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10
1110회. 배운 게 아니라 흡수한 거예요
샤모스가 블러디 카리브를 잡으러 간 사이 엘리오와 파비안은 페이드 호수 가까이 다가갔다.
따뜻한 공기만으로도 몸이 이완되는 느낌이다.
엘리오가 호수에 손을 쑥 집어넣고 휘휘 휘저으며 말했다.
“뜨겁지는 않네. 마셔도 되나 몰라.”
“마물과 마수가 목욕한 물을 마시고 싶습니까?”
“목욕은 아니지. 나중에 샤모스 오거든 물어봐야겠다. 마셔도 되는 물인지. 왠지 마시면 속병도 나을 것 같은 느낌 안 드냐?”
“안 듭니다.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과 마셔도 되는 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나저나 목욕하기 딱 좋은 온도인데? 나도 몸 좀 담가 봐야겠다.”
말과 함께 엘리오가 온천으로 들어갔다.
“아아! 따뜻하다. 몸이 풀어지는 느낌인데? 파비안 너도 들어와. 너도 목욕 안 한 지 꽤 되지 않았냐?”
“며칠 안 됐습니다. 히르헤라의 여관에서 씼었습니다. 귀족들이 다 자작님 같은 줄 아십니까?”
“아, 그러셔? 설마 목욕하려고 여관에 간 건 아닐 테고.”
“목욕하러 갔습니다. 진중에 목욕 시설이 없어서 목욕하러 여관 가는 귀족들 많습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십쇼.”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네가 세라 양을 두고 딴짓하러 다녔나 싶어서.”
“그 말 나올 줄 알았습니다. 세라 양과 같이 다녔습니다.”
“어우! 야해. 결혼도 안 했는데 여관에 같이 다녔다는 소리를 막 하네?”
“목욕하러 갔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엘리오와 파비안이 하나 마나 한 소리로 시간을 보낼 때 샤모스가 블러디 카리브 세 마리를 몰고 왔다.
마족 군주의 앞이라 그런지 블러디 카리브는 순한 양처럼 굴었다.
블러디 카리브에 올라탄 샤모스가 마치 가지치듯 뒤로 뻗은 두 가닥 뿔을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올라타서 여기를 꽉 잡으세요. 원하는 방향으로 힘을 주면 그리로 갈 거예요. 멈출 때는 뿔을 꺾듯 위로 당기면 되고요.”
말과 함께 샤모스는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마물의 뿔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머리가 홱홱 돌아갔지만 ―멀리서 눈만 마주쳐도 덤빈다는 상위 마물― 블러디 카리브는 발작하지 않았다.
샤모스의 설명이 끝나자 엘리오는 온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를 보며 파비안이 잔소리를 하려는 순간, 엘리오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한순간 몸과 옷을 말렸다.
“어? 그건 마법입니까?”
그러자 샤모스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영기를 발출하신 것이다. 너는 인간족 챔피언이라면서 그런 것도 못 알아보느냐?”
“아…….”
파비안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마족 군주의 눈치가 보여 입을 꾹 다물었다.
‘젠장. 챔피언은 무슨……. 나중에 자작님께 따로 물어봐야겠다.’
이윽고 엘리오와 파비안도 블러디 카리브 위로 올라탔다.
블러디 카리브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두 사람이 앙증맞아 보일 정도다.
샤모스는 웃음을 꾹 참고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샤모스가 달리자 엘리오와 파비안을 태운 블러디 카리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부지런히 그 뒤를 따라붙었다.
두두두두―!
블러디 카리브는 바람처럼 달렸다.
마물의 엄청난 속도에 파비안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뿔을 잡고 버텼다.
손아귀에만 힘을 준 게 아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양쪽 허벅지와 종아리를 이용해 필사적으로 블러디 카리브의 몸통에 달라붙었다.
상위 마물답게 블러디 카리브는 해가 저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노을이 지는가 싶더니 이내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기진맥진한 파비안이 쉬어 가자고 호소하려는 순간, 샤모스가 멈춰 섰다.
이윽고 샤모스와 엘리오가 가볍게 지면에 내려섰다.
그 둘과 다르게 팔순 노인처럼 사지를 덜덜 떨며 힘겹게 내려온 파비안은 차가운 설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와아! 앉아만 있었는데 왜 내가 이렇게 힘들지?”
