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84
1084회. 손해 보는 짓은 안 한다고 했잖아
엘리오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몰록을 보았다.
마족 군주를 광기에 사로잡힌 괴물이려니 생각했는데 의외로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쪽의 권속이 되면 빙벽을 넘어오지 않겠다고?”
“그렇다. 모쿠바스의 마족은 빙벽을 넘어가지 않겠다. 네가 바라는 게 대륙의 평화라면 내 권속이 되거라.”
“…….”
잠시 생각하던 엘리오가 물었다.
“모쿠바스의 마족만 있는 건 아닐 테고 다른 마족들은? 그들이 그쪽처럼 작정하고 넘어올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균열이 발생한 지역이 모쿠바스니, 다른 마족이 균열로 가려면 내 영역을 지나야 한다. 그것조차도 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마족이 그쪽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하면?”
“인간의 군대가 다른 영지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듯, 마족도 그러하다. 나의 영지에 허락 없이 들어올 마족은 없다. 그건 곧 마족 간의 전쟁을 의미하니까.”
“아하.”
엘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몰록의 영지 안에 균열이 있는 한 다른 마족의 침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모양이다.
“네가 나의 권속이 된다면 인간 세상은 안전해질 것이다. 나의 권속이 되어 인간을 다스릴 테냐?”
거듭된 질문에 엘리오는 잠시 생각했다.
지신이 이세계에 온 목적도 궁극적으로는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다.
그러니 몰록의 저 제안은 딱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곳에 천자마와 금사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슬슬 제국의 마탑과 남부 대수림을 조사할 때가 됐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균열 일대를 안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강호에서 염마왕에게 자신을 바쳤던 유명교도들의 최후를 생각하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권속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너의 몸과 영혼이 온전히 나에게 귀속된다. 너는 나의 사도(使徒)가 되어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너에게 대적하는 자를 내가 죽일 것이며, 나에게 대적하는 자를 네가 죽이게 될 것이다.”
“에이, 그건 아니지.”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냐?”
엘리오가 천둔검의 검면으로 발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어디를 봐도 내가 손해잖아. 어차피 나한테 덤비는 것들은 내가 다 처리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쪽에 덤비는 것도 내가 처리해 줘야 한다는 거잖아? 손해나는 짓을 왜 해?”
“나는 너를 왕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뭘 만들어 줘. 왕이 되려면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싸워야 하잖아. 내가 침대에서 뒹굴거릴 동안 그쪽이 제국과 왕국을 점령해서 나한테 바칠 거야? 그런 거 아니잖아? 왕이 되는 것도 내 손으로 해야 되고, 그쪽의 적도 내가 처리해 줘야 하잖아. 아니야?”
그러자 몰록이 기이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를 보았다.
보통은 ‘왕을 만들어 주겠다’거나 ‘대적자를 죽여 주겠다’고 하면 넘어왔는데, 저 인간은 뭘 저렇게 따지는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처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 능력이 아까우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저 인간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군단이 입을 피해가 너무 컸다.
드라고드와 프롬푸트를 잃은 것도 뼈아픈 손실인데, 놈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니 더 큰 희생이 따를 판이다.
“그래서, 거절하겠다는 것이냐?”
몰록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글라체스 요새를 덮고 있던 어둠의 에테르가 엘리오에게 몰려갔다.
마기에 휘감긴 엘리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물속에라도 빠진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러더니 이내 주화입마에 빠진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급기야 남궁연과 하나뿐인 딸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기까지 했다.
‘환각이구나.’
엘리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비록 현실이 아님을 알지만 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때 몰록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의 권속이 되겠다고 하면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 권속이 되겠느냐?”
혼미한 와중에 엘리오는 피식 웃었다.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니?
저 몰록은 자신의 바람이 무엇인지 죽었다 깨도 모를 터였다.
문득 엘리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됐다.
몰록 덕분에 잠시나마 또렷하게 가족들을 본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엘리오는 구천여일진경의 법문을 떠올렸다.
단전에서 일어난 영기가 등줄기를 따라 백회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단전으로 돌아갔다.
혼미하던 정신이 또렷해지면서 남궁연과 딸의 모습이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이윽고 엘리오가 낭랑한 음성으로 답했다.
“손해 보는 짓은 안 한다고 했잖아. 조건을 바꿔 봐. 내가 혹할 만한 것으로. 아니면 한바탕 싸워 보든지.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
몰록이 기막힌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를 보았다.
자신과 같은 고위 마족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흑마법사들은 자신의 그림자만이라도 보겠다고 목숨을 거는데, 사도가 되라는 제안을 거절하다니.
몰록의 뒤에 서 있던 마족 중 하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건방진 인간! 죽이지 않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순간 몰록이 손을 들어 올렸다.
목에 핏대를 세우던 마족이 움찔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혹할 만한 제안이 무엇이냐?”
“타메이온으로 돌아가는 거지.”
“내가 타메이온으로 돌아간다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살려는 줄게.”
“크하하핫!”
기막힌 대답에 몰록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발작적인 웃음이 가라앉았을 때 몰록의 눈에서는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어쩔 수가 없군. 죽여라.”
그러자 그의 뒤에 장승처럼 서 있던 여섯 명의 마족이 엘리오를 덮쳤다.
각양각색의 병기가 엘리오를 노리고 날아갔다.
엘리오 역시 기다렸다는 듯 천둔검을 휘둘렀다.
콰차차차차창―!
천둔검과 각종 병기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부딪쳤다.
한차례 광풍처럼 맞부닥쳤던 마족들이 다시 거리를 벌렸다.
치열한 공방이었지만 승패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몰록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 여섯 명의 마족은 자신의 직속 부하로 ‘불멸의 맹약자’라 불리는 강자들이다.
