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2
112회. 술 먹을 때는 일 얘기 하는 거 아냐.
정주.
정주제일루.
늦은 밤.
정주제일루의 일꾼이 물동이를 육 층까지 옮기고 돌아갔다.
잠시 후 기루 주인 장보옥이 양팔을 붕붕 휘두르며 나타났다. 일 층부터 들고 갈 자신이 없어 육 층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녀는 커다란 물동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일 층에서부터 자신이 직접 들고 온 것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헉! 헉!”
장보옥은 겨우 세 계단을 올라가서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쉬었다. 기녀들이나 데리고 왔다 갔다 했지, 힘든 일은 하지 않아 몸이 버티질 못했다.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통천방 무사들이 당하는 걸 본 뒤로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시작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지만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다시 일어난 장보옥은 물동이를 두 팔로 끌어안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겨우겨우 칠 층에 오르자 과장된 몸짓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물론 고생해서 물동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래도 앓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스물다섯 명의 무사를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때 의자에 앉아 통천방 무사들에게 안마를 받고 있던 구천노도 심통과 장보옥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통은 고소하다는 얼굴로 ‘흥’ 하고 냉소를 날렸다.
그는 그녀가 연적하를 조롱했으니 그보다 더한 일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장보옥은 늙은이가 무시무시한 고수라는 걸 아는지라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또 무슨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부지런히 움직였다.
“소협, 말씀하신 따뜻한 물 가져왔어요.”
“아줌마.”
“아줌마 아닌데…….”
“그럼 이모? 고모? 숙모? 아니면…….”
“그냥 아줌마로 해 주세요.”
장보옥은 이 무서운 소년에게서 누님 소리 듣기를 포기했다. 계속 더 하다가는 그의 입에서 할머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하긴 아들뻘은 될 것 같은데 무리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흠칫 놀랐다.
저놈이 장사를 말아먹고 있는데 엉뚱하게 호칭에 신경 쓰고 있다니!
현실에 빠르게 적응을 한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하면서도 뭔가 씁쓸했다.
“애들 있어?”
“아들 하나 딸 하나요.”
장보옥은 불안한 눈으로 소년을 힐끔거렸다.
혹시라도 이번 일로 가족들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몇 살이야?”
“딸이 열세 살, 아들이 열 살이에요.”
“잘 키워.”
“네? 네…….”
그녀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속으로 그의 관심이 가족에게서 멀어지기를 기원했다.
그 간절한 바람이 통했나 보다.
소년은 더 이상 가족사를 묻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발을 씻은 뒤 탁자 위에 올라가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너무 메말라 보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던 장보옥은 낑낑거리며 물통을 계단 입구로 옮긴 뒤에 잠시 허리를 폈다.
한창 바쁠 시간인데 칠 층에는 구석의 한 자리에만 손님이 있었다.
상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 셋과 기녀 셋.
속삭이면서 소년과 노인 쪽을 살피는 걸 보면 호기심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아이고! 내가 미친년이지.’
물장사를 그렇게 오래하고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벌을 받아도 싸다.
그렇게 자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빨리 통천방에서 이 일을 해결해 주길 바랐다.
‘응?’
허리 숙여 다시 물통을 잡아 가던 그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계단으로 나이 지긋한 노인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허리춤에 고색창연한 검을 찬 노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장보옥의 사고가 정지했다.
노인의 눈에는 부드러움과 난폭함, 살의와 온화함이 뒤섞여 있었다.
녹림 칠십이채의 총채주 파천마군 석무해가 장보옥을 스쳐 지나갔다.
석무해를 발견한 심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서슬에 안마를 하던 통천방의 무사들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총채주님.”
심통이 먼저 정중하게 읍을 해 보였다.
석무해는 심통을 슬쩍 본 후에 창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인기척에 고개 돌려 상대를 확인한 연적하가 느릿하게 탁자에서 내려왔다.
“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푸하하핫! 정말 너였구나. 혹시나 하고 와 보았는데 바로 찾을 줄이야.”
“저를 찾아왔다고요? 왜요?”
연적하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석무해를 보았다.
둘 사이에 특별히 찾아다닐 만한 일이 없는데 그랬다니 놀란 것이다.
“어허! 정 없게 삼 년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왜요’라니? 이리 와서 앉아라. 술이나 한잔하자.”
침상 옆 빈자리에 앉은 석무해가 멀뚱멀뚱 보고 있는 장보옥에게 손짓했다.
그렇지 않아도 노인을 주시하고 있던 장보옥이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너는 얼른 가서 기본으로 한 상 봐 오거라. 여자는 필요 없느니라.”
“예, 예.”
석무해의 간결하고도 능숙한 주문에 장보옥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분이 높은 무림의 어르신 같은데 기루에 대해 빠삭한 것 같아서다.
석무해가 등장한 뒤로 썰렁하던 칠 층에 갑자기 온기가 넘쳤다. 술과 음식이 나오고, 조금씩 기루 특유의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살아났다.
석무해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심통도 끌어들였다.
세 사람 사이에 술이 한 순배 돌았을 때다.
연적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네 생각이 나서 오봉산에 갔더니 개봉으로 가라더라. 개봉에서 네 의형제들을 만나서 대충 전해 들었다. 내일쯤 대연상방에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주루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지 뭐냐.”
“이상한 소리요?”
