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76
1076회. 주둔지는 안전한 것 같은가?
에스카토스 왕국군의 균열 감시가 끝날 때까지 균열은 조용했다.
그러자 주둔지 분위기는 둘로 나뉘었다.
대부분은 여전히 그것을 ‘폭풍 전의 고요’로 생각했지만, ‘타메이온의 변화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그러던 차에 베일럼 왕국의 아니마 중대가 균열 감시에 투입됐다.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주둔지.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
정오 무렵.
여느 때처럼 막사에서 마나 개발서를 읽던 엘리오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경험에 의하면 이런 경우 지인이나 자신의 주변에 꼭 무슨 일이 생기곤 했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눈에 보이는 설원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잠시 빙벽 쪽을 보던 엘리오는 희미한 기합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중대 막사 뒤편 공터에서 파비안이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엘리오를 발견한 파비안이 검을 거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중대장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냥 산책 중이야.”
“웬일이십니까? 이 시간에 산책을 다 하시고.”
파비안이 하루 종일 숙소에 처박혀 지내는 엘리오를 놀리듯 말했다.
“지금 균열 감시를 어느 부대에서 맡고 있지?”
“오늘 베일럼 왕국의 아니마 중대가 교체 투입됐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베일럼 왕국의 차례라니 공교롭군.”
“왜요?”
“느낌이 좋지 않아. 조만간 일이 터질 것 같아.”
“헉! 설마 그래도 지난번처럼 주둔지까지 바로 밀리지는 않겠죠?”
“정말 마족이 침공한다면……. 아마 막지 못할 거야.”
엘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베일럼 왕국의 한 개 중대가 마족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수들이 서식지를 옮긴 것 같다고 하던데……. 그건 헛된 바람이었나 보네요.”
“그 말을 믿었냐?”
“믿긴요. 그랬으면 좋겠다 정도였습니다. 그나저나 마족의 침공이 확실합니까?”
“내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어.”
“히르헤라 주둔지의 병력으로 막아 낼 수 있겠습니까?”
“막아야지. 다른 방법이 없잖아.”
“전략상 후퇴도 있지 않습니까. 안 될 걸 알면서 무모하게 버티는 것보다…….”
“히르헤라를 빼앗기면 마족과의 전쟁은 더 어려워질 거야. 지켜야 할 곳이 너무 많아지잖아. 히르헤라가 마족에게 넘어가면 북부는 망한다고 보면 돼.”
“하아! 그건 또 그렇네요.”
파비안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히르헤라에서의 후퇴가 곧 북부의 멸망이라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아무래도 내 말대로 되려는 모양이다.”
말과 함께 엘리오가 균열이 있는 북쪽 하늘을 가리켰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파비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새파란 하늘 저편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저, 저게 뭡니까? 비구름은 아닌 것 같은데…….”
“어둠의 에테르[魔氣]다.”
“어둠의 에테르요?”
“그래, 응집된 어둠의 에테르가 구름처럼 보이는 것뿐이야.”
엘리오는 과거 저런 현상을 몇 번 본 적이 있어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파비안은 난생처음 보는 자연현상에 압도당한 얼굴이었다.
“저 어둠의 에테르 아래 마족들이 가득하겠죠?”
“그렇겠지.”
곧이어 균열 감시 초소 쪽에서 위기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 땡! 땡! 땡! 땡―!
비상 태세를 유지하던 기사와 병사 들이 막사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검게 물든 하늘을 본 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했다.
파비안과 기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들을 공터로 내몰았다.
마지막으로 파비안과 기사들이 합류하자 엘리오는 병사들 앞으로 나아갔다.
“쫄았냐?”
“…….”
“쫄았냐고!”
엘리오가 소리치자 기사와 병사 들이 풀 죽은 소리로 ‘예’라고 답했다.
그러자 엘리오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고향에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손 들어라.”
“…….”
하지만 질문의 의미를 모르는 기사와 병사 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향에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히르헤라에서 싸울 필요 없다. 그런 사람은 이곳을 떠나도 좋다. 탈영이라고 하지 않겠다. 어디든 가서 잘 먹고 잘살아라. 그런 사람은 옆으로 빠져라. 지금 보내 줄 테니까. 너희들을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농담하는 것도 아니다. 고향에 지켜야 할 사람이 없으면 열외해라. 히르헤라에 남아 있으면 너희들 대부분은 죽을 거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기회 줄 때 빠져라.”
눈치를 보던 병사들 삼십여 명이 쭈뼛쭈뼛 옆으로 빠졌다.
엘리오가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찌질한 것들. 지금까지 사랑하는 사람 하나 만들지 못하고 뭐 했나. 오래 살고 싶으면 남부로 가는 게 좋을 거다. 남부에서는 제대로 좀 살아 봐라. 가라.”
삼십여 명의 남녀가 우르르 남쪽으로 달려갔다.
엘리오가 아직 남아 있는 삼백여 명을 향해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히르헤라를 지키지 못하면 북부는 멸망할 거다. 너희들 대부분은 북부가 멸망하기 전에 이곳에서 죽을 테고. 사랑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 나 혼자라도 살고 싶다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도 떠나라. 너희들이 남는다고 질 싸움 이기는 거 아니니까, 양심의 가책 같은 거 가질 필요 없다. 나와라.”
“…….”
기이한 침묵이 루퍼스 중대를 휘감았다.
잠시 후 기사와 병사 들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안 갑니다!”
“우리는 북부 최강 루퍼스 중대입니다!”
“어차피 죽을 거 여기서 죽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는 중대원들을 착잡한 눈으로 보던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선택한 죽음이다. 나 때문에 죽게 됐다고 말하지 마라. 알겠나!”
“예!”