그런 강한 존재들과 대등하게 싸우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설사 발람이라 해도 불멸의 맹약자들과 싸우면 고전할 텐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로네미아의 군주인 발람은 모든 면에서 자신과 경쟁하는 고위 마족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상상을 초월한 강자였다.
‘놀랍군.’
몰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불멸의 맹약자들과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서로에게 강공을 퍼부으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력의 블레이드’와 ‘오라 블레이드’가 허공에서 만나 폭발했다.
‘인간이 맞기는 한가?’
드라고니안과 아나킨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는데,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불멸의 맹약자들이야 첫 싸움이니 그렇다 쳐도,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왜 생생하냐 말이다.
‘안 되겠군.’
몰록은 불멸의 마법검 아이테르둠을 천천히 빼 들었다.
지이잉―.
아이테르둠이 가볍게 몸을 떨어 공명음을 흘렸다.
기분 좋은 소리가 아니라 어딘지 마지못해 하는 듯한 느낌이다.
몰록은 아이테르둠의 태도를 무시하고 전방을 응시했다.
콰자자작―!
강력한 파열음과 함께 불멸의 맹약자 둘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뒤로 훨훨 날아갔다.
그들의 아래로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독 오른 불멸의 맹약자들이 마력의 블레이드를 폭풍처럼 쏟아 냈다.
지금만 살고 죽겠다는 듯 마력의 배분 따위를 고려하지 않은 이성을 상실한 공격이다.
그 무지막지한 공세를 받아 내느라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약간의 틈이 보였다.
몰록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기회가 오자, 아이테르둠에 투명 마법을 건 후 던졌다.
마법검 아이테르둠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빛줄기처럼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옆구리에 박혔다.
아니 박히는 줄 알았다.
쩡―!
기이한 파열음과 함께 아이테르둠이 뒤로 튕겨 났다.
엘리오의 호신강기에 막힌 것이다.
투명화 마법이 깨진 아이테르둠은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떨어져 내리다가 이내 몰록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엘리오가 몰록을 힐끔 보며 말했다.
“군주가 기습하기 있냐?”
몰록은 대답 대신 아이테르둠을 말아 쥐고 벼락처럼 날아올랐다.
몰록까지 끼어들자 오 대 일의 싸움이 시작됐다.
몰록의 참가로 싸움은 더 치열해졌다.
엘리오를 스쳐 지나간 마력의 블레이드가 폐성에 떨어지자, 폐성 외부의 돌벽이 떨어져 나갔다.
저러다가 구멍이라도 날 것 같자 엘리오는 조금 더 높이 날아올랐다.
다섯 마족과 엘리오는 마치 신들처럼 하늘에서 공방을 퍼부었다.
어둠의 에테르로 검게 물든 하늘에서 연신 벼락 치는 소리가 울렸다.
상위 마족의 능력은 신에 가깝다.
몰록이 뛰어들면서부터 엘리오는 슬슬 지쳐 갔다.
‘제길! 쉽지 않네.’
엘리오는 무심코 손등으로 이미를 훔쳤다.
손등이 땀에 젖어 번질거렸다.
구천구검을 익히고 난 뒤로 처음 겪는 현상이다.
무한대에 가까운 영기와 별개로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헉! 헉!”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고된 싸움은 창고를 나온 이래 처음인 것 같다.
폐성을 보호하느라 신경이 분산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몰록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느 적보다 강했다.
조금만 정신 집중이 흐트러져도 바로 환각과 환청을 불러일으키는 어둠의 에테르 때문에 더 힘들었다.
죽은 피처럼 검붉은 빛깔의 블레이드들 사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암경이 느껴졌다.
몰록의 공격이다.
엘리오는 즉시 검붉은 블레이드들과 암경을 쳐 냈다.
콰콰콰콰쾅―!
역시나 터져 나간 검붉은 검강 사이로 아름다운 검 한 자루가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실 끊어진 연처럼 맥없이 날아가던 검은 어느 순간 몰록의 손으로 돌아갔다.
설마 이기어검은 아닐 테고 마법검이 분명했다.
평범한 공격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네 명의 마족이 사지를 활짝 펼치더니,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외쳤다.
곧이어 네 명의 마족이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갔다.
‘젠장! 또 강체술인가?’
아까 어떤 마족이 블랙 드래곤으로 변했던 것처럼 저들도 변하려는 모양이다.
그냥 싸워도 밀릴 판인데 강체술까지 쓰다니, 가슴이 답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에 거대한 뿔이 달린 괴물 넷이 나타났다.
조금 전까지는 인간의 머리였는데 지금은 소에 가까웠다.
악신 샤이탄의 권능으로 태고의 힘을 되찾은 마족들이 괴성과 함께 엘리오에게 돌진했다.
엘리오는 즉시 산검멸지(散劍滅地)의 수법으로 괴물들에게 진검강을 날려 보냈다.
퍼퍼퍼퍽―!
집채만 한 괴물들은 진검강에 격중당했지만 강력한 마력의 보호를 받아 쓰러지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한계를 직감한 엘리오는 즉시 구천검령을 불러냈다.
순간 홀연히 나타난 네 자루 구천검령이 괴물들을 꼬치에 꿰듯 꿰어 버렸다.
“크허허헝!”
“우어어엉!”
괴물들은 흡사 도살당하는 소처럼 구슬프게 울어 댔다.
연이어 엘리오가 검결지로 몰록을 가리켰다.
순간 ―마치 자신의 마법검처럼― 유령처럼 나타난 검에 공포를 느낀 몰록은 어둠의 에테르 속으로 달아났다.
길이가 30여 미터나 되는 거대한 붉은 검이 조용히 어둠의 에테르 속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