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18
1118회. 이럴 때는 같이 욕을 해야 되는 거야
눈 덮인 숲속에 있는 집을 보던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도 집이 있네? 저런 데 사는 사람은 뭐 해 먹고 사나?”
“별게 다 궁금하십니다. 먹고살 만하니까 저런 데 들어가서 살겠죠. 먹고살 게 없는데 집까지 짓고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뭘 먹고 사냐고.”
“저도 모르죠. 정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시든지요.”
“내가 졌다. 뺀질뺀질한 놈 같으니.”
엘리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도 뻔뻔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파비안은 더했다.
정오 무렵.
이제는 슬슬 불안해진 엘리오가 인가를 찾아 주변을 휘휘 둘러볼 때다.
뒤쪽에서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르르―.
길에 사람이 보여서 그런지 마차는 점점 속도를 늦추었다.
엘리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화려한 마차 장식과 독특한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보니 귀족가의 마차였다.
덜그럭. 덜그럭―.
마차가 다가오자 엘리오와 파비안은 길 끝으로 비켜섰다.
두 사람을 스쳐 지나던 마차가 돌연 멈췄다.
엘리오와 파비안이 의아한 눈으로 마차를 볼 때다.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마차 창문을 열고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기사요?”
파비안이 엘리오를 대신해 나섰다.
“베르나르도 후작가에서 작위를 받은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지금은 군복무를 마치고 제도로 가는 길이고요.”
“히르헤라에 있었소?”
“예.”
“히르헤라에 있었다니 용감한 기사들이군. 나는 칼슨 겔러거 자작이오. 여기서 제도로 가려면 내 영지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오늘 내 성으로 찾아오면 하룻밤 정도는 묵어가게 해 주겠소.”
그는 파비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창문을 닫았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속도를 높였다.
쿠르르르―.
북방의 좋은 점은 눈밭이라 먼지가 날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황당한 얼굴로 서 있는 파비안에게 엘리오가 다가갔다.
“뭐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몰라? 둘이 한참 떠들더만.”
“제도로 가려면 자기 영지를 지나가야 한답니다. 그리고 오늘 자기 성으로 찾아오면 하루 묵어가게 해 준다고 했고요.”
“초대를 받은 거야?”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의 초대는 처음이라서요.”
용사니 어쩌니 하더니 알아서 찾아오란다.
그리고 적선하듯 ‘하룻밤 정도는 묵어가게 해 주겠다’고 야박하게 숙박 기간까지 미리 못을 박는다.
“그래도 방향은 맞게 온 모양이네? 외길이잖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모든 길은 제도로 통한다고.”
“가 보자고. 돈도 아끼고 좋지.”
“예. 영지라고 하는 걸 보니 제법 규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싸가지가 없어 보이더라. 얼굴에 개기름도 흐르고.”
“자작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엘리오 자작님이 이상한 겁니다.”
“무슨 소리야? 베르나르도 후작님도 탄탄한게 천생 전사시구만.”
“후작님처럼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 귀족이 많은 건 아닙니다.”
“귀족이면 대부분 기사 출신 아니야?”
“많은 귀족들이 선대로부터 작위를 승계받습니다. 그런 귀족들은 굳이 검을 잡지 않습니다. 검술로 유명해지면 유사시에 가장 먼저 소집당하거든요.”
“가늘고 길게 가겠다는 거네?”
“예, 어느 길을 선택하든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승계받은 귀족들에게는 선택할 기회가 있으니…… 부럽죠.”
“너처럼 노력해서 작위를 받는 사람에게도 단점이 있냐?”
“있죠. 공을 세워야 하니 운이 없으면 전사하잖습니까.”
“아! 승계받은 귀족의 단점은?”
“검술에 뜻을 두지 않으면 약하다는 거?”
“억지로 짜 맞춘 느낌이다? 가문에서 검술을 가르칠 텐데.”
“그래도 저처럼 전쟁을 거친 기사 출신보다는 약합니다.”
