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94
1094회. 남자가 말을 했으면 지켜야 하는 거 알지?
‘빅토르 케른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는 다소 충격적인 소식 앞에서도 귀족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에스카토스 공작이 재밌다는 얼굴로 후작을 보았다.
“대전사인 용병왕 크리스 두나미스는 대장군과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는데……. 그간 교류가 없었나 보오?”
“지난 수년간 평화로웠으니까요. 검사들이야 무슨 일이 생겨야 얼굴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베르나르도 후작의 말을 끝으로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잠시 후 참모장 메토 로베르트 자작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탈린 왕국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이제 확실해진 것 같습니다. 라미노프 왕국을 이용해도 효과가 없자 결투로 선회한 게 틀림없습니다.”
부장군 콜린 스트롱 백작이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탈린 왕국 참모장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검술 경지를 믿지 않았는데, 그래도 나름 신경을 쓴 것 같습니다. 케른 백작의 대전사로 용병왕을 내세우다니……. 문제는 케른 백작의 대전사가 패했을 때입니다. 탈린 왕국은 라미노프 왕국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판을 키우고 있습니다. 결투에서 패했다고 선선히 물러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물었다.
“부장군은 탈린 왕국이 곡물 공급량을 조절해 우리를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나?”
“비취호수까지 들먹거린 자들이니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결투에서 패하면 곡물 거래로 보복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지적인지라 베르나르도 후작은 반박하지 않았다.
북부 최강이라는 탈린 왕국의 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막사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개인의 결투와 왕국 간 곡물 거래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곡물 판매량을 줄이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지만 같은 말의 반복에 불과했다.
에스카토스 왕국의 대귀족들은 탈린 왕국이 결투를 끝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의 갈등을 끝내기만 바랐다.
***
히르헤라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
불사조 기사단.
정오 무렵.
기사단장 엘런 파레스 백작은 부단장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찾아갔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책을 읽고 있던 엘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장님. 말씀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엘런 파레스 백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일어나지 마시오. 앉으시오, 앉으라니까.”
엘리오가 엉거주춤 앉자 백작이 그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소식은 들었소. 케른 백작이 결투를 신청했다고?”
“예, 아침에 부단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통보를 하더라고요.”
“레이지 기사단 부단장이면 한스 홀트 자작인가?”
“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랬군. 나는 뭐 경이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하오. 용병왕이 실전을 많이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래 봐야 용병 일 하다 만난 고만고만한 사람들과 싸운 거니 의미 없지. 그렇지 않소?”
“그래도 소드마스터니까 방심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시! 마음가짐도 검술의 경지만큼이나 완벽하구려. 내가 경을 찾아온 이유는 사실 한 가지 청이 있어서요.”
“청이요?”
“결투가 언제 열리오?”
“사흘 후에 만나자고 들었습니다.”
“그, 혹시, 경은 불사조 기사단의 검술을 익히셨소?”
엘런 파레스 백작이 기대 어린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불사조 기사단의 기사들은 모두가 그란디스 검술을 사용한다.
엘런 파레스 백작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기사단에 온 지 한 달쯤 됐으니 그란디스 검술을 배웠으리라 생각했다.
“예, 수석기사인 기욤 샤르트 경이 가르쳐 주더군요.”
“험, 우리 그란디스 검술에 대한 경의 견해를 듣고 싶소.”
“좋은 검술입니다.”
엘리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초식에서 자유로운 그에게 나쁜 검술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용병왕과의 결투에서 그란디스 검술을 사용해 줄 수 있겠소? 단 한 번이라도 좋소.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거절해도 상관은 없소. 소드마스터와의 결투에서 익힌 지 한 달밖에 안 된 검술을…….”
“예.”
순간 엘런 파레스 백작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하겠다고 했소?”
“예.”
“용병왕과의 결투에서 그란디스 검술을 사용하겠다는 거요?”
“예.”
“정말이오?”
“그렇다니까요.”
엘리오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기사단장을 보았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두 번 세 번 묻는지 모르겠다.
“아아! 그렇게만 해 준다면 정말 감사하겠소. 용병들이 우리 불사조 기사단의 그란디스 검술을 비실용적이라고 어찌나 떠들어 대던지…….”
“왜요? 용병과 기사단이 싸우기라도 했나요?”
“각자가 속한 진영이 다르면 칼을 맞댈 때가 종종 있소. 십 년 전 도우너 백작의 호위에 예비 기사들을 다수 파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상대가 보낸 용병들에게서 백작을 보호하지 못했소.”
“아!”
“그 뒤로 용병들이 우리 불사조 기사단의 검술을 폄하하기 시작했소. 용병왕과의 결투에서 그란디스 검술을 사용해 준다면……. 그때의 굴욕을 되갚아 줄 수 있겠다 싶어서.”
“알겠습니다. 예비 기사들이 부족한 거지 그란디스 검술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십 년 전의 굴욕을 싹 씻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으리다.”
“은혜라니요. 저도 불사조 기사단의 부단장 아닙니까. 저의 명예도 달려 있으니 은혜라고 생각하지 마십쇼.”
“고맙소. 라고아 자작은 우리 불사조 기사단의 긍지이자 자랑이오. 불사조 기사단은 경이 부르면, 설사 그곳이 타메이온이라 해도, 한달음에 달려가겠소!”
“하하! 알겠습니다. 지금의 그 약속 잊지 마십쇼.”
“잊다니, 천만의 말씀이오. 맹세할 수도 있소. 불러만 주시오.”
“예, 예.”
엘리오는 어린아이 달래듯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엘런 파레스 백작은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이 나간 직후 교대하듯 파비안이 막사로 들어왔다.
