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79
1079회. 평등한 세계는 없다니까
글라체스 요새는 오래전 론디니움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지어진 성형요새(星形要塞, Star Fort)다.
별 모양으로 돌출된 오각형 부위마다 에스카토스, 베일럼, 라미노프의 최정예 부대가 배치됐다.
그러고도 남은 두 곳 중 하나는 루퍼스 중대, 다른 하나는 세 왕국의 기사단에서 차출한 기사들이 맡았다.
루퍼스 중대의 위상이 세 왕국 기사단 정예와 맞먹는 위치로 올라갔다기보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초절한 무위를 고려해 그렇게 한 것이다.
루퍼스 중대.
늦은 밤.
5미터 높이의 성곽 위에서 병사들과 함께 보초를 서던 파비안이 투덜거렸다.
“아니, 그래도 손실된 인원은 꽉 차게 보충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이백 명으로 여길 어떻게 지키라는 거지?”
그러자 기수 레이 모건이 한마디 했다.
“그나마 보충된 게 어디야. 다른 중대는 지금 통폐합 과정을 밟고 있다고.”
“에혀!”
파비안이 탄식했다.
워낙 사망자가 많이 나온 탓에 베르나르도 후작가도 4개 중대를 2개 중대로 줄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에스카토스 왕국의 다른 두 개 영지군은 더했다.
코드란테스 백작가와 푸토코아 백작가의 경우 한 개 중대로 줄여야 할 처지였다.
5미터 아래를 내려다보던 파비안이 중얼거렸다.
“젠장. 좀 더 높이 쌓지 5미터가 뭐야. 구울이 손을 뻗으면 닿겠는데?”
글라체스 요새는 인간을 상대로는 괜찮은 요새였다.
하지만 상대가 마수나 마물이라고 하면 또 다르다.
거대한 체구의 마물들에게 5미터는 넘지 못할 벽이 아니었다.
때마침 순찰을 나온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너는 항상 불만이 많아. 루퍼스 중대에 보충이 줄어든 게 누구 때문인지 아냐?”
“중대장님이 일인군단이시라 그런 거 아닙니까?”
“응, 아니야. 우리 중대에 보충이 줄어든 건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야.”
“예? 제가 뭘 어쨌다고요? 저는 윗분들에게 찍힌 적 없습니다.”
깜짝 놀란 파비안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엘리오를 보았다.
작위를 받기 전까지 기사는 귀족과 평민의 경계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항상 귀족들 눈치를 보며 살았는데 자기 때문이라니?
“너, 소드 비기너가 됐잖아. 다른 부대로 치면 중대장이라고. 후작님은 네가 병사 백 명의 역할을 할 거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러니까 너 때문에 충원이 덜 된 거야.”
“아…….”
파비안은 엘리오 중대장과 중대원들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이제는 소드 비기너다.
엘리오 중대장의 뒤만 보며 가다 보니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무려 중대장급 검사로 비춰질 터였다.
‘이런 젠장. 인원 충원을 안 해 준다고 난리를 떨었는데 그게 나 때문이었다니!’
이렇게 되면 윗분들의 일처리를 두고 뭐라 하기도 어렵다.
괜히 민망해진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중대장님. 언제까지 이곳에 있기로 한 겁니까? 음식과 파이어 스톤을 생각하면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요?”
“몰라. 라미노프 왕국의 보급부대가 몰살당해서, 우리 걸 그쪽에 지원해 주기로 했단다. 일주일이 한계다.”
“일주일요?”
“마족들이 쳐들어오지 않았을 경우 그렇다는 거지.”
“아…….”
파비안은 바로 엘리오의 말을 알아들었다.
마족들에게 글라체스 요새의 성벽은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주둔지에서처럼 글라체스 요새에서도 속절없이 밀릴 게다.
아까부터 눈치를 보고 있던 기수 레이 모건이 끼어들었다.
“중대장님, 어차피 지금 병력으로 안 되는데 후퇴는 안 합니까?”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 위에서 하라면 하는 거지.”
