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72
1072회. 혹시 제가 두 분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것입니까?
엘리오는 진심으로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는 이렇다.
되로 주고 말로 받거나,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준 만큼은 받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과 파비안의 관계는 그 반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소드 비기너가 된 그와 달리 자신은 아직 대륙공용어에 능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오의 축하를 기대했던 파비안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대장님, 본래 몸 쓰는 일이 머리 쓰는 일보다 진도가 빠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제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파비안, 결과로 말하자. 내가 언제까지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겠냐.”
“반지라서 딱히 불편함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즘 중대장님의 표현력도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알아듣기 어려운 이상한 말도 하지 않으신 지 꽤 됩니다.”
“그게 다 네 덕분이라는 거지?”
“그럴 리가요. 그 정도로 중대장님의 대륙공용어가 많이 능숙해지셨다는 뜻입니다. 이젠 책도 어느 정도 술술 읽으시지 않습니까?”
“마나 유저가 소드 비기너에 오를 정도로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
엘리오는 끝까지 그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
파비안은 엘리오가 손해 보는 걸 극단적으로 싫어한다는 걸 알고 혀를 내둘렀다.
‘드래곤 소드로 소드 익스퍼트 흉내를 낼 수 있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아야겠다.’
그렇게 다짐할 때 애나 로건이 조심스럽게 휘장을 열고 말했다.
“저어, 애나 로건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 어서 오세요.”
엘리오가 안쪽의 빈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에나 로건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엘리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뵀어요.”
“감사요?”
“라고아 남작님 덕분에 부단장이 됐거든요.”
“예?”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애나 로건을 보았다.
베일럼 왕국의 사람들과는 따로 만나 본 적도 없는데 덕분이라니?
“그게 실은…….”
애나 로건은 베일럼 왕국에서 로건 백작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설명했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께서 제가 라고아 남작님과 가깝다는 이유로 로건 백작가 손을 들어 주셨어요. 덕분에 내전으로 치달을 뻔했던 후계자 문제가 정리되고, 저도 셀레투스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진급했어요.”
“아, 그런 일이…….”
엘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누군지 모르지만 눈치 빠른 게 마음에 들었다.
한편 이제 막 소드 비기너가 된 파비안은 갑작스러운 직위의 변동에 관심을 보였다.
“그럼 부단장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간 건가요?”
“아뇨. 그냥 기사로 강등이 됐어요.”
“강등요? 전출이 아니라?”
파비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애나 로건을 보았다.
그녀의 진급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진 건 알겠지만 왜 죄 없는 부단장을 강등시킨단 말인가?
“부단장이 일왕자 쪽 사람이라 저하고 관계가 좀 안 좋았거든요. 아마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 소소하게 복수하라는 배려인가요?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도 은근 재밌네요.”
“파격적인 인사를 종종 하신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제가 그 대상이 되니 묘하더라고요.”
“그게 다 우리 중대장님에게 보내는 신호입니다. 잘 좀 봐 달라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라고아 남작님은 마나를 혈관으로 보낼 때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마음이 급해서요.”
“아! 그러셨구나.”
애나 로건과 파비안은 죽이 맞는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잘 끌어 나갔다.
멀뚱멀뚱 두 사람의 대화를 구경하던 엘리오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냥 둘이 따로 만나서 얘기를 해도 될 것 같은데…….’
엘리오의 시선을 눈치챈 파비안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참! 로건 경. 베일럼 왕국도 긴장해야 할 겁니다.”
“왜요?”
애나 로건의 질문에 파비안은 최근 균열에 생긴 변화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우리 중대장님과 알파 중대장님이 참모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베일럼 왕국도 마족들의 침공에 대비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중대장님?”
뜻밖의 말에 애나 로건이 놀란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보았다.
“사실인가요?”
“네, 참모님이 윗분들에게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조만간 베일럼 왕국에도 전해질 겁니다.”
“그래도…… 라고아 남작님과 다른 공작님들이 계시니까 괜찮겠죠?”
기대에 찬 애나 로건의 말에 엘리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마족은 약한 데다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마족이 또다시 패배할 싸움을 걸어올까요?”
“…….”
애나 로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지난번 아나킨의 침공 때 베일럼 왕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보다 강한 마족이 마물과 마수를 이끌고 온다 생각하니 암담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 외에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있는 에스카토스 왕국군과 달리 베일럼 왕국군은 소드마스터가 한 사람에 불과한 때문이다.
파비안이 위로한답시고 한마디 건넸다.
“위험하다 싶으면 우리 쪽으로 피해 오십쇼.”
“하아! 저도 그러고 싶지만 거리가 멀어서……. 섣불리 움직이다가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그냥 버티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엘리오가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베일럼 왕국군 속에 있는 게 그나마 더 안전할 겁니다.”
“정 안 되면 혼자라도 달아나라 이 말이죠. 몸을 가볍게 하는 기술은 아직 못 익혔어요? 그걸 써먹으면 로건 경 한 몸 빼내는 건 어려울 것 같지 않은데.”
“나 혼자만 살겠다고 기사단을 버릴 수가 있나요.”
애나 로건의 말에 파비안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맛만 다셨다.