물론 그냥 하는 소리다.
블러디 카리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니까.
축 늘어진 파비안에게 샤모스가 다가갔다.
“인간 챔피언. 군주인 내가 너를 보호하는 것과 별도로, 챔피언인 너는 군주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저녁을 준비해라.”
“…….”
샤모스의 지시에 파비안이 당황한 얼굴로 엘리오를 보았지만 엘리오는 오히려 한술 더 떴다.
“파비안, 저녁 뭐냐?”
“갑자기 저녁 뭐냐니요? 그런 말씀은 없었지 않습니까?”
“그건 상식이지. 균열 감시에 투입돼도 사흘치 식량을 준비하는데. 타메이온을 쫄쫄 굶으면서 다니려고 했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먹거리를 같이 찾아 먹는 것’과 ‘일방적으로 혼자 준비’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서 저녁 뭐냐고.”
“뭐긴요. 에너지 볼이나 먹어야죠. 음식점도 없고, 근처에 사냥할 짐승도 없는데, 뭐 해 먹을 게 있다고요!”
파비안이 항의하듯 말하자 엘리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해. 에너지 볼이나 먹자. 내가 이럴 줄 알고 넉넉히 챙겨 왔지. 너도 많이 가져왔냐?”
엘리오가 공간 창고 마하담에서 에너지 볼을 꺼내 한입 베어 먹었다.
파비안도 금방 화를 풀고 품 안에서 에너지 볼을 꺼냈다.
“저도 오늘 아침에 나온 거 쓸어 왔습니다.”
에너지 볼을 먹던 엘리오가 샤모스를 올려다보았다.
“먹을 거 있으면 꺼내고, 없으면 하나 줄까? 입맛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뻘쭘한 얼굴로 서 있던 샤모스가 엘리오에게 다가갔다.
“먹어 볼게요.”
그녀는 엘리오 라고아 군주와 친해지기 위해서 ―가축과도 같은 인간의 음식을― 먹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밤톨만 한 에너지 볼은 3미터 키의 샤모스에게 너무도 작았다.
샤모스가 에너지 볼을 입에 넣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지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마족인 그녀에게 인간의 음식은 가축 사료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저는 따로 해결하고 올게요.”
샤모스는 더 어두워지기 전에 마수라도 잡으려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샤모스가 떠나자 파비안은 가지고 있던 파이어 스톤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돌 조각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자작님, 파이어 스톤도 좀 챙기셨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언제 준비 없이 움직이는 거 봤어?”
그 말에 파비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위들의 막사에서 함께 생활할 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과할 정도로 챙기던 게 떠올라서다.
남아서 버리던 에너지 볼이 품귀현상을 일으킨 것도 그가 식사 때마다 싹싹 긁어모았기 때문이다.
“자작님의 그 아공간 창고 말입니다. 거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다죠?”
“그래? 어쩐지 에너지 볼이 안 썩더라니.”
“그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쓸어 모은 겁니까?”
“뭘 쓸어 모아? 아무도 안 가져가는 거 버리기 아까워서 챙긴 건데.”
“처음에는 남아돌았는데, 자작님이 챙기면서부터 부족해서 난리 났잖습니까.”
“과장하지 말자. 그런 걸 딱 맞아떨어졌다고 하는 거다.”
“다른 중대가 에너지 볼을 구걸하러 온 적도 있는데요?”
“그야 우리 중대원들까지 에너지 볼을 챙겨서 그랬던 거고. 그걸 내가 싹쓸이해 간 것처럼 말하면 되나.”
“중대원들이 다 자작님 보고 따라 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너는 앞으로 에너지 볼이나 파이어 스톤 필요 없다 이거지?”
“아닙니다. 앞일을 내다보시는 자작님의 선견자적인 안목에 감탄한 겁니다. 저는 자작님의 아공간 창고만 믿겠습니다. 파이어 스톤도 넉넉히 챙기신 거 맞죠?”
“제국의 7사단에서 왕창 얻어 왔다. 제국은 물자가 남아돌더만.”
“대륙의 실질적인 주인이니까요.”
“가지고 온 파이어 스톤 다 떨어지면 말해라.”
