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95
1095회. 검은 곧 길이요, 열쇠다
파비안의 속물 근성에도 그를 보는 엘리오의 눈빛은 따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게 아니다.
지금 엘리오는 진심으로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였다.
지극히 형식적이고 절제된 귀족 사회에서 파비안은 고향의 느낌을 주는 유일한 사람인 까닭이다.
파비안은 신기할 정도로 심통을 닮았고, 그래서 엘리오는 그가 싫지 않았다.
‘때가 덜 묻은 심통이랄까.’
엘리오는 심통을 체로 거르면 파비안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너는 기사가 안 됐으면 뭐 해 먹고 살았을 것 같으냐?”
“용병요.”
“도둑은 어때?”
“제가 그 정도로 타락한 놈은 아닙니다.”
“맞아. 내가 봐도 그래.”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통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표사가 됐을까?
집안과 부모가 이렇게 중요하다.
딴생각에 빠진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파비안이 물었다.
“그래서 광산도 아니라면, 히르헤라에 계시는 목적이 뭡니까?”
“파비안. 나는 야인이 아니다.”
“설마 마나의 축복을 받지 못해서 차선책으로 영기를 수련하셨던 겁니까?”
그런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파비안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파비안을 지그시 보던 엘리오의 입에서 그의 과거가 흘러나왔다.
“……카마 데비아스(천자마)와 우샤스 운드라(금사)의 뒤틀린 욕망은 구속에서 풀려 진신(眞身)으로 돌아갔다. 내 세계의 샤스트라 파라크티(구천현녀)가 말하기를 진신으로 돌아간 그들의 뒤틀린 욕망으로 인해, 그들의 세계가 파괴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세계, 즉 네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온 사람이다.”
“…….”
넋을 잃고 듣던 파비안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자작님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겁니까? 우리 로디나 대륙의 사람이 아니라? 바다 건너 다른 세계?”
“바다 건너 다른 세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
“차원요?”
“간단히 말해 다른 우주의 사람이라는 소리다.”
“하하. 혹시 자작님이 순수하지 않다고 한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잘못했습니다. 저는 자작님이 이 정도로 충격을 받으신 줄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숭배하라면 숭배하겠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저어, 송구하지만 헛소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자작님 같습니다. 다른 우주에서 온 사람이라니요? 살다 살다 그런 소리는 정말 처음입니다. 제 고향에 있던 미친 사람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뭐, 마음대로 생각하고. 어쨌든 나는 빙벽의 균열이 카마 데비아스와 우샤스 운드라의 짓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히르헤라를 떠나지 않는 거다.”
“언제까지 히르헤라에 계실 건데요?”
“균열의 배후를 처치할 때까지.”
“흑마법사들의 배후에 그들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
“와아! 카마 데비아스와 우샤스 운드라를 죽인다고요? 미치겠네. 아무리 자작님이라도 그건 안 됩니다. 꿈도 꾸지 마세요.”
“뭐가 안 돼?”
“카마 데비아스는 ‘태양신’이고, 우샤스 운드라는 ‘꿈과 환상의 신’입니다. 신적 존재가 아니라 진짜 신이라고요. 진짜 신을 자작님이 무슨 수로 죽이시게요?”
“신이라고 불사는 아니야. 이미 다른 차원에서 한 번씩 죽였다니까. 내가 보여 준 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 그놈들이 달아날까 봐 조용히 움직이느라 그러는 거야.”
“어이쿠! 카마 데비아스와 우샤스 운드라가 달아난다고요?”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미친 사람 보듯 했다.
신들이 왜 한낱 인간을 피해 달아난단 말인가.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몰라도.
“말했잖아. 그놈들 내가 여기까지 쫓아온 걸 알면 꼭꼭 숨을걸?”
“아이고, 우리 자작님 어쩌면 좋지? 고위 신관을 모셔와 봐야 하나?”
“믿든 안 믿든 자윤데,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은 하지 마라. 아무리 너라도 대의를 위해서 그냥 둘 수 없으니까.”
“말 안 합니다. 말하면 다들 자작님이 미친 줄 알 텐데, 제가 그런 말을 왜 하고 다닙니까?”