“과연 그럴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저는 실전에서 다져진 검술이잖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네 말이 맞지.”
“무조건입니다.”
파비안이 말에 힘을 실었다.
사실 꼭 그래서라기보다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엘리오는 피식 웃을 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작위를 얻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한 파비안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잠시 후 허기를 느낀 두 사람은 길옆으로 빠져 에너지 볼을 먹었다.
그러다 문득 엘리오가 말했다.
“그 칼슨 겔러거 자작 말야. 생각할수록 싸가지가 없네?”
“왜요?”
“우리가 자기 영지를 지나간다는 걸 알면서 마차도 안 태워 줬잖아. 그러면서 뭐? 찾아오면 하루 정도는 재워 줄 수 있다고? 히르헤라 주둔군 덕분에 살아 있으면서 기사들을 이렇게 개무시해도 되는 거야?”
“말씀드렸잖습니까? 자작님이 특별한 거라고요. 원래 자작쯤 되면 일반 기사들과 만나 주지도 않습니다. 제가 남작이라도 되니까 초대를 한 겁니다.”
“그래도 북부의 영주가 그러면 안 되지. 목숨 걸고 히르헤라를 지키고 있는 기사에게 존경심을 보여야 되는 거 아냐?”
“귀족들은 자기들이 그래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그래도 그게 현실입니다. 히르헤라에 있는 귀족들이 대단한 겁니다. 뭐, 윗분이 가니까 억지로 따라온 사람들도 많지만요.”
“바깥세상이 이런 줄 알았으면 히르헤라에 있는 귀족들에게 좀 더 잘해 줬을 텐데. 완전 미안하네.”
그러자 파비안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그를 괴팍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저런 말을 들으니 존경스러웠다.
‘하긴 원래 그런 분이셨지.’
같이 지내다 보니 깜빡했지 본래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그런 쪽으로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푸토코아 백작가에 야인 부족의 복수를 하고, 평민인 자신에게 아낌없이 검술을 가르쳐 주는 것 등…….
다른 건 다 차치하고,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왔다는 것부터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거야말로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성자(聖者)가 아닌가 말이다.
“뭘 그렇게 꼬나봐?”
“꼬나본 거 아닙니다.”
“아니긴, 불만 있으면 말해. 속으로 꿍해 있지 말고.”
“자작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눈이 마주치면 기분 나쁘다, 꼬나본다라고 하시니까요.”
“자기를 야수라고 생각하는 한심한 초식동물들 속에서, 초식동물처럼 보여서 귀찮은 일을 자주 당하는 야수?”
“하…….”
파비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있으면 존경받으실 분이 왜 스스로를 대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지 모르겠다.
“제 눈빛이 진짜 꼬나보는 것 같았습니까?”
“어. 너 지금도 눈빛이 삐딱해.”
“와아! 저는 자작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파비안.”
“예?”
“내가 너의 진심을 알지 못했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혹시 저의 잘못입니까?”
“그래, 속에 있는 걸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나를 존경한다면 시도 때도 가리지 말고 존경을 표현해라.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그건 아부 아닙니까?”
“너 세라 양에게 ‘사랑한다’고는 했냐?”
“명색이 기사가 낯간지럽게 그런 소리를 왜 합니까? 저는 행동으로 보여 줍니다.”
“행동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가 왜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 줬는지 알아?”
“왜입니까?”
“네가 가르쳐 달라고 했기 때문이야.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가르치지 않았을 거다. 말이란 그런 거야. 알겠어? 말에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 없는 것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그러니까, 사랑한다면 아끼지 말고 말해. 알겠어?”
“존경합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이군. 가자.”
“예.”
파비안은 파이어 스톤에 눈을 뿌려 불을 껐다.
그리고 파이어 스톤이 차갑게 식기를 기다렸다가 가방에 수납했다.
엘리오는 파비안이 준비를 마치자 느긋하게 걸음을 떼었다.