“윗분들이야 여차하면 몸을 뺄 수 있지만 저희는 그게 안 되지 않습니까. 상대가 안 되는데 왜 여기에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히르헤라를 포기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닐 거다. 여기를 내주면 나중에 다시 되찾을 수 있겠냐? 히르헤라는 타메이온의 일부가 되는 거야. 인간은 균열 근처에도 못 가게 될 테고, 야금야금 마물들이 북부를 장악하겠지. 지켜 줄 빙벽도 없는데 북부에서 멈추겠냐? 대륙이 싹 망하는 거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지금 히르헤라는 타메이온과 인간 세계의 관문이야. 여기를 내어 주는 건 곧 대륙을 내어 주는 것과 같다고. 그걸 아는 대귀족들이 쉽게 발을 뺄 수 있겠냐?”
“그래도 결국 뺄 거 아닙니까?”
엘리오가 레이 모건을 슬쩍 보았다.
왠지 억울한 표정이다.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할 영지병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안됐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어느 하늘 아래도 공평한 인생은 없는 것을.
“대귀족들도 이곳에서 죽었으면 좋겠냐?”
“그, 그런 건 아닙니다.”
레이 모건은 황급히 부인했다.
아직 작위도 받지 못한 그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즉결 처분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
“예?”
“기사가 된 지 얼마나 됐지?”
“5년 전에 서임을 받았습니다.”
“그럼 지난 5년 동안은 기사로 살았겠군. 맞나?”
“예.”
“기사가 받는 대접도 상당하던데. 평민들이 경을 볼 때 속 좀 끓었겠어.”
“…….”
레이 모건은 중대장의 말속에 담긴 뜻을 알고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본 엘리오는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돌아섰다.
‘평등한 세계는 없다니까.’
노예는 평민이, 평민은 귀족이, 귀족은 대귀족이 부러운 법이다.
레이 모건의 이야기가 정리되자 파비안이 불쑥 말했다.
“마족들이 오늘 밤에 쳐들어오지는 않겠죠?”
“오면 싸우고, 안 오면 쉬는 거지.”
“중대장님에게는 예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떨 것 같습니까?”
“아무 의미 없다. 주위를 둘러봐라. 마수와 마물 천지다. 여기서 돌 던지면 마수 머리에 맞을 거다.”
말과 함께 엘리오가 돌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헉! 중대장님. 던지시게요?”
“어, 우리 주변에 마수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 주려고.”
“그러지 마십쇼. 던지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냄새가 장난 아니지 않습니까.”
“냄새만으로 알 수 있겠냐. 소리를 들려줄게.”
말과 함께 엘리오가 돌덩이를 아래로 힘껏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아이스 오우거 한마리가 성곽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왔다.
“봤냐? 내 말 맞지?”
“어이쿠! 왜 가만히 있는 마수를 건드립니까? 그러다가 마족이 자극받으면 어쩌려고요?”
장창을 집어 든 파비안이 아이스 오우거의 머리를 노리고 던졌다.
기세 좋게 날아간 장창은 아이스 오우거의 이마에 맞았지만 두꺼운 외피를 뚫지 못하고 튕겼다.
“아…….”
파비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소드 비기너가 됐기에 혹시나 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아이스 오우거가 성곽 끝을 움켜잡고 기어올랐다.
아이스 오우거의 머리통이 성곽 위로 불쑥 올라온 순간, 엘리오가 벼락처럼 검을 뽑아 휘둘렀다.
콰직―!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아이스 오우거의 머리통이 뒤로 날아갔다.
머리를 잃었음에도 아이스 오우거의 두 손은 성곽 끝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뭘 보고만 있어? 떼 버리지 않고.”
엘리오의 말에 파비안은 아이스 오우거의 손가락을 발로 걷어찼다.
잠시 후 아이스 오우거의 몸통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돌아선 파비안이 황당한 얼굴로 항의했다.
“중대장님! 왜 가만히 있는 마수를 건드립니까? 그러다가 마수와 마물 들이 몰려오면 어쩌려고요?”
“지금 마수와 마물은 마족의 통제 아래 있어. 마족이 명령하지 않는 한 떼거리로 안 와. 걱정하지 마.”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봤잖아. 안 온다니까.”
