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67
1067회. 이성적인 관심은 없나?
전날 저녁.
히르헤라 베일럼 왕국군 주둔지.
베일럼 왕국군 지휘 통제 막사.
참모장 라이너 심슨 자작이 침통한 얼굴로 전황 보고를 이어 갔다.
“……균열을 감시하던 크레타 중대는 쿠엔 디노스 중대장 이하 삼백오십 명 전원이 사망하였고, 주둔지 병력은 백팔십 명이 사망했으나……. 중상자가 백여 명이라 사망자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카토스 왕국군의 상황은 어떤가?”
대장군인 레토나 그라운드 후작의 물음에 참모장은 송구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백오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망자 숫자는?”
“현재까지 육십삼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의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최전방에 있던 균열 감시부대의 전멸이야 어쩔 수 없지만 주둔지 피해는 다르다.
동일한 조건에서 사상자의 차이가 너무 두드러졌다.
대귀족들은 ‘이 한 번의 전투로 에스카토스 왕국과 베일럼 왕국의 전력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소드마스터이자 원수인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입을 열었다.
“소드마스터를 괜히 일인 군단이라 부르는 게 아니야. 저쪽에는 두 명의 소드마스터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있지 않나. 당연한 결과니 너무 자책할 것 없다.”
그제야 면죄부를 얻은 것처럼 굳어 있던 대귀족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어쩌면 그들 모두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에게 그 소리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특히나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히르헤라의 수호자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검사다. 지금까지 소드마스터를 꺾은 검사는 제국의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십 년 만에 북부의 변방에서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과 같은 인물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귀족들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치만 살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은 오십 년 전 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왕국의 소드마스터들이 그에게 패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히르헤라에서 후퇴했을지도 모른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북부 왕국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검사다. 그를 손에 넣는 왕가가 북부의 패권을 잡게 될 것이다.”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대귀족들이 술렁거렸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말대로라면 베일럼 왕국에 좋을 일이 없어서다.
“에스카토스 왕가에서 그에게 공을 들일 테니 그를 빼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눈 뜨고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우리 베일럼 왕국군 중에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알고 지내는 귀족이 있나?”
“예, 셀레투스 기사단의 애나 로건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체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로건 백작의 영애를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이런…….”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필 로건 백작가의 영애가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일왕자인 야니스 리베라토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던 그에게는 당혹스러운 소리였다.
일왕자가 왕이 되면 로건 백작가는 몰락하게 될 터였다.
몰락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새 왕의 측근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도 있다.
일견 잔혹해 보이지만 그게 줄을 잘못 선 백작가들의 운명이었다.
***
그리고 현재.
무거운 침묵이 막사 내부를 감돌았다.
기이한 눈으로 애나 로건을 응시하던 소드마스터이자 원수인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대장군 레토나 그라운드 후작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레토나 그라운드 후작이 기사단장과 부단장에게 손을 까딱였다.
나가라는 뜻이다.
조르바 아미쿠스 백작과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뒷걸음질로 막사를 벗어났다.
이윽고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입이 열렸다.
“애나 로건.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가깝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예, 그분에게 체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서냐? 스승과 제자로서냐?”
“예?”
애나 로건이 황당한 눈으로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을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흐음. 그를 언제부터 알았느냐?”
“아, 그게…….”
애나 로건은 자신이 주둔지에서 길을 헤매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 뒤로 체술까지 배우게 된 것입니다.”
“…….”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묘한 눈으로 애나 로건을 보았다.
우연이라고 하지만 어째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검술 경지가 베일럼 왕국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지금은 애나 로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했다.
“잘 알았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주둔지 파견 임무에 자원했다고 들었다. 이곳 히르헤라에 백작가의 영애는 셀레투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줄리 그린우드 남작과 너뿐이다. 전출 명령을 받은 줄리 그린우드 남작과 달리 너는 지원이다. 왜지?”
“왕국의 안녕을…….”
“입에 발린 소리를 듣겠다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다.”
원수인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소드마스터의 산악과도 같은 기세가 한순간 막사를 찍어 눌렀다.
두려움에 빠진 애나 로건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왕도에서 몇 번이나 납치 위기를 겪었습니다. 주둔지에서 병영 생활을 하면 그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지원했습니다.”
“그건 역시 제럴드 로건 백작의 일 때문인가?”
“예.”
그제야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은 숨 막힐 듯한 기세를 거둬들였다.
“경의 부친인 제럴드 로건 백작이 이왕자 테오 리베라토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경은 어디까지 관여되어 있느냐?”
“관여요?”
“로건 백작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냐는 뜻이다.”