한참을 걷던 엘리오가 못 참겠다는 듯 투덜거렸다.
“아! 이기적인 새끼. 오라고 초대까지 했으면 마차에 태워 줘야지. 혼자 쌩하니 가 버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그럼 생각을 하지 마십쇼.”
“너 누구 편이냐?”
“저야 당연히 자작님 편이죠. 다만 없는 사람 때문에 기분 상하지 마시라고…….”
“인마. 이럴 때는 같이 욕을 해야 되는 거야. 옆에서 조언이랍시고 도덕적인 말만 하면 더 짜증 나는 거 몰라?”
“아, 그렇습니까? 칼슨 겔러거 자작이 아주 싸가지 없는 놈입니다. 다음에 만나면 귀싸대기를 날려 버리십쇼.”
“그래, 이제 좀 기분이 풀리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칼슨 겔러거 자작의 욕을 하며 걸었다.
땅거미가 뉘엿뉘엿 질 무렵.
길을 따라 걷던 두 사람 앞에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나타났다.
2미터 높이의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컸다.
굳게 닫힌 출입문으로 다가간 파비안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이내 목책 위로 병사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십니까?”
기사 복장 때문인지 병사는 말을 높였지만 경계를 풀지 않았다.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이다. 제도로 가는 중이니 문을 열어라.”
“신분을 증명할 것이나 통행증이 있어야 합니다.”
파비안은 품 안에서 베르나르도 후작의 인장이 찍힌 통행증을 꺼내 병사에게 던졌다.
잠시 후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전까지 목책 위에 있던 병사가 두 손으로 통행증을 공손히 돌려주었다.
“이 추위에 출입 과정이 상당히 엄격하네? 여행자가 사고라도 친 건가?”
파비안의 물음에 병사가 답했다.
“아닙니다. 오늘 갑자기 영주성에서 감찰을 나온다고 해서……. 저희라고 이 추위에 망루를 오르고 싶겠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엘리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개새끼네.”
칼슨 겔러거 자작이 자신들의 방문에 대비해 감찰 운운한 게 틀림없었다.
막상 초대를 하고 미심쩍으니 신원 확인을 꼼꼼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하는 욕이 아님을 알고 못 들은 체했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출입문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은 도시라고 해도 될 만큼 컸지만 영주성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건축물들 뒤로 거대한 석조성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성으로 가던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물었다.
“여기가 둠스톤 영지라고 했지?”
“예. 닐 크로우 백작령에 있는 영지입니다.”
“닐 크로우 백작? 처음 듣는 이름인데? 에스카토스 왕국이야?”
“예. 닐 크로우 백작이 히르헤라에 파병을 하지 않았으니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백작이나 되는데 파병을 안 했다고? 히르헤라에서 멀지도 않으면서?”
“닐 크로우 백작이 낮에 말하던 승계받은 귀족입니다. 그래서 검술이 형편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영지병은 보낼 수 있잖아.”
“백작이 예술을 사랑해서 딱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만 보유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휘하의 영주들도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로 채웠다고 들었습니다.”
“이 추운 곳에서 예술을 한다고?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다른 사람들 좋으라고 하는 게 예술은 아니니까요.”
“아니, 썅, 그래도 히르헤라 바로 옆에서 무슨 예술이야?”
“얼마 전까지 균열은 비밀이었잖습니까. 균열이 발생하기 전까지 북부는 바람 한 점 없었습니다.”
“그건 또 그렇네. 그래도 이제 알았으니 영지병을 모집해야 되는 거 아냐?”
“그보다 히르헤라 주둔군이 차라트를 제거하는 게 더 빠를것 같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냐? 바로 옆에서 북부를 지키겠다고 피 흘리며 싸우는데 예술 타령이라니.”
엘리오는 영주성으로 가는 내내 툴툴거렸다.
파비안은 그런 그의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려 하지 않았다.
그도 엘리오 라고아 자작만큼 닐 크로우 백작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