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73
1073회. 자네는 어느 왕국의 기사인가?
로디나 대륙의 왕국들은 오십 년 전까지 제국 혹은 왕국 간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 검술, 혹은 마법의 경지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사회가 됐다.
예컨대 검사들의 경우 소드 비기너는 남작, 소드 익스퍼트면 자작인 식이다.
전쟁이 끝난 지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 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라미노프 왕국의 막심 체호프 남작은 소드 익스퍼트를 목전에 두고 있는 소드 비기너로, 라미노프 왕국에서 그와 비슷한 경지의 검사는 스미에르 중대장인 이고르 티호노프 남작뿐이었다.
그가 남작들이 모인 자리에서 타 국가의 귀족 청년에게 눈빛으로 도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신분이 곧 실력인 세계에서, 적어도 남작들 중에는 자신의 위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귀족 청년이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정성이 담긴― 가재 접시까지 슬그머니 양보하자 막심 체호프 남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생긴 것처럼 소심한 녀석이군.’
미녀 앞에서 자존심을 세워 볼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오히려 미안할 정도다.
“고맙네.”
막심 체호프 남작은 사양하지 않고 가재가 담긴 접시로 손을 뻗었다.
그게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전리품으로 여겨 맛이라도 보려는 것이다.
그의 손이 막 가재 살을 집으려는 순간이다.
가만히 지켜보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찰싹!’ 소리가 나도록 그의 손등을 때렸다.
화들짝 놀란 막심 체호프 남작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제가 때리고도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막심 체호프 남작은 그제야 그녀가 이 귀족 청년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 느낀 감정은 열패감이었다.
뒤이어 자신도 받지 못한 미녀의 애정 공세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 준 귀족 청년에 대한 경멸과 분노가 밀려왔다.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진심을 생각하면 귀족 청년의 행동은 소심함이 아니라 범죄였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군.”
물론 돼지는 귀족 청년이고 진주 목걸이는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다.
그러나 애초에 라미노프 왕국의 남작과 줄리 그린우드 남작에게 관심이 없던 엘리오는 의미심장한 비유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오히려 그는 라미노프 왕국의 남작과 줄리 그린우드 남작 사이의 신경전으로 착각해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한편 그런 모욕적인 비유를 듣고도 귀족 청년이 몸을 사리자 막심 체호프는 기가 막혔다.
‘저런 놈이 어떻게 히르헤라까지 왔지?’
소문에 의하면 히르헤라는 역사상 그 어느 전쟁보다 더 끔찍한 곳이었다.
영주인 블러드 미르 백작은 ‘히르헤라를 지키지 못하면 대륙이 멸망한다’고까지 했다.
그런 히르헤라에 저런 비겁자라니!
‘아니 이것은 어쩌면 기회다.’
지금이야말로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눈에 씐 콩깍지를 벗겨 낼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그는 귀족 청년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잠깐만. 나는 자네와 줄리 그린우드 남작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지금 자네의 행동은 기사답지 못하네. 자네는 어느 왕국의 기사인가?”
“저요?”
“그래, 자네. 어느 왕국 소속인가?”
“에스카토스 왕국인데요?”
순간 막심 체호프 남작의 눈이 번득였다.
라미노프 왕국과 에스카토스 왕국은 제국이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적대 관계였다.
과거 한때 동맹을 맺고 제국에 맞선 적도 있지만 그때뿐이다.
두 왕국은 양국 접경지에 있는 비취호수의 소유권을 두고 수백 년째 싸우고 있었다.
담수인 탓에 호수로 불리지만 비취호수는 영지 하나와 맞먹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단지 크기만 큰 것이 아니다.
호수에 있는 엄청난 양의 사금과 풍부한 수산물은 내륙의 두 왕국에게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라미노프 왕국의 기사인 막심 체호프 남작은 에스카토스 왕국의 기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어리바리한 얼굴로 서 있는 귀족 청년을 보자, 마음 한편으로 미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대가 에스카토스 왕국의 기사라고 생각하니 동정심은 씻은 듯 사라졌다.
‘영혼까지 탈탈 털어 주마.’
귀족 청년을 몰아세우기 직전 문득 드는 위화감에 막심 체호프 남작은 고개를 돌렸다.
고요했다.
조용한 게 아니라 공동묘지처럼 생기 없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왕국의 남작들 표정이 기괴했다.
그들은 마치 ‘삼국 연합의 신성한 자리에서 꼭 그래야만 하느냐!’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막심 체호프 남작은 사고 치지 말라던 백작의 당부를 떠올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때 귀족 청년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기사답지 못한 게 뭔데요?”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성의를 봐서라도 저것까지 양보해서는 안 됐네. 그건 기사를 떠나 남자답지 못한 일이라네. 다음에는 그러지 말게. 우리 라미노프의 기사들은 상대가 누구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네.”
“그러니까 누가 주는 음식은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말라 이거예요?”
귀족 청년이 말귀를 못 알아먹자 막심 체호프 남작은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줄리 그린우드 남작과 같이 아름다운 기사가 주는 음식을, 나에게 해코지 당할까 두려워 바치듯 양보하지 말라는 말일세.”
“…….”
너무도 뜻밖의 지적에 엘리오는 한동안 눈만 끔뻑거렸다.
여기사의 과잉 친절이 부담스러워 했던 행동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다니…….
