠네요?”
“네, 종소리는 들었는데 식당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막사가 너무 많아요. 이렇게 많은 막사는 처음이에요.”
“징그럽게 많죠.”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베일럼 숙영지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도 조마조마하다.
“그런데 기사님의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엘리오 라고아라고 합니다.”
엘리오는 정중하게 자신의 풀네임을 밝혔다.
귀족 사회에서 ‘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애나 로건이 살짝 엘리오 라고아의 얼굴을 살폈다.
귀족인지, 라무스(성씨만 가진 평민)인지 궁금했지만 초면에 그것까지 묻는 건 실례다.
그래서 살짝 질문을 바꿔서 던졌다.
“라고아 님은 보직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마력 총사대 기사인데.”
애나 로건은 초면의 기사들이 의례히 주고받는 인사 중에 하나를 슬쩍 던졌다.
“루퍼스 중대장입니다.”
“아! 라고아 남작님이시구나.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그녀가 가문을 밝히려고 할 때다.
갑자기 엘리오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잠시만요.”
“네?”
“불청객들이 찾아왔네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애나 로건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마력건을 뽑아 들었다.
“죄송해요. 저를 노리는 거예요. 남작님은 피하세요.”
“에?”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애나 로건을 보았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 그녀를 저들 중에 하나로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를 노리고 왔으니 떠나란다?
엘리오가 머뭇거린다고 생각한 애나 로건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가시라고요. 괜히 제 옆에 있다가 큰일 나요.”
“잠깐만요. 불청객들의 목표가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엘리오가 버티자 애나 로건이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남작님을 노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전에는 있었죠?”
“지금은 없다는 소리잖아요. 거봐요. 내가 맞다니까요. 어서 가세요.”
“로건 경이 목표라는 증거 있어요?”
“차고 넘치죠.”
애나 로건이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윽고 사오십 대로 보이는 사 남 이 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오가 그들을 쓰윽 둘러보며 말했다.
“이미 떠나기는 늦었네요. 누굴 찾아왔으려나요?”
“하아! 저는 분명히 피하라고 말씀드렸어요.”
말을 마친 애나 로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봐요들! 저분은 에스카토스 왕국군으로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러니까 괜히 일 크게 벌이지 말고 저분은 보내 줘요. 당신들이 원하는 건 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