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07
1107회. 드디어 제도(帝都)로 가는 겁니까?
히르헤라 연합군 주둔지.
엘리오가 나타나자 소드마스터들이 그를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에스카토스 공작이 급히 물었다.
“엘리오 경, 어찌 된 일이오?”
“마족 군주들이 저와 싸우다가 달아났습니다. 군세를 더 키우기 전까지 당분간 침공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달아나다가 셋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만 뒷말은 생략했다. 그렇게까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다.
“오오! 그런!”
“과연!”
“라고아 경이 북부를 구하셨소!”
“군주들이 달아나다니! 세상에!”
마족 챔피언들과의 싸움으로 기가 꺾여 있던 소드마스터들은 한목소리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칭송했다.
챔피언과 싸워 본 소드마스터들에게 마족 군주는 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더 이상 엘리오 라고아에게 질투나 경쟁심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북부 팔 왕국의 소드마스터들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제국의 전설인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과 비슷한 반열의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팔 왕국과 제국군 1개 사단은 균열까지 전진한 뒤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
에스카토스 왕국군 지휘 통제 막사.
장방형 탁자에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에스카토스 왕국군 원수 에스카토스 공작과 대장군 베르나르도 후작, 그리고 불사조 기사단 부단장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다.
에스카토스 공작과 베르나르도 후작은 눈치만 살필 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사람이 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인 까닭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에 엘리오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침공했던 몰록은 모쿠바스의 군주였습니다. 그가 제 손에 죽자 다른 마족 군주들이 복수를 빙자해 몰려온 거고요. 아시다시피 균열이 있는 한 마족의 침공은 반복될 겁니다.”
에스카토스 공작과 베르나르도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이미 북부의 모든 왕국이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이번에 군주들과 싸울 때 제가 오해를 좀 받았습니다. 제 영기가 너무 많다 보니 저를 마족의 일원으로 오해를 하더군요.”
“마족요?”
베르나르도 후작이 황당한 눈으로 엘리로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그의 영기가 측량 못 할 정도로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오해라니?
“빙벽이 생기기 전 아득한 고대에…… 인간과 흡사한 외형을 가진 마족인 부라퀴족이 대륙에서 살았다고 하더군요. 훗날 부라퀴족은 인간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야인들과 함께 살았답니다. 제가 야인 부족이라니까 부라퀴족의 후손으로 생각하더군요. 인간의 몸으로 그만한 영기를 수련할 수 없다면서.”
“…….”
순간 에스카토스 공작과 베르나르도 후작의 눈에 긴장이 어렸다.
정말 고대에 부라퀴족이 내려와 야인과 함께 살았다면 그게 사실일 수도 있어서다.
그들의 생각을 짐작한 엘리오가 피식 웃었다.
“저는 부라퀴족이 아닙니다. 누구의 초대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주둔지 도시에 마나 프트라스의 신관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신관이라면 제가 인간인지 마족인지 구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신관은……. 다른 왕국 대귀족들의 의심을 불식시키고자 내가 오시라 했소.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내일 아침에 함께 만나는 것으로 하십시다.”
그렇지 않아도 신관과 엘리오 자작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계획하고 있던 에스카토스 공작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슬쩍 공작의 편을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실 우리는 엘리오 경이 마족이나 흑마법과 관계가 없다고 믿지만……. 엘리오 경을 잘 모르는 대귀족들은 그렇지 못하지요. 신관의 보증이라면 그들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겁니다.”
엘리오는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야인 부족 출신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영기 수련자라면, 흑마법이나 마족이라는 의심을 사도 할 말이 없었다.
마족 군주들이 부라퀴족의 후손이라고 믿을 정도면 알 만하지 않은가.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군요. 마족 군주들은 저를 부라퀴족으로 믿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믿음을 이용해 모쿠바스의 군주가 될 생각입니다. 그런 뒤 다른 마족이 모쿠바스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겁니다.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당장은 히르헤라를 침공하는 마족이 없을 겁니다. 그동안 성벽을 쌓든, 빙벽을 보수하든 하자는 게 저의 계획입니다.”
에스카토스 공작과 베르나르도 후작이 놀란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히르헤라를 지키기 위해 인간이 마족 군주가 된다니!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미친 소리라고 욕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말을 들으니 괜찮은 생각 같다?
솔직히 인간 입장에서는 밑져야 본전이다.
통하면 시간을 벌겠지만, 실패한다 해도 더 나빠질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말씀인데, 내일 신관과 만나고 나면 저와 파비안 남작을 제대시켜 주십시오.”
베르나르도 후작이 급히 되물었다.
“히르헤라를 떠날 생각이오?”
“제가 모쿠바스의 군주가 되면 최소한 몇 년간은 조용할 겁니다.”
그제야 베르나르도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모쿠바스의 군주가 된다면 히르헤라가 안전해질 테니 제대를 시켜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소. 경이 모쿠바스의 군주가 되기를 기원하리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 모쿠바스의 군주가 되지 못한다면 돌아와 주시오.”
“그러겠습니다.”
이야기가 얼추 정리되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슬쩍 농담을 했다.
“엘리오 경, 모쿠바스의 군주가 되더라도 종종 왕궁으로 찾아와 주시오. 그때는 영주가 아니라 왕에 대한 예우를 해 드리겠소. 하하하.”
피식 웃던 엘리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흑마법사에게서 더 알아낸 건 없습니까?”
그러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공작을 대신해 답했다.
“딜런 던포드가 악신의 결계(테르미누스)만 사용한 게 아니었소. 빙벽이 계속 벌어졌던 이유가 차라트라는 뼈 때문이었소.”
“차라트요?”