“부단장님. 저 왔습니다.”
“너는 또 왜 왔냐?”
“왜라니요? 지금 후작군 진영이 부단장님의 결투 소식으로 들썩거리는데, 어떻게 제가 모른 척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왜 파티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이 들떠 있냐?”
“제가 오늘은 한 가지 인정할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뭘 인정한다고? 그런 거 안 해도 돼.”
“아닙니다. 꼭 해야 됩니다.”
파비안이 결연한 어조로 말하자 엘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밑밥을 까는지 모르겠다.
“그럼 해 봐.”
“저는 솔직히 부단장님이 검술만 뛰어나고 머리는 좀 아닌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검술이든 뭐든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는 것을요. 부단장님은 머리가 나쁘지 않습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예, 부단장님이 항상 힘으로 해결하시길래……. 머리가 못 따라가서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십니다.”
“욕이야? 칭찬이야?”
“칭찬입니다. 부단장님이 크리소페디오에서 흘린 말을 듣고 탈린 왕국이 꼬리에 불붙은 말처럼 날뛰고 있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존경으로 부족해. 나를 숭배해.”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파비안은 선을 그었다.
숭배는 ‘공경함’의 뜻도 있지만 ‘신에 대한 경배’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아유, 하여간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 하려고 그러지? 나도 너 같은 녀석 숭배 필요 없다. 커피 마실 거냐?”
“주시면 먹겠습니다.”
“네가 만들어 와라. 주전자도 커피도 다 있으니까.”
파비안이 툴툴거리며 일어섰다.
“저에게 시킬 거면서 왜 줄 것처럼 물어보십니까?”
“내 거만 만들어 오라고 할 수도 있었다. 마시기 싫으냐?”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파비안은 얼른 태도를 바꿨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변덕이 심해서 자칫 얻어먹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전자를 들고 나가 눈을 채운 뒤, 다시 돌아와 활활 타고 있는 파이어 스톤 위에 걸쳐 놓았다.
물은 금방 끓었고, 이내 커피의 고소한 향이 막사를 채웠다.
커피를 홀짝거리던 파비안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부단장님은 왜 히르헤라에 계시는 겁니까?”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아니요. 히르헤라가 연고지도 아닌데, 제국의 초대도 마다하고 이곳에 계신 이유가 궁금해서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하면 믿을 거냐?”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 나이에 그런 말을 믿겠습니까?”
“순수하지 못한 놈이야. 너는.”
“부단장님은 순수하시고요? 저보다 부단장님 욕심이 더 많잖습니까. 소대장들에게 술 한번 안 사 준 분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술을 사 줘야 순수한 거냐?”
“여러가지 예들 중에 하나를 들은 겁니다.”
“또 뭐가 있는데?”
“여자들에게 줄 듯 줄 듯 하면서 안 주시는 거요. 그것도 죕니다.”
“쿨럭! 뭘 줄 듯 했다는 거야? 미친놈아.”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린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삿대질을 했다.
자신이 기녀도 아니고 뭘 ‘줄 듯 하면서 안 줬다’는 건지 모르겠다.
파비안이 뻔뻔한 얼굴로 답했다.
“애슐리 넬슨 남작과 애나 로건 경, 줄리 그린우드 남작, 에리카 양까지 제가 아는 여자들만 네 명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줄 듯 하다가 안 줬냐고!”
“마음요.”
“내가 언제 마음을 줬다고 그런 소리를 해? 왜? 차라리 여자들이 내 애를 낳았다고 하지?”
“부단장님의 친절이 여자들에게는 호감의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잖습니까? ‘전혀 아니다’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못 본 척 외면하라는 거냐?”
“외면은 아니지만 친절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좀 더 딱딱하게 대했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인마! 나보다 네가 여자들에게 더 친절하잖아!”
“예, 그래서 저에게 속물이라고 하시잖습니까. 저는 인정합니다. 다 인정한다고요. 그러니까 부단장님도 자신이 순수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라 이겁니다.”
“와아…… 씨발. 네 말만 들으면 내가 아주 개새끼 같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시고요.”
“숭배는 못할망정 나를 아주 속물 덩어리로 만들겠다 이거냐?”
“그러니까 세계 평화 같은 소리 하지 마시고, 목적이 뭔지를 말씀해 달라 이겁니다. 부단장님도 뭔가 노리는 게 있으니까 이곳에 남아 있는 거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파비안이 엘리오를 응시했다.
자작의 작위에 영주까지 되었으니 돈과 명예를 모두 얻은 셈이다.
오늘 당장 안전한 제국으로의 유람길에 올라도 되는데 왜 굳이 위험한 히르헤라를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엘리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목적이라. 그런 게 없다고는 말 못 하지.”
“뭡니까? 그게?”
파비안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 파비안을 엘리오가 빤히 보며 물었다.
“궁금해?”
“예! 알려 주십쇼.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이 얘기 들으면 너는 나랑 다녀야 돼. 적어도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괜찮습니다. 제 목표가 슬래시 랜드의 기사단장이 되는 겁니다. 어차피 자작님을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파비안은 속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 영지를 제가 넘겨받겠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래? 남자가 말을 했으면 지켜야 하는 거 알지?”
“당연하지요. 맹세하라면 맹세하겠습니다.”
“맹세는 안 해도 돼. 누구라도 나하고 한 약속은 어길 수 없으니까.”
“예, 약속합니다. 히르헤라에서 노리는 게 뭡니까? 혹시 돌아다니시다가 금광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어? 너 그런 깜찍한 상상을 한 거야?”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니 농담이 아니다.
천재 기사 파비안은 자신이 속물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진성 속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