“여하튼 그게 내가 히르헤라를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다. 비밀을 알고 나니 이제 좀 속이 시원하냐?”
엘리오의 말에 파비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아! 자작님, 저는 정말 미쳐 버리겠습니다. 잘 나가시다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제 뒤통수를 치시면 안 됩니다. 자작님이 이러시면 저는 어쩌라고요?”
“어쩌긴 나를 따라다니기로 했으니 잘 따라다녀야지.”
“…….”
파비안이 암울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왜?”
“지금은 또 멀쩡해 보이셔서요. 혹시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상황이나, 단어, 뭐 그런 게 있습니까?”
“안 미쳤다니까. 또 한번 미친 사람 취급하면 마나를 폐쇄하고 쫓아낸다?”
“헉! 쫓아내면 쫓아내지 마나는 왜 폐쇄한다는 겁니까?”
“몰라서 물어? 그냥 쫓아내면 너만 좋은 일 해 주는 거잖아. 내가 남만 잘되는 꼴은 못 보거든.”
“우와! 알겠습니다. 그냥 이번 생은 망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망하긴 뭘 망해? 소드 비기너까지 되고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왈로우 플라잉도 배웠잖아?”
“그러면 뭐합니까? 출세는 둘째치고 평생 자작님 곁을 떠나지 못할 판인데.”
“너 지금 나한테 악담하는 거냐? 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을 돌려서 한 거 맞지?”
엘리오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뒤늦게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챈 파비안이 얼른 말을 바꿨다.
“아닙니다. 자작님의 검술이라면 곧 고향으로 돌아가실 겁니다. 카마 데비아스나 우샤스 운드라가 별겁니까? 자작님이야말로 숭배를 받기에 마땅한 존재십니다.”
파비안의 아부에 엘리오의 눈빛이 풀어졌다.
“파비안.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 봐라.”
“예, 믿겠습니다. 숭배도 하는데 믿는 게 대숩니까.”
급격한 태도 변화에 엘리오가 파비안을 빤히 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파비안.”
“예?”
“너 의외로 괜찮은 놈이었구나.”
“의, 의외로요?”
파비안은 그 와중에도 ‘의외’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건 지금까지 좋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너 속물이라면서. 속물치고는 괜찮은 놈이라고. 왜? 네가 한 말을 부정할 셈이냐?”
“아닙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파비안은 모든 걸 내려놓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오는 파비안이 더 이상 헛소리를 하지 않자 계속해서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주지. 귓구멍 열고 잘 듣도록.”
“…….”
파비안의 상체가 다시 앞으로 기울어졌지만 눈빛은 시들했다.
“1월 말경, 히르헤라에 메테오 스웜이 떨어졌다. 히르헤라 주둔지에 있던 에스카토스의 병사와 기사 천백여 명이 그날 사망했지. 그날의 생존자는 두 명인데 나와 코드란테스 백작이다.”
“예에?”
뜻밖의 말에 파비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히르헤라에 메테오 스웜이라니?
살아남은 두 명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코드란테스 백작이면, 소드마스터만 겨우 살아났다는 소리였다.
“하필 내가 히르헤라에 오던 날, 메테오 스웜이 떨어졌다. 눈을 떠 보니 베르나르도 후작령인 엔아르케더군. 거기서 처음 에스카토스 공작과 메이지 칼로스, 베르나르도 후작을 만났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메이지 칼로스가 통역 반지를 선물로 주더군. 하하.”
엘리오는 웃었지만 파비안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등장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대귀족들은 히르헤라의 참사를 비밀로 덮었다. 빙벽을 수리해야 하는데 지원자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히르헤라의 거주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지. 네가 본 구덩이는 메테오 스웜의 흔적이다.”
“그걸 알면서도 히르헤라에 남아 있는 겁니까?”
“균열의 배후에 카마 데비아스와 우샤스 운드라가 있으니까. 그들을 찾아 죽이려면 남아 있어야지.”
“자작님.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상대는 신이라고요. 신을 어떻게 죽입니까?”