순간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남작님. 괜히 저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듣게 만들고…….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리고 당신! 막심 체호프 남작이라고 했나요?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미녀 기사가 도리어 자신을 나무라자 막심 체호프 남작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잘못은 저 사람이 했는데 왜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그는 상대가 미녀 기사라고 끝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엘리오가 난감한 얼굴로 막심 체호프 남작과 줄리 그린우드 남작을 보았다.
이래서야 누가 봐도 남녀 간 치정 문제로 인한 다툼이다.
‘이 두 사람의 옆에 있으면 안 되겠어.’
그렇게 다짐할 때 구경하던 세 왕국의 남작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좌우로 갈라졌다.
이윽고 대장군인 베르나르도 후작이 참모장 메토 로베르트 자작과 함께 나타났다.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문양은 라미노프 왕국에도 알려져 있는지라, 막심 체호프 남작은 감히 더 소란을 일으키지 못하고 한발 물러났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막심 체호프 남작을 힐끔 보고는 이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엘리오 경.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께서 경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소?”
“제가 꼭 만나야 하나요?”
엘리오는 굳이 다른 왕국의 사람들과 안면을 터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물론 엘리오 경이 번잡한 걸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히르헤라에서 함께 지낼 사람이니 얼굴 정도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오.”
“그건 또 그렇네요. 만나 볼게요.”
“잘 생각하셨소. 내가 소개해 드리리다. 함께 가십시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마치 연회장의 안내자처럼 앞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엘리오가 뻘쭘한 얼굴로 걸음을 내디뎠다.
베르나르도 후작 일행이 떠나자 굳어 있던 남작들도 하나 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베르나르도 후작 일행을 지켜보던 막심 체호프 남작이 줄리 그린우드 남작에게 물었다.
“방금 그분은 베르나르도 후작님이 아닙니까?”
“맞아요.”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은 혹시 에스카토스 왕가 사람이었습니까?”
“그보다 더한 분이세요.”
“더하다고요?”
“아직 히르헤라의 수호자에 대한 소문을 못 들으셨어요?”
“히르헤라의 수호자요?”
“히르헤라에서 살아남으려면 엘리오 라고아 남작님의 이름 정도는 알아 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가 히르헤라의 수호자입니까?”
“그래요. 그분은 슬래시 랜드의 영주시며, 소드마스터인 코드란테스 백작을 꺾으셨을 뿐 아니라, 마족의 침공까지도 단신으로 막아 내셨어요.”
“그 젊은 귀족이 히르헤라의 수호자라는 겁니까?”
“네, 이제 남작님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아시겠어요?”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막심 체호프 남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보다 십 년은 어려 보이는 청년이 소드마스터를 꺾고, 마족을 물리쳤다니?
‘과장도 정도껏 해야지, 그런 말을 누가 믿는다고.’
“베르나르도 후작님 같은 대귀족이 남작을 모시고 가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요? 여기서 있었던 일이 라미노프 왕국군 원수의 귀에 들어가면, 남작님은 여기저기 바쁘게 불려 다닐 거예요. 그때 변명할 말이나 잘 생각해 두세요. 하아! 그러고 보니 남작님 때문에 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생겼네요.”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리를 옮겨 갔다.
멍하니 서 있는 막심 체호프 남작에게 이고르 티호노크 남작이 다가갔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히르헤라의 수호자라는 이름은 처음 듣네. 그런 게 정말 있다면 백작님께서 진즉에 가르쳐 줬을 걸세.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 그 애송이는 아닐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베르나르도 후작의 태도가 너무 정중해서…….”
“왕족이겠지.”
이고르 티호노크 남작의 말에 막심 체호프 남작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사실 청년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게 맞았기 때문이다.
***
비상 시국답게 파티를 끝내기에 이른 시간인 저녁 10시쯤 환영회가 끝났다.
나찰라 중대로 돌아간 막심 체호프 남작은 간이침대에 길게 몸을 뉘였다.
잠자리에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동안 왕래가 없던 남작들과 안면을 텄고, 모처럼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여기사도 만났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야…….’
정작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왕국의 남작들과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곁으로 오지 않았고, 어쩌다 자신이 다가가면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문득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말이 떠올랐다.
―베르나르도 후작님 같은 대귀족이 남작을 모시고 가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요? 여기서 있었던 일이 라미노프 왕국군 원수의 귀에 들어가면, 남작님은 여기저기 바쁘게 불려 다닐 거예요. 그때 변명할 말이나 잘 생각해 두세요. 하아! 그러고 보니 남작님 때문에 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생겼네요.
찜찜함의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여기사는 청년을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라 했고, 베르나르도 후작은 그를 ‘엘리오 경’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 귀족 청년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하지만 그가 소드마스터인 코드란테스 백작을 꺾었고, 단신으로 마족을 물리쳤다는 것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단신으로 마족을 물리쳤다’는 것은 과장과 비유라고 생각하면 문제없다. 이를테면 그건 ‘홀로 백 명의 적군을 막아 냈다’는 식의 무용담 같은 거다.
하지만 ‘소드마스터인 코드란테스 백작을 꺾었다’는 것은 다르다. 거기에는 과장이나 비유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 넌 뭐하는 놈이냐?”
막심 체호프 남작이 중얼거릴 때 누군가 거칠게 막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블러드 미르 백작의 동생이자 불꽃 기사단 단장인 몰라트 미르 자작이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막심 체호프 남작은 급히 침대에서 내려갔다.
“막심 체호프! 너 이새끼!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