이윽고 엘리오는 남은 삼백여 명의 중대원들을 이끌고 베르나르도 후작군 집결지로 향했다.
다가오는 루퍼스 중대 깃발을 본 베르나르도 후작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잠시 후 후작 직속의 불사조 기사단과 네 개 중대 약 천삼백여 명의 병력이 에스카토스 왕국군 본진을 향해 질서 정연하게 이동했다.
***
히르헤라 주둔지.
설원에 에스카토스, 베일럼, 라미노프 왕국군이 길게 늘어섰다.
세 개 왕국, 일만 이천여 명의 군사가 철벽처럼 주둔지를 둘러쌌다.
밀려오는 먹구름을 보고 가라앉았던 사기가 되살아났다.
세 개 왕국군 기사단이 중앙으로 집결하자 병사들의 사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베일럼 왕국군 부장군 막스 체이드 백작이 원수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에게 다가갔다.
“원수님. 균열에 투입된 아니마 중대를…….”
“그냥 두게.”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시선은 주둔지 근처까지 내려온 검은 구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막스 체이드 백작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마 중대는 체이드 백작가의 정예 부대인지라 그들을 잃으면 손해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제야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소드마스터인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의 서늘한 눈빛에 막스 체이드 백작은 눈을 내리깔았다.
“누구라도 지켜야 할 자리일세. 그 전에 묻고 싶군. 백작이 보기에 주둔지는 안전한 것 같은가?”
“…….”
막스 체이드 백작은 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이 주둔지로 내려온다고 해도 안전해지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균열 감시 초소와 히르헤라 주둔지의 위험은 그다지 차이가 없네. 마족이 작정하고 침공한 것이라면 주둔지 병력 중에 몇이나 살아남을까? 천? 이천?”
“…….”
“못해도 일만 명은 히르헤라 주둔지에 뼈를 묻게 될 걸세. 5분 10분 먼저 갈 뿐이야.”
“그래도 주둔지에서는 생존의 기회라도 있지 않습니까?”
“달아날 기회를 말하는 건가? 백작답지 않군. 백작만 피해를 입는 게 아니니 나만 손해 본다 생각하지 말게. 위험하다고 최전방의 병력을 뒤로 빼면 누가 전투에 앞장서겠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 구름을 보게.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저걸 어둠의 에테르라고 부르더군. 전적으로 동감하네. 보기만 해도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끔찍해. 저 기운의 주체를 만난다면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나조차도 이런데 기사와 병사 들은 더하겠지? 백작 휘하의 부대로 돌아가 그들을 격려하도록 하게.”
“예.”
막스 체이드 백작은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에게 군례를 올려 보인 후 돌아섰다.
묵묵히 전방을 응시하던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시작됐다.”
“뭐가요?”
“마수와 아니마 중대의 싸움.”
“아…….”
파비안은 귀를 균열 초소 쪽으로 틀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조한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는 파비안의 귓가로 엘리오 중대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 죽었군.”
“…….”
순간 파비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채 5분도 되기 전에 아니마 중대가 몰살당했다니 정신이 혼미할 정도다.
드드드드―.
설원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일처럼 마수 떼가 몰려왔다.
화이트 울프, 거대 스밀로돈, 자이언트 베어, 예티같이 눈에 익은 마수도 있었지만 태반이 처음 보는 마수였다.
시커멓게 변한 하늘에서도 끊임없이 ‘부우우―’ 하는 소리가 들렸다.
흡혈 파리 떼가 분명했다.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마수들 뒤로 각양각색의 마물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마물들의 숫자도 마수에 뒤지지 않았다.
마수와 마물이 하얗던 설원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일만 이천 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숫자다.
조금 전까지 용기백배하던 삼국 병사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특히나 이제 막 배치받은 라미노프 왕국군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으아악! 살려 줘요!”
“다 죽을 거야! 다 죽는다고!”
“비켜!”
마수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라미노프 왕국군의 후미가 무너졌다.
수백 명이 전열을 이탈해 달아났고, 남아 있는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기사들이 뛰어다녔다.
라미노프 왕국군 원수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은 난장판이 된 자신의 부대를 보고 눈을 찌푸렸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마족의 침공을 한차례 경험한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왕국군은 차분했다.
그들 역시 절망했지만 그렇다고 라미노프 왕국군처럼 개판이 되지는 않았다.
마수 떼가 닿기 전에 마수 특유의 노린내가 먼저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마족의 예봉을 꺾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려면 이쯤에서 뭔가 보여 줘야 한다.
베일럼의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과 라미노프의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이 에스카토스 왕국 원수 스타우로스 에스카토스 공작을 보았다.
은연중에 에스카토스 왕국이 주둔지 부대들을 이끌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타우로스 에스카토스 공작은 오른손을 들었다가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옵티머스 기사단장 조엘 스트림 백작이 치고 나가며 외쳤다.
“에스카토스를 위하여!”
옵티머스 기사단이 ‘와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에스카토스의 기사단이 전진하자 베일럼 왕국의 폴라리스 기사단이 좌측, 라미노프 왕국의 철벽 기사단이 우측에서 나란히 달려 나갔다.
세 왕국을 대표하는 최정예 기사단들과 마수 떼가 중간에서 맞부닥쳤다.
콰자자작―!
“크아아!”
“케엑!”
격렬한 충돌음과 함께 ―왕국군 기사단의 칼에 맞은― 마수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파도처럼 밀려오던 마수들이 한순간 멈칫했다.
기사단의 활약에 왕국 연합군 진영에서 ‘와아아!’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환호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사단이 마수를 척살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마수들이 기사단 좌우로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기사단이 왕국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사단을 집어삼킨 마수들이 후미에 있던 왕국 연합군에게 밀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