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16
1116회. 이제 슬슬 사람 얼굴로 돌아오시죠?
그날 밤.
죽은 듯 침상에 누워 있던 엘리오가 돌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왔다.
부라퀴족 쏘우의 딸 라이였다.
“뭐야?”
엘리오의 말에 라이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잠자리 시중을 들러 왔어요.”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
“…….”
라이는 새 군주의 말에 따르지 않고 머뭇거렸다.
꼭 멘티로어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새 군주를 모시고 싶어서다.
모쿠바스의 부라퀴족은 부족원이 고작 사십 명이라 짝짓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상대는 모쿠바스의 새로운 군주.
아직 짝이 없던 라이에게 지금과 같은 기회는 평생에 다시없을 기회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잠자리만 같이하게 해 주세요. 그 이상은 안 바랄게요.”
상상을 초월한 도발적인 발언 때문이었을까?
성주의 넓은 침실 안에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가만히 라이를 보던 엘리오의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아!’
이제야 이름이 떠올랐다.
저 부라퀴족 여자는 보면 볼수록 칠현금을 연주하던 상엽과 닮았다.
어쩌면 저렇게 무작정 들이대는 것까지도 비슷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라이의 귓가로 엘리오 라고아 군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개나 고양이라면 옆에 끼고 잘 수 있어. 하지만 부라퀴족이라서 거절한다.”
“예?”
뜻밖의 대답에 놀란 라이가 눈을 떴다.
부라퀴족이라서 동침을 거절한다니?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엘리오 라고아 군주의 설명이 이어졌다.
“너는 상대가 남자라면 아무 부라퀴족이라도 잠자리를 할 수 있나?”
“그, 그건 아니에요.”
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상대라면 아직 부족 내에도 몇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이 차이가 심하게 나거나, 생김새가 고약해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잠자리에 들여야 하지? 더 이상 나를 모욕하지 말고 돌아가라.”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이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침실을 빠져나갔다.
부라퀴족 여자 마족이 나가자 엘리오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늘따라 강호에 두고 온 처와 딸이 더 보고 싶었다.
***
다음 날.
엘리오는 아나킨족들의 호위 속에 코디악을 순시(巡視)했다.
말이 순시지 엘리오는 가는 곳마다 대놓고 사고를 쳤다.
미처 그를 알아보지 못한 상위 마족이 눈만 부라려도 바로 응징에 들어갔다.
수십 명의 마족이 죽거나 다쳤고, 무너진 건물도 다섯 채나 됐다.
엘리오 라고아 군주는 그야말로 광풍처럼 코디악을 쓸고 다녔다.
살기등등한 그의 눈 때문에 ‘붉은 눈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를 두려워한 마족들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눈만 마주쳐도 눈빛이 불손하다고 패니 그냥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코디악의 마족들은 엘리오 라고아 군주의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쳤다.
‘몰록의 성’ 내성 중앙 홀.
정오 무렵, 엘리오는 샤모스 군주와 부라퀴족을 불러모았다.
“여러분, 나는 전에 말한 대로 오늘 인간 챔피언과 함께 코디악을 떠날 겁니다. 샤모스 군주?”
“네.”
“내가 없는 동안 모쿠바스를 헤일록 관리하듯 해 줘. 돌아오면 포상해 줄게.”
“그럴게요.”
이윽고 엘리오가 부라퀴족 족장 판에게 고개를 돌렸다.
“판.”
“예, 군주님.”
그동안 엘리오는 부라퀴족의 군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기에 스스럼없이 말을 놓았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바로 샤모스 군주에게 연락해. 어지간한 건 샤모스 군주가 해결해 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이십니까?”
샤모스와 부라퀴족의 시선이 일제히 엘리오 라고아 군주의 입을 향했다.
“일 년? 혹은 그 이상 걸릴 수도 있고. 타메이온이 좀 넓어야지.”
그러자 샤모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둘러보는 길에 ‘마왕의 성’에서 다크스톤도 꼭 보고 오세요.”
“봐서.”
엘리오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타메이온은 핑계고 실은 로디나 대륙으로 갈 계획이기 때문이다.
“샤모스 군주, 당신도 그동안 안내하느라 고생 많았어. 이제 그만 헤일록으로 돌아가도 돼.”
“고생은요. 오히려 군주님을 더 잘 알게 돼서 좋았어요.”
샤모스가 고개를 숙였다.
‘더 잘 알게 돼서 좋았다’는 건 진심이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세 명의 군주들을 죽인 그가 부라퀴족이라는 확신을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럼, 또 보자고.”
엘리오는 샤모스와 부라퀴족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파비안과 함께 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처음 그와 부라퀴족들이 만난 자리에 블러디 카리브 두 마리가 서 있었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블러디 카리브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샤모스가 판에게 말했다.
“판이라고 했느냐?”
“예.”
“챔피언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마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래, 시시한 일로 연락하면 네가 아무리 군주님과 같은 종족이라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
말을 마친 샤모스는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이내 부라퀴족 시선에서 사라졌다.
샤모스마저 떠나자 부라퀴족들은 하나 둘 내성으로 들어갔다.
***
‘몰록의 성’을 떠난 지 닷새 후.
해거름 무렵, 엘리오와 파비안은 멀리 빙벽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가까워 보이지만 아직 몇 시간은 더 가야 하는 거리다.
그래도 엘리오와 파비안은 블러디 카리브 두 마리를 풀어 주었다.
두 마리 마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메이온 북쪽으로 달아났다.
엘리오가 멀어져 가는 마물들을 보며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와아! 왕복 열흘 넘게 같이 지냈는데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네?”
