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19
1119회. 예술을 사랑한다잖아
로디나 대륙 북부.
닐 크로우 백작령 둠스톤 영지.
영주성.
영주성에 도착한 엘리오와 파비안을 마중 나온 사람은 집사인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이었다.
“저는 둠스톤 성의 집사인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입니다. 영주님을 찾아오셨다고요?”
상대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파비안이 나섰다.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제도로 가던 중에 영주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성으로 찾아오라고 하셔서 들러 봤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동행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이 쳐다보자 엘리오가 간단히 답했다.
“기사요.”
그러자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은 그를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의 종자쯤으로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이 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영주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은 상대가 남작이라는 말에 끝까지 존대를 했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은 두 사람을 만찬장으로 데리고 갔다.
만찬장 입구에서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은 두 사람에게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주님께 아뢰겠습니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만찬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멈춰 섰다.
멀리 상석에 칼슨 겔러거 자작의 얼굴이 보였다.
만찬장에는 이미 적지 않은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히르헤라에 인접한 영지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안으로 들어간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이 뭐라고 말하자 영주가 파비안을 힐끔 쳐다보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밖으로 나온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입장을 허락하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의 말에 파비안이 슬쩍 물었다.
“평범한 저녁 식사 자리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닌 모양입니다?”
“영주님께서 제국에서 유명한 바르도스[吟遊詩人, 음유시인]인 나타샤 벨라 자작님을 초대한 자리라 손님들이 좀 있습니다. 본래 대귀족들 앞에서만 공연을 하는 분이신데……. 영주님이 오래전부터 후원을 하셨기에 영주님의 초대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이 우쭐한 얼굴로 파비안을 보았다.
그러나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이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술을 모르는 촌놈이구나.’
일 년 내내 검술만 수련한 무식한 기사라면 나타샤 벨라 자작이 얼마나 대단한 바르도스인지 모를 수도 있었다.
이윽고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은 두 사람을 데리고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한순간 만찬장에 있던 손님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집사인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이 입을 열었다.
“아나톨리아(베르나르도 후작령)에서 온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과 그의 기사입니다.”
소개를 마친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은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주에게 돌아갔다.
뻘쭘하게 서 있던 엘리오와 파비안은 대충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남작과 기사라는 말에 손님들은 이내 관심을 끊고 담소를 이어 갔다.
그때 영주인 칼슨 겔러거 자작이 들고 있던 포크로 황동 술잔을 가볍게 때렸다.
탱! 탱! 탱―!
왁자지껄 떠들던 손님들이 입을 다물고 영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클라우드 남작은 최근까지 히르헤라에 있었다고 들었다. 히르헤라의 빙벽에 구멍이 뚫렸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귀족들 앞이라고 칼슨 겔러거 자작은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손님들의 눈이 파비안을 향했다.
파비안은 속으로 ‘구멍 따위가 아니다.’라고 투덜대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입니다. 히르헤라에 생긴 균열로 마수, 마물은 물론 마족의 군단까지 넘어왔습니다. 여덟 개 왕국과 제국의 한 개 사단이 막아 주지 않았다면……. 북부는 마족들 손에 떨어졌을 겁니다.”
“오오!”
“사실이었구나.”
“세상에! 마족 군단이라니…….”
만찬장을 가득 채운 손님들이 술렁거렸다.
소문으로만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사실이라니 다들 놀란 얼굴들이다.
칼슨 겔러거 자작은 손님들이 관심을 보이자 이때다 싶어 말했다.
“우리 둠스톤 영지는 히르헤라에 접해 있지만 그곳의 사정에 어둡네. 히르헤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들려주게.”
부드러운 어조지만 이야기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파비안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영주의 명을 어길 수 없는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르헤라에 있는 균열이 발견된 것은 지난해 11월이었습니다…….”
칼슨 겔러거 자작의 눈이 시계로 향했다.
6시까지 온다던 바르도스는 7시가 된 지금도 감감무소식이다.
바르도스가 도착할 때까지 히르헤라의 이야기로 시간을 끌면 되겠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됐다.
히르헤라의 일로 인해 영지 주변에 마수나 마물이 늘어난 탓이다.
‘바르도스를 호위하는 용병단이 있으니 별일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연락조차 없으니 신경이 쓰였다.
파비안의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이번에는 더 많은 마족 군주들이 챔피언들을 앞세워 쳐들어왔습니다. 소드마스터들이 챔피언들을 상대할 동안 ‘히르헤라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기사가 마족 군주들을 균열 밖으로 몰아냈습니다. 마족 군주들이 달아나자 챔피언들도 타메이온으로 물러났지요. 전쟁이 마무리된 직후, 희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흑마법사들이…….”
파비안이 차라트에 대한 이야기를 막 꺼내려 할 때다.
집사인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이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론디니움 제국의 보물이자, 바르도스의 라이나(음유시인의 여왕)! 나타샤 벨라 자작님과 그의 일행이십니다.”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귀족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들은 방금까지 히르헤라의 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이미 전쟁이 마무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화려한 복장의 사십 대 미부가 일행을 거느리고 칼슨 겔러거 자작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칼슨 겔러거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예정보다 늦어 걱정하던 참입니다. 혹 둠스톤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아끼는 바르도스가 히르헤라에 있다고 해서 들렀다가 오느라 늦었어요. 에리카, 인사드리거라. 둠스톤의 영주이신 칼슨 겔러거 자작님이시다.”