“전혀 없습니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왕자 쪽의 귀족들이 그녀를 납치해서 로건 백작을 압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것으로 공무는 끝이다. 이제 개인적인 질문을 좀 하지. 편히 앉아라.”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맞은편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던 애나 로건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경의 눈에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어떤 사람으로 보이나?”
“어떤 사람이라고 하심은?”
“푸토코아 백작가에서 그를 배신자라고 부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 분 아닙니다. 푸토코아에서 작위조차 받은 적이 없는데 배신자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푸토코아 백작의 악의적인 험담에 불과합니다.”
“흥분하지 말고. 그럼 어떤 사람인지 말해 보아라.”
“매사에 솔직 담백하시고, 의리 있는 분이십니다.”
“의리라. 경이 위기에 빠지면 베일럼 왕국으로 달려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만사 제쳐 두고 달려오실 겁니다.”
“그런가. 이거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군.”
“…….”
애나 로건은 애써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던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일왕자와 이왕자 누구의 편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왕자 쪽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뭔가 약속이 오고 간 사이는 아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경은 일왕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긍정적인 내용이 아닌 탓에 애나 로건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뭐라고 말해도 문제 삼지 않을 테니 편하게 말해라. 솔직한 경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무책임한 망나니……라고 생각합니다.”
“세간의 평가가 그러니 아니라고도 못 하겠군. 그런데도 일왕자를 지지하는 귀족은 많다. 왜라고 생각하나?”
“일왕자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자기들이 권력을 나눠 가지려는 겁니다.”
“어리석은 일왕자를 왕으로 세워 두고 귀족들이 통치하는 것과, 이왕자가 나라를 통치하는 것 중에 어느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애나 로건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귀족들과 왕.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왠지 생각할수록 모호한 느낌이다.
그런 그녀를 보는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지? 어차피 역사는 강자에 의해 쓰여지게 되어 있다. 제럴드 로건 백작에게 전해라. 내가 이왕자를 지지하는 조건은 하나다. 일왕자 측에 섰던 귀족들을 용서하는 것. 그것만 약속한다면 나도 이왕자의 편에 서겠다고.”
“네?”
애나 로건이 눈을 부릅떴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이왕자 편에 서겠단다.
베일럼 왕국군 원수가 결정했다면 이왕자가 왕이 될 게 분명했다.
“그것이 운명이다. 히르헤라에 백작가의 영애는 경과 줄리 그린우드 남작뿐이다. 만약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교분을 맺었다면, 왕위는 일왕자에게 갔을 것이다.”
“…….”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애나 로건에게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이성적인 관심은 없나?”
“…….”
순간 애나 로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걸 긍정의 표시로 알아들은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있다면 모든 것을 걸고 잡아라. 장차 그가 북부 왕국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테니까. 아니, 어쩌면 대륙의 운명까지도…….”
애나 로건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답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흡족한 얼굴로 애나 로건을 바라보던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참모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왕도에서 납치 시도가 있었다는데, 애나 로건 경의 주변에 문제는 없겠나?”
“셀레투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일왕자파입니다.”
“그렇군.”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참모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수님이 이왕 이왕자님을 지지하시기로 하셨다면 일왕자님 쪽에 확실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즉위식 이후에라도 피바람이 불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방법이 있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을 기사로 강등시키고, 애나 로건 경을 부단장에 임명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내일 정식으로 발령을 내게. 부단장이 되면 움직임에 제약도 덜할 테지?”
“아무래도 기사들보다는 부단장이 자유롭습니다.”
“애나 로건 경. 들었지? 내일부터는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예? 예!”
애나 로건은 마치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람처럼 결연한 어조로 답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창피했기 때문이다.
***
다음 날.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
아침부터 검술 연습에 여념이 없는 파비안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갔다.
애나 로건이었다.
뒤늦게 그녀를 발견한 파비안이 휘두르던 검을 내려놓았다.
“중대장님을 찾아오셨습니까?”
“아뇨. 그냥 수련에 조언을 좀 얻을까 해서 와 봤어요.”
“아, 예. 어떤 조언이 필요하십니까?”
“라고아 남작님이 혈관에 마나를 보내라고 하셨는데…… 혹시 파비안 경도 그렇게 하고 있나요?”
“아하! 그 문제라면 너무 혈관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아도 됩니다.”
“집착하지 말라고요?”
“저도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좀 힘들었는데요. 혈관을 피가 흐르는 통로로 생각하기보다……. 좀 단순화시켜서 위치라고 생각하니 되더군요.”
“위치요?”
“예, 저 같은 경우 팔, 가슴, 어깨라는 식으로 생각했더니…… 잘 해결이 됐습니다.”
“아하!”
애나 로건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혈관이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니 짐을 벗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