그런 파비안을 향해 엘리오가 한마디 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사람인 줄 아냐? 저런 걸 참모라고. 쯧쯧!”
“아니, 왜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꼼짝없이 죽을 상황이면 그렇게 하라 이겁니다. 그럼 그냥 죽어야 합니까?”
“누가 죽으래?”
“저도 그런 차원에서 한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너는 그런 결과가 닥쳐오기 전에 달아날 것 같아.”
“상황 판단이 뛰어나다는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로건 경도 잘 새겨들으십쇼. 결과가 뻔히 보인다 싶으면……. 미련을 두지 말고 혼자라도 뛰세요.”
“참고할게요.”
애나 로건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파비안을 비난했지만 막상 닥치면 자신도 어떻게 변할지 자신이 없었다.
***
디바 중대가 균열 최전방에 투입된 기간에도 마수는 균열을 넘어오지 않았다.
무려 6일 동안이나 균열이 잠잠하자 주둔지는 긴장에 휩싸였다.
하지만 설사 알았다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균열 주변이 조용할수록 주둔지의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흘 후 골리앗 중대가 균열 최전방에 투입되던 날, 히르헤라 주둔지에 라미노프 왕국군이 합류했다.
라미노프 왕국군의 합류로 주둔지의 사기는 일시적으로 올라갔다.
그날 저녁,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왕국군은 성대하게 라미노프 왕국군의 환영회를 열었다.
최근 가라앉은 주둔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
히르헤라 라미노프 왕국군 환영회장.
역설적이게도 균열이 고요한 덕분에 귀족들은 연회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천막 대신 마력장으로 바람을 막고, 곳곳에 파이어 스톤이 타오르는 설원은 연회장으로 그럴듯했다.
연회장은 두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귀족이 모인 상위층과 남작들이 모인 하위층이다.
엘리오는 남작들이 모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진수성찬을 즐겼다.
그의 얼굴을 아는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왕국군 남작들은 숨 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 에스카토스 왕국과 대립각을 세워 오던 라미노프 왕국의 남작들은 주눅 든 에스카토스 왕국의 남작들 앞에서 보란 듯 활개치고 다녔다.
“나는 라미노프 왕국에서 온 막심 체호프 남작입니다. 그쪽은 어디의 누구십니까?”
“베일럼 왕국의 줄리 그린우드 남작입니다.”
“와우! 아직 젊은데 벌써 작위까지 받으셨군요. 미모가 검술이라면 남작은 소드마스터로 불려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나는 라미노프의 최정예 부대인 나찰라 중대 중대장입니다. 설마하니 남작과 같은 미녀가 최전방 부대를 맡고 있지는 않을 테고…….”
“왕궁의 셀레투스 기사단에 있어요. 실례할게요.”
줄리 그린우드는 막심 체호프 남작을 뒤로하고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다가갔다.
“라고아 남작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누구신지?”
엘리오가 빤히 바라보자 줄리 그린우드는 급히 자신의 소개를 했다.
“셀레투스 기사단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에요.”
“아, 예.”
엘리오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베일럼 왕국의 사정에 관심이 없어 그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순간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녀는 애나 로건과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어떻게 만났는지 알고 있었다.
애나 로건은 고작 길을 묻는 것으로 인연을 쌓았다.
그에 비하면 연회장에서 만난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더 좋았다.
그녀는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옆에 앉아서 ―마치 시중을 드는 하녀처럼―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잔이 빈다 싶으면 와인을 채웠고, 새우의 껍질을 까 주기도 했다.
엘리오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지만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왕국 남작들이 부러운 눈으로 힐끔거렸다.
그들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 옆에 가고 싶었지만, 줄리 그린우드 남작처럼 다 내려놓을 자신이 없어 그냥 멀찍이서 눈치만 살폈다.
남자들의 눈은 다 비슷하다.
아까부터 줄리 그린우드 남작을 눈여겨보던 라미노프 왕국의 이고르 티호노크 남작이 막심 체호프 남작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막심 경. 그냥 구경만 할 건가?”
“백작님이 사고 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그런가? 척 봐도 히르헤라 주둔지 최고의 미녀 같은데……. 아쉽게 됐군.”
“아직 끝난 건 아니잖은가.”
비슷한 나이 또래의 두 사람은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 얼굴만 봐서는 별 볼 일 없을 것 같은데……. 왜 저 정도의 미녀가 쩔쩔매는 것 같지? 밤일을 잘하나? 크크크!”
이고르 티호노크 남작은 자기가 말하고도 우스운지 키득거렸다.
“밤일이라고? 내 별명이 밤새 달리는 야생마 아닌가. 기다려 보라고.”
막심 체호프 남작은 턱을 치켜들고 성큼성큼 두 남녀에게 걸어갔다.
열심히 가재 껍질을 까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뭔가요?”
“아,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니오. 히르헤라는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어서…….”
“그래서요?”
사근사근하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린우드 남작께 히르헤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서요. 혹시 제가 두 분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것입니까?”
막심 체호프 남작이 도발적인 눈으로 청년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친절이 부담스럽던 엘리오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전혀요.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엘리오는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애써 까 놓은 가재가 담긴 접시까지도 라미노프 왕국의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