“그럼 길이라도 들 줄 알았습니까?”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길은 안 들어도 정(情)은 들 수 있잖아.”
“마물에게 정이라뇨?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십쇼. 게다가 자작님 얼굴 보면 들었던 정도 떨어집니다. 빙벽이 가까우니 이제 슬슬 사람 얼굴로 돌아오시죠?”
“사람 얼굴로 돌아와? 그럼 지금은 사람 얼굴이 아니라는 거야?”
“블러디 카리브가 달아나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그 정도냐?”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던 엘리오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파비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코디악에서 봤던 이즈모라는 마족 생각나십니까?”
“어, 도마뱀처럼 생겼잖아.”
“그 이즈모의 눈도 자작님에 비하면 소눈입니다.”
“…….”
“지금 자작님 분위기 장난 아닙니다. 저도 처음부터 모시지 않았으면 진즉에 달아났을 겁니다. 그 얼굴로는 로디나 대륙 못 돌아다닙니다.”
“알았어, 금방 없애 줄게. 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말했잖아. 타메이온에 돌아다니는 동안 만이라고.”
“예, 예, 그동안 자작님 얼굴 덕 본 건 사실인데요. 이제 슬슬 옛날의 그 천진난만한 얼굴로 돌아오십쇼. 진짜 옆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거참, 남자가 얼굴 더럽게 따지네. 원래 사람은 얼굴 보는 거 아니야. 얼굴은 살가죽에 불과하다고. 내면을 봐야지, 내면을.”
툴툴거리면서도 엘리오는 아늑한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구천기로 마력을 흡수하든가, 없앨 생각에서다.
그러는 동안 파비안은 적당한 자리에 파이어 스톤을 설치했다.
화르륵―.
불길이 치솟자 파비안은 불가에 바싹 붙어 꽁꽁 언 몸을 녹였다.
아직 소드 비기너에 불과한 그에게 설원의 한파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도 돌아가는 길은 좀 덜 추운데?’
처음 타메이온에서 노숙할 때는 동상으로 죽는 줄 알았다.
그때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도움을 많아 받았다.
그런데 돌아가는 지금은 모든 게 견딜 만했다.
매 순간 작은 하늘 회로(small heavenly circuit, 小周天)를 돌린 때문일 것이다.
생각난 김에 파비안은 작은 하늘 회로를 한 바퀴 돌렸다.
역시나!
마치 봄 숲에 있는 듯한 청량한 느낌과 함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윽고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쳐다보았다.
‘응?’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작은 하늘 회로’를 한 바퀴 돌릴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게다가 뭐가 잘못됐는지 표정도 잔뜩 굳어 있다?
파비안은 왜 그런지 궁금했지만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작은 하늘 회로’를 가르쳐 주면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명상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고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잘 안 되나?’
그러고 보니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얼굴도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득 허기를 느낀 파비안은 에너지 볼을 꺼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그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눈을 떴다.
파비안은 급하게 씹던 에너지 볼을 삼켰다.
그리고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어때?”
“그대론데요?”
“진짜?”
“예, 눈빛이 조금 약해진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그대롭니다.”
“썅!”
순간 엘리오가 화를 냈다.
그의 안색을 살피던 파비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잘 안 됩니까?”
“마력을 흡수하거나 방출하려고 했는데…….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더 해 봐야지.”
“결국은 되겠죠?”
“되겠지.”
엘리오의 목소리는 처음 큰소리칠 때와 달리 풀 죽어 있었다.
“잘될 겁니다.”
“아, 몰라.”
투덜거리던 엘리오는 마하담(공간창고)에서 천막을 꺼내 던졌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파비안이 그를 도와 천막을 쳤다.
엘리오는 장기전에 대비해 천막 안에 침상과 탁자까지 설치했다.
그동안 파비안은 밖에 있던 파이어 스톤을 천막 안으로 옮겼다.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엘리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생은 반복되는 것 같아.”
“왜요?”
“내 고향에 있을 때 너랑 비슷한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라이를 쏙 빼닮은 사람도 있었어.”
“그 여자도 자작님의 침실에 뛰어들었습니까?”
“어?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샤모스가 그러더군요. 차려 줘도 못 먹는다고 하면서.”
“샤모스가 시킨 거였나 보네.”
“판 족장이 먼저 샤모스에게 물어 봤답니다. 그래도 되냐고. 그래서 멘티로어에게 지시했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너를 닮은 사람도 있고, 라이를 닮은 사람도 있었어. 그런데…… 고향에서처럼 내 얼굴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니 기가 막힌다.”
“고향에서도 그랬습니까?”
“누가 나한테 독을 써서 얼굴이 박살 났었어. 덕분에 독 저항력을 갖게 됐지만.”
“이번에도 잘될 겁니다.”
“잘돼야지. 이 꼴로 돌아다닐 수는 없다고.”
“빅풋의 심장을 먹고는 불그스름하기만 했는데……. 샤모스의 마력을 너무 받아들여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래 봐야 바닷물에 물 한 바가지 더 붓는 거라니까.”
“한 바가지라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양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니까요. 없던 게 생긴 거 아닙니까?”
“흐음!”
엘리오는 반박하지 못했다.
맞다.
단순하게 양으로 비교해 괜찮다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즉에 구천기가 마력을 흡수했어야 한다.
지금은 좁쌀 한 톨만도 못한 마력에 자신이 피해를 보고 있다.
그야말로 꼬리에 몸통이 흔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고?’
이어 ‘없던 게 생긴 거 아닙니까?’라는 파비안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즉시 침상에 뛰어오른 엘리오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