“그런데 나중에는 파이어 스톤이 안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
“빙벽에서 멀어질수록 추위가 좀 가시는 것 같아서요. 주위를 봐도 얼음숲의 나무들과 좀 다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엘리오가 가까이 있는 나무를 찬찬히 살폈다.
과연! 파비안의 말처럼 얼어붙었다기보다 겨울을 나는 느낌이다.
“하기야. 엔아르케도 춥지는 않았으니까. 타메이온도 올라갈 수록 기온이 올라가려나?”
“타메이온이 로디나 대륙보다 넓다니까 그럴 겁니다.”
두 사람이 타메이온의 기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샤모스가 돌아왔다.
엘리오가 샤모스에게 물었다.
“코디악의 기온은 어때? 빙벽 부근처럼 추워?”
“아뇨. 코디악은 사계절로 치면 일 년 내내 봄 날씨예요. 그래서 몰록은 좀처럼 코디악을 떠나지 않았어요.”
“아아! 그럼 코디악에서는 파이어 스톤을 쓸 일이 없겠네?”
“내일까지만 춥고, 그 뒤로는 견딜 만할 거예요. 그런데 군주님은 추위를 타지 않으실 텐데 왜 그걸 물으세요?”
“보다시피 내 챔피언이 좀 허약해서. 파이어 스톤이 없으면 얼어 죽을 거야.”
“인간의 챔피언은 모두 그렇게 약한가요?”
“인간은 챔피언을 힘이 아니라 정(情)으로 뽑아서 그래.”
“왜죠? 그럼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없을 텐데요.”
“한 사람만 정으로 뽑으면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자기 챔피언을 정으로 뽑아서 공평해.”
이편저편 할 거 없이 죄다 비실비실하니까.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죠?”
샤모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자격자가 군주가 되어 봐야 그 집단이 얼마나 간다고?
“아무 의미 없어. 그냥 자기들 꼴리는 대로 살다 가는 거야.”
“역시 가축답네요.”
“그런데 너는 왜 가축의 말을 배웠어? 챔피언들도 대륙 공용어를 쓸 줄 알던데.”
“배운 게 아니라 흡수한 거예요.”
“흡수?”
“인간족 흑마법사들이 어쩌다 한 번씩 마족의 소환에 성공할 때가 있거든요.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데, 그때 자연히 딸려 온 거예요.”
“흑마법사의 영혼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대륙 공용어를 할 줄 알게 됐다고?”
“네. 흑마법사들의 최고 소원이 마족을 소환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들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고, 그 대신 영혼을 취하는 거니까. 마족이 손해 볼 일은 없죠.”
“어떤 소원인데 영혼까지 바쳐?”
“대부분은 복수예요. 고위 귀족들에게 당한 걸 되갚아 달라는 식이죠. 어쩌다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인간도 있지만…….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죠.”
“마법은 안 가르쳐 줘?”
“소환술에 거짓은 없어요. 가르쳐 주지만 대가로 흑마법사가 죽는답니다. 한순간 지적 호기심이야 충족되겠지만, 그뿐이죠. 흑마법사의 육체를 마족이 가지고 놀다가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끝나요.”
파비안이 보충 설명을 했다.
“흑마법사들이 난동을 부리면 영지가 발칵 뒤집어집니다.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그가 트레이더든 아니든 발견 즉시 죽이는 거고요. 흑마법의 끝은 소환이거든요.”
엘리오가 기막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흑마법의 끝이 어떻다는 걸 알면서 왜 익히지?”
“방금 들었잖습니까. 복수나, 마법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마법사들의 호기심은 유명합니다. 그걸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엘리오가 샤모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위 마족들은 대륙 공용어를 다 할 줄 아는 거야?”
“전부 다는 아니고요. 지금은 흑마법사들의 활동이 뜸하지만, 천 년쯤 전 흑마법이 융성하던 때가 있어요.”
파비안이 알은체를 했다.
“인간은 그때를 암흑기라고 합니다.”
“그때 꽤 많은 마족들이 소환을 경험했어요. 그들이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몰라요.”
“마족들끼리 교류가 많지 않은가 봐?”
“마족은 자기 영지를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그렇군.”
엘리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인간의 영혼을 빼앗은 마족들하고만 대화가 통한다니 기분이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