“상태를 악화시키는 저주가 실린 뼛조각을 차라트라 한다고 하더이다. 흑마법사들이 수백 개나 되는 차라트를 빙벽 안팎에 뿌렸다고 자백했소. 차라트를 제거하면 빙벽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오.”
“그것참 다행이네요. 성벽을 쌓는 것보다 더 실현 가망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소. 차라트를 회수할 동안 만이라도 마족의 침공이 없으면 하는 바람이오.”
“차라트를 회수하면 빙벽이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확실한가요?”
“거의 그렇게 될 것으로 여기고 있소.”
“그렇군요.”
엘리오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히르헤라의 균열을 두고 떠나는게 찜찜했는데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잠시 후 지휘 통제 막사에서 나온 엘리오는 루퍼스 중대로 파비안을 찾아갔다.
막 잠자리에 들었던 파비안이 허둥지둥 일어나 엘리오를 맞이했다.
“어이쿠! 자작님!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내일 아침에 부대원들에게 작별 인사나 해 둬라.”
“예? 갑자기요?”
“어, 상황이 그렇게 됐다. 당분간 히르헤라에 올 일은 없을 거다.”
“드디어 제도(帝都)로 가는 겁니까?”
“비슷해.”
순간 파비안이 멈칫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제도가 아니면 어디로 가시는 데요?”
“모쿠바스.”
“예에? 거기 타메이온에 있는 몰록의 영지 아닙니까?”
깜짝 놀란 파비안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뭘 그렇게 놀라? 흥분하지 말고 들어 봐.”
엘리오는 파비안에게 마족 군주들과 싸우면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모쿠바스에 가기로 했어. 일단 모쿠바스의 마족들에게 자기들 군주가 누군지 정도는 알게 해 줘야 하잖아.”
“혼자 다녀오십쇼. 제도로 가시는 길에 저를 데리고 가도 되지 않습니까!”
“나 혼자 마족들 소굴에 가라고? 그건 안 되지. 나도 잠자려면 믿을 만한 사람 하나쯤은 옆에 둬야 되잖아. 그러기에 네가 딱이야.”
“그냥 알람 마법을 쓰십쇼. 자작님은 마법도 쓸 줄 아시지 않습니까?”
“나 마법 쓸 줄 몰라. 내가 아는 건 몇 가지 주문밖에 없어. 여하튼 후작님에게 허락받았으니까 그런 줄 알아.”
“허락이라뇨?”
“너랑 나랑 내일 제대할 거야. 너 데리고 모쿠바스로 간다고 말해 뒀거든.”
“아니! 왜 그런걸 자작님 마음대로 결정하십니까! 제 의견도 물어보셔야죠!”
“그래서? 안 갈 거야?”
“안 갑니다! 못 가요! 자작님과 달리 저는 소드 비기너에 불과합니다. 마족의 한 입 거리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제 수준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누가 너더러 마족이랑 싸우랬냐? 그냥 나 잠잘 때 경계만 서면 된다고.”
“경계 서다가 훅 간다고요.”
“딱 한 번만 막아 인마. 내 귀가 얼마나 밝은지 알잖아. 게다가 나한테는 육감이 있어서 어지간한 위험은 미리 알 수 있어. 너무 걱정 마.”
“위험을 미리 안다고요? 그럼 안 자면 되겠네요. 혼자 가십쇼.”
“너는 어차피 내일 제대야. 방랑 기사 될 거야?”
“하아!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제가 제국은 물론 남부도 함께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모쿠바스에 가자고요? 타메이온에서 저 같은 기사는 하루살이만도 못합니다. 제가 마족에게 잡아먹혀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내가 있는데 어느 마족이 널 잡아먹어?”
“배고픈 마족이 눈 돌아가면 그럴 수도 있죠.”
“걱정하지 마. 솔직히 너 눈 돌아갈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아.”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끝까지 데리고 갈 뜻을 굽히지 않자 파비안은 고개를 툭 떨구었다.
“슬래시 랜드의 영주가 될 사람이 뭘 그렇게 실망하나?”
영주 소리에 파비안의 귀가 쫑긋 섰다.
“북부에서 영주로 살려면 인접한 모쿠바스에 대해 알아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빙벽이 수리되면 다행이지만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먼 훗날 북부 왕국들이 히르헤라에 모여서 너를 찾는다고 생각해 봐.”
그제야 파비안이 슬그머니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슬래시 랜드의 위치를 생각하면 모쿠바스를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좋든 싫든 이웃해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것만 약속해 주십쇼.”
“당연하지. 지켜 준다니까.”
“사지 멀쩡하게요.”
“어?”
엘리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보자 파비안이 또박또박 말했다.
“사지도 멀쩡해야 합니다. 약속하십쇼.”
“알았어. 사지 멀쩡하게. 됐냐?”
“알겠습니다. 가 드리지요.”
“야아! 파비안 남작, 네가 내 상전 같다?”
“말 돌리지 마십쇼. 저는 지금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만, 자작님 잠이라도 편히 주무시라고 가는 겁니다.”
“슬래시 랜드 때문은 아니고?”
“그건 덤이고요.”
“아이고 그러세요? 그렇다 칠게. 그리고 세라 양은 그냥 히르헤라에 남아 있으라고 해.”
히르헤라가 불안정하면 고향으로 가라고 하겠지만 이후로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괜히 ‘지인을 안전한 곳에 빼돌렸다’는 소리를 듣느니 그냥 두는 게 나았다.
“예, 자작님이 모쿠바스의 군주가 되면 당분간은 안전할 테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니야. 잘하면 빙벽이 복구될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
엘리오는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들은 차라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파비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히르헤라뿐 아니라 북부 전체가 안전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