나타샤 벨라의 뒤에 서 있던 이십 대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머리를 숙였다.
“에리카 노블입니다.”
나타샤 벨라가 설명하듯 말했다.
“제도에서는 요즘 저만큼이나 유명한 바르도스예요. ‘미성의 에리카’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요. 언젠가 저보다 높은 작위를 받게 될지도 몰라요.”
칼슨 겔러거 자작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바르도스의 여왕’인 나타샤 벨라가 극찬을 하는 바르도스라니!
“에리카 양, 잘 왔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무 때고 연락하게.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네.”
“감사합니다.”
에리카 노블이 머리를 숙이자 칼슨 겔러거 자작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서로 간에 소개가 끝나자 가르시아 베르날 남작이 음유시인들을 별도로 마련한 자리로 안내했다.
새로운 손님들의 등장과 함께 잊혀진 파비안은 엉거주춤 앉았다.
잠시 후 나타샤 벨라 자작과 함께 온 남녀 바르도스들이 무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타샤 벨라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비파가 무대 중앙에 설치됐다.
모두가 비파에 관심을 둘 때 칼슨 겔러거 자작의 장자인 아델 겔러거가 말했다.
“아버지.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희소식이라는 게 뭔지 궁금합니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들어야겠느냐?”
“둠스톤 영지는 히르헤라와 맞닿아 있습니다. 최근 마수와 마물에 의한 피해도 늘지 않았습니까? 희소식의 내용이 뭔지 알고 싶습니다.”
뚱한 얼굴로 듣던 칼슨 겔러거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희소식이라니 지금 들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는 다시 포크를 들어 황동 술잔을 때렸다.
탱! 탱! 탱―!
귀족들과 바르도스가 주목하자 칼슨 겔러거 자작이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클라우드 남작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마저 들어 봅시다. 남작, 희소식이라는 게 뭔지 마저 들려주게.”
파비안은 들고 있던 칠면조 다리를 접시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마법사들이 ‘차라트’라는 저주가 새겨진 뼛조각들을 균열 주변에 묻어 두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 뼛조각들을 제거하면 균열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실제로 백이십 개를 제거했더니 균열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균열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오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더 이상 히르헤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먼.”
쏟아져 나오는 귀족들의 말에 파비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파병도 하지 않고 놀고먹던 사람들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기가 막혔다.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 앉았다.
칠면조가 눈앞에 있었지만 입맛이 떨어졌는지 더 먹고 싶지 않았다.
한편 나타샤 벨라 자작과 함께 있던 에리카 노블은 뒤늦게 파비안과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뭘 그렇게 보느냐?”
나타샤 벨라 자작이 에리카 노블의 팔을 툭 쳤다.
“선생님, 방금 자리에 앉은 기사 보셨어요?”
“그래, 무슨 남작이라고 하던데. 아는 사람이냐?”
“아는 사람이냐고요? 저분이 바로 ‘타메이온의 기사’로 불리는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님이에요.”
“아, 저 기사가 그냐?”
“그 옆에 계신 분이 ‘히르헤라의 수호자’인 엘리오 라고아 자작님이시고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나타샤 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이십 대로 보이는 청년이 히르헤라의 수호자라니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농담이 아닌 듯 엉덩이를 들썩이던 에리카 노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인사 좀 드리고 올게요.”
에리카 노블은 잡을 틈도 없이 잰걸음으로 멀어졌다.
나타샤 벨라는 황당했지만 젊은 기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오가 파비안의 앞에 있는 칠면조 다리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내가 먹는다?”
“드십쇼.”
엘리오는 즉시 잘 구워진 칠면도 다리를 물어 뜯었다.
“쩝쩝, 너는 젊은 놈이 뭘 먹었다고 벌써 배가 부르냐?”
“갑자기 입맛이 달아났습니다.”
“왜?”
“히르헤라에서 피땀 흘려 싸웠는데……. 그게 이곳에서는 여흥거리에 불과한 것 같아서요.”
“인생이 본래 그런 거야. 싸우는 사람 따로 있고, 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알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화가 좀 납니다.”
“예술을 사랑한다잖아.”
“예술도 평화가 지켜져야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히르헤라를 지키다 온 기사보다 바르도스가 더 환대받다니.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는 엘리오도 반박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곳의 귀족들은 히르헤라에서 온 기사들보다 유명한 바르도스에게 더 열광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두 분 여기에 계셨네요? 제도(帝都)로 가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파비안이 뚱한 얼굴로 알은체를 했다.
“에리카 양? 노래 부르러 여기까지 왔습니까?”
“제 선생님이 후원자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해서 잡혀 왔어요.”
“칼슨 겔러거 자작요?”
“네. 두 분을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네요. 한 번쯤 오실 때가 됐는데 안 오셔서 궁금했는데, 제도로 간 게 아니었어요?”
에리카의 시선이 엘리오를 향했다.
마지못해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어디 좀 들렀다가 가는 중입니다.”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왜 이 자리에 계세요? 저 위로 가시지 않고.”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엘리오를 보았다.
공작들도 그의 눈치를 본다는데 왜 구석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다.
“귀찮아서 파비안의 기사 행세를 하고 있어요.”
“아!”
에리카가 탄성을 흘릴 때 나타샤 벨라 자작의 노래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