“말했잖아. 다른 차원에서 이미 신들을 죽였다고. 내 별명 중에 하나가 신살자야.”
“아니…… 그게…….”
파비안은 갑자기 머릿속이 엉켜 입만 벙끗거렸다.
“히르헤라의 균열은 그들의 짓이 틀림없다. 구천현녀,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도 그래서고.”
“아, 미치겠네.”
파비안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분명히 헛소리인데 왜 자꾸 진짜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이곳에서 놈들의 흔적을 끝내 발견하지 못하면, 제도로 갈 거다.”
“제도요?”
다 죽어 가던 파비안의 눈이 살아났다.
히르헤라에서 썩을 줄 알았는데 문화와 향락의 도시로 간다니 좋아하는 것이다.
“카마 데비아스가 천공성에 있다고 들었다. 천공성에 대해서는 제국 마탑이 빠삭하다고 하더군. 마탑을 찾아가 천공성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생각이다.”
“저어, 마탑은…… 마법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데요?”
“파비안, 검이 뭐라고 생각하나?”
“검이 검이지 뭡니까?”
“검은 곧 길이요, 열쇠다. 검으로 가지 못할 곳이 없고, 열지 못할 문이 없다. 기사라는 사람이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나?”
“그건 혹시 무력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입니까?”
“부탁해서 안 들어주면 강제로 들어가야지. 그럼 거기서 ‘예’ 하고 돌아서냐?”
“대륙 역사상 마탑의 문을 강제로 연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는 내가 없었으니까.”
“아, 예에…….”
파비안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신도 죽이겠다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마탑에서 천공성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 후에, 카마 데비아스를 찾아서 죽일 거다.”
“간단하네요?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럴 리가. 그다음으로 우리가 갈 곳은 남부의 대수림이다. 정확히는 대수림에 있는 어비스로 갈 것이다.”
“북부에서 중부를 거쳐…… 남부의 대수림요? 고생문이 활짝 열렸네요?”
“어쩔 수 없다. 우샤스 운드라가 어비스를 관장하는 신이라니, 어비스를 찾아가야지.”
“천공성과 어비스는 이 세계의 최대 신비인데……. 자작님이 이 세계의 신비를 모두 깨부수겠다는 말씀이시죠?”
“그래야 이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니까. 내가 ‘왕들의 하늘’에서 그것들과 얽히지만 않았어도……. 하아!”
엘리오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랬다면 지금쯤 가족들과 오손도손 재미있게 살고 있었을 터였다.
“자작님의 말씀만 들어도……. 막 가슴이…….”
“웅장해지냐?”
“예, 숨을 쉬는 것도 어렵게……. 웅장합니다.”
“그런 걸 내 고향에서는 거대한 정신[浩然之氣]이라고 한다.”
파비안이 얼굴을 손부채로 부치며 말했다.
“저는 정신이 작아서 그런지 말씀만 들어도……. 막 식은땀이 납니다.”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하지만 거대한 정신은 노력하면 점점 커지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솔직히 그런 노력은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그동안 제가 슬래시 랜드를 관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뭔 소리야?”
“영주님이 중부, 남부로 돌아다니실 동안 누구 한 사람 영지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저에게 맡겨 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안 돼. 너는 이미 나와 함께하기로 약속을 했잖아. 남자가 약속을 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지.”
“아, 예……. 그래야죠. 그냥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말씀드린 겁니다.”
“어때? 내 계획을 들으니 흐릿하던 미래가 선명해졌지?”
“저는 물고긴가 봅니다.”
“머리가 나쁘다고?”
“아니요. 물고기가 물이 너무 맑으면 못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선명한 미래를 보니까 숨이 좀 막혀서요.”
“그래? 너무 뻔해서 인생이 지루하다는 소리지? 그럼 앞으로 돌발 행사를 좀 자주 열어 줄게.”
“지루가 아니라……. 말만 들어도 고단해서 벌써 지칩니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너에게 내가 가진 모든 걸 넘겨준다고 해도?”
“평생 자작님만 숭배하겠습니다.”
시들시들하던 파비안의 눈에서 광기에 가까운 빛이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