“타지에서 온 두 놈이 정주제일루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나? 그 소리를 듣자마자 혹시나 싶어서 와 봤다. 본래 내가 촉이 좀 좋으니라.”
“아! 촉이 좋으시구나. 부럽다. 그런데 왜 저를 찾으러 다니셨어요? 바쁘신 분이?”
“어허,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를 해도 된다니까 자꾸 그러네. 자자, 한잔 쭈욱 마셔. 원래 술 먹을 때는 일 얘기 하는 거 아니야.”
“…….”
‘일’이라는 말에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아서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무해는 연적하와 심통의 잔에 술을 따르며 분위기를 돋웠다.
“어허허! 내가 사람을 잘 봤다니까. 너는 난사람이야. 기분 나쁘게 했다고 정주제일루 칠 층에 잠자리를 만들다니! 나는 진심으로 너의 행동에 탄복했다. 녹림인이라면 그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석무해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이다.
그는 진심으로 자라나는 새싹인 연적하가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기특해서 자신이 찾아온 목적도 깜빡할 정도였다.
“그런데 심가라고 했느냐? 몇 년 전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변했구나? 이제 제법 칼질 좀 하겠는데? 오봉산에서 무슨 기연이라도 얻은 게냐?”
“헤헤, 연 공자님에게 무공을 배웠습니다.”
심통은 총채주 앞이라고 평소와 달리 순진한 얼굴로 헤프게 웃었다.
석무해가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역시 우리 총순찰이야. 대단해. 나도 예전에 똘똘한 애들 골라서 가르쳐 봤는데, 영 시원치 않더라고. 그런데 우리 총순찰은 삼 년 만에 저런 물건을 만들어 버리네. 녹림의 복이야. 복.”
슬슬 석무해의 입에서 ‘총순찰’이라는 직함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장보옥은 아까부터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탁자 주위를 오락가락하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정주에서 술장사 이십 년에 ‘총채주’와 ‘총순찰’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면 죽어야 한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녹림의 복’이라고까지 했다.
나중에 온 신선풍의 노인은 녹림 칠십이 채 총채주 파천마군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염소수염의 노고수가 총순찰인 줄 알았다.
그러나 파천마군의 말을 들어 보니 아직 소년 태를 벗지 못한 청년이 총순찰이었다.
‘헉! 저 사람이 총순찰이었어?’
녹림의 총순찰이라면 총채주 바로 다음가는 자리다.
그런 사람을 조롱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무릎이 부들부들 떨렸다. 본래 녹림은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긴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현기증이 밀려오자 장보옥은 기루 벽에 살포시 기대 중심을 잡았다.
그때 계단으로 한 떼의 무림인들이 몰려왔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검을 위압적으로 흔들며 다가오는 그들은 통천방이었다.
‘아, 안 돼. 이 아저씨들아.’
뭐든 상대적인가 보다. 장보옥의 눈에는 통천방 무사가 평범한 아저씨들로 보였다.
***
정주제일루에서 빠져나온 신형 하나가 미친 듯 밤거리를 질주했다. 하지만 무공을 모르는 사람인 듯 애처로울 만큼 힘들게 달렸다.
잠시 후 그는 사파 연합 삭풍회가 운영하는 객점으로 뛰어들었다.
점소이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사내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소리쳤다.
“헉! 헉! 회주님! 회주님!”
점소이 하나가 사내를 삭풍회 회주가 사용하는 방으로 안내했다.
혼자 자작자음하던 삭풍회 회주 천수마검 한상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그게 저, 소인은 정주제일루에서 잡일을 거드는 놈입니다요.”
“그런데?”
“저희 주인님께서 이리로 가서 회주님을 꼭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으흥. 무슨 일로?”
한상은 조금 답답했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주변에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놈들이 별로 없어 익숙했던 것이다.
“기루 칠 층에서 삭풍회 장로와 통천방 방주가 녹림 총채주님에게 덤볐다가 작살이 났습니다요.”
순간 대경실색한 한상이 포효를 터뜨렸다.
“야! 이! 개새끼야!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떻게 해!”
***
정주제일루.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온 한상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우당탕. 쿵쾅.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그의 손아귀에 잡힌 계단 난간이 퍽퍽 터져 나갈 정도였다.
한상은 삭풍회 우두머리가 되기 이전부터 파천마군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파천마군이 어디에 떴다더라’는 소문만 들어도 달려갔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어느 날인가는 먼발치에서 그의 얼굴을 한번 보기도 했다. 한상에게 그날의 일은 일생의 기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뭐? 삭풍회 장로와 통천방 방주가 그분께 덤벼? 이 미친 새끼들이 죽으려고!’
한상은 이를 박박 갈며 날아갈 듯 계단을 올랐다.
잠시 후 칠 층에 올라선 그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헉!”
그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저주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이런 일이!
녹림 총채주 파천마군과 낯선 청년의 엉덩이 밑에 삭풍회 장로 암영귀살 임태근과 통천방 방주 탈명수라 천문광이 깔려 있었다.
“어허허헝! 파천마군 님!”
한상이 울부짖으며 석무해를 향해 달려갔다.
석무해와 연적하, 심통이 뜨악한 눈으로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늙은이를 보았다.
한상은 석무해의 앞에 이르자 조상님께 하듯 연거푸 절을 올렸다. 그에게는 오늘이 슬프면서도 태어나 가장 보람찬 날이었다.