잠시 성곽 아래 동향을 살핀 파비안이 우는 소리를 했다.
“제발 돌 던지지 마십쇼. 중대장님은 장난으로 던지겠지만 그 돌에 마수가 맞으면…….”
“기분 나쁘겠지.”
“흥분한 마수들이 성으로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안 온다니까.”
“중대장님이 마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안 오는 거 보여 줬잖아.”
“운이 좋았던 거죠.”
“운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다시 보여 줘?”
엘리오가 돌덩이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파비안은 얼른 말을 바꿨다.
“중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안 오네요. 제가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글세 그렇다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돌을 던지게 됐지?”
“우리가 아니라 중대장님이 독단적으로 던지신 겁니다. 요새 주변에 마수와 마물이 많다고 하시면서.”
“아! 정 없는 놈. 여태 같이 있어 놓고 독단적으로 그랬단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러지 마시라고 만류하기까지 했습니다.”
파비안이 칼같이 선을 긋자 엘리오는 더 이상 그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성곽 일대에 내려앉았다.
문득 엘리오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많던 별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의 에테르[魔氣]가 히르헤라를 완전히 장악한 것 같았다.
‘왕들의 하늘’에서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과연 상계답다.
‘마족 군주는 어느 정도나 강할까?’
그가 마족 군주와 마왕을 두고 비교할 때 파비안이 말했다.
“우측에 보이는 저 불빛이 베일럼 왕국군 초소라는 거 아십니까?”
성형요새의 오각형 돌출 부위는 좌우편 돌출 부위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양쪽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가 베일럼이었냐?”
“예. 우측이 베일럼, 좌측이 삼국 기사단 연합입니다.”
“그랬군.”
엘리오의 시선이 우측으로 향했다.
애나 로건과 줄리 그린우드 남작을 떠올리자 기분이 묘했다.
가급적 살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게 어디 자기 뜻대로 되나 말이다.
“애나 로건 경에게 가르쳐 준 그 스왈로우 플라잉 말입니다. 그거 저도 배울 수 있습니까?”
“너는 바로 익힐걸?”
“그럼 저도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까?”
“애나 로건 경에게 못 들었어? 둘이 자주 만나길래 아는 줄 알았는데.”
“마나를 혈관에 보내는 요령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조언 몇 번 해 준 게 전부입니다.”
“세라 양에서 애나 로건 경으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고?”
“저 그렇게 갈대 같은 남자 아닙니다.”
“참, 세라 양은 무사하냐? 팬텀 기사단도 많이 죽었다고 하던데.”
“팔을 좀 다쳤지만 무사합니다.”
파비안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세라의 경우 마력총 외에 기댈 곳이 없는 터라 위태위태했기 때문이다.
“세라 양과 진전은 좀 있고?”
“아직 말도 못 붙여 봤습니다.”
“잘해 봐. 이젠 너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다를걸? 소드 비기너잖아. 조만간 작위도 준다고 하더라.”
“그렇습니까? 하아! 세라 양이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스왈로우 플라잉 가르쳐 줄 테니까, 세라 양에게도 가르쳐 줘 봐. 애나 로건 경도 그 체술 덕분에 살았다잖아.”
“제가 세라 양에게 가르쳐 줘도 됩니까?”
침울하던 파비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이 배우는 것은 물론 세라 양에게 가르쳐 줘도 된다니!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세라 양은 물론 배우고 싶다는 사람에게 다 가르쳐 줘도 돼. 검술만 허락받아. 그것도 내가 있는 동안만.”
“어디 가십니까?”
“고향에 간다고 했잖아. 나 고향에 가면 검술도 네 마음대로 해. 그걸로 국을 끓이건 밥을 해 먹건 상관 안 할 테니까.”
“고향이 아주 깊은 산속에 있나 봅니다?”
“어, 너는 죽었다 깨나도 못 찾아와.”
“알겠습니다. 체술부터 가르쳐 주십쇼.”
체술을 배워 세라에게 가르칠 생각에